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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클래식에서 길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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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현 (danpa)
"신문에 쓸 수 없는 것들, 써지지 않는 것들, 말로써 전할 수 없고, 그물로 건질 수 없고, 육하의 틀에 가두어지지 않는 세상의 바닥" 김훈 <공무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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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간 전국 누비며 옛 노래 발굴    2009/11/03 12:42 추천 4    스크랩  0
http://blog.chosun.com/danpa/4293121

서버에서 무슨 잘못이 있었는지 오전에 두 차례(!)나 업데이트에 실패했습니다. 진이 다 빠지네요. 삼세판 세 번째 시도입니다~.

 

글이나 말의 씀씀이에 대해 생각합니다. 무언가 생산하기보다는 전달하는데 그치고, 희망을 안기기보다는 분란과 갈등을 조장하는 것 아닌지 문득 돌아봅니다. 이런저런 고민으로 민속악 연구자 이보형 선생의 공릉동 자택을 찾아갔습니다.

 

음반과 장서가 미로처럼 꽂혀있는 댁에서 선생은 "나는 못난 사람"이라는 말씀을 일성으로 들려주셨습니다. "훌륭한 분들이 앞서 나갈 때 나처럼 못난 사람은 그들이 혹시 챙기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열심히 찾아 헤맸다"는 것입니다.

 

글 쓰는 자에게서 엿볼 수 있는 자기 중심적 성격이나 자의식을 선생의 말씀에선 도무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세상과 음악을 이야기하면서도 '나'라는 주어를 슬그머니 집어넣는 태도를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곤 합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나 자신을 버리기 힘든 법일텐데, 자신을 앞에 놓는 것이 아니라 뒤에 놓으려는 태도에서 적지 않은 걸 배우고 돌아옵니다. 그 인터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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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회 방일영 국악상 수상자인 민속악 연구자 이보형(李輔亨·74) 선생의 서울 공릉동 자택은 마치 복잡한 미로 같았다. 30평 남짓한 좁은 공간은 언어학·국문학·음악사는 물론 예술론·한국학·미술사에서 중국학까지 손수 분류해 놓은 수만 권의 책으로 빼곡히 들어찼다. 유성기 음반부터 현지 조사를 통해 직접 채록한 테이프까지 안방은 시청각 자료실로 바뀐 지 오래다. 이 선생은 "지난 30년간 이사는커녕, 수리 한번 제대로 못했다"며 웃음지었다.

방일영 국악상이 명창이나 연주자가 아닌 연구자에게 돌아간 것은 제2회 수상자인 만당(晩堂) 이혜구(李惠求) 선생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이다.

이혜구 선생이 대학 과정에 국악과를 창설하고 국악을 학문적으로 정립한 선구자라면, 올해 수상자 이보형 선생은 1960년대부터 200여편의 논문을 왕성하게 발표하며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경지로 남아있던 민속악의 학문적 기반을 다진 개척자로 꼽힌다.

제16회 방일영 국악상 수상자 이보형 선생은“지금 하고 있는 작업을 평생 다 못하고 죽을지 모른다. 우리 음악의 문법 체계를 완성하고 학문적 시각에서 음악 문화를 조명하는 일이 내 평생 과제”라고 말했다./이상선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특히 1974년부터 문화재연구소 전문위원으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채집한 민속악 자료들은 후배 연구자들에게 든든한 발판이 됐다. 그가 1990년 창립하고 지금까지 이끌고 있는 한국고음반연구회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수많은 옛 음반들을 소중한 우리 음악의 보고(寶庫)로 자리매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교수와 박사들을 숱하게 길러낸 '민속악 연구의 산실'이지만, 별도의 사무실 없이 선생의 자택에서 책상 세 개를 이어 붙여 나란히 앉아 공부하는 모습은 지금도 그대로다.

1935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난 이보형 선생에게 고향은 "전기도, 기차도 들어오지 않았지만 전통문화가 살아있는 현장"이었다. "김매기 소리가 1년 내내 들리고, 세시(歲時) 농악이 울려 퍼졌어. 한 해 농사가 끝나면 지역 명창을 불러서 사랑방에서 소리를 들었고, 마을 주민이 세상을 떠나면 씻김굿을 했지." 그에게 고향은 노동요와 농악, 굿과 판소리의 산실이었다.

젊은 시절 그는 시(詩)를 쓰고 실존철학을 공부하며, 전시회에 그림을 출품하는 등 다양한 예술활동에 바빴다. 하지만 1957년 전주의 한 서점에서 이혜구 선생의 역저 〈한국 음악 연구〉와 우연히 마주치면서 국악 연구의 결심을 굳혔다. "초판이 갓 나온 책이 하필 그때 내 눈에 띄냐고. 계시가 내렸다는 뜻으로 '신이 씹혔다'고도 해."

곧바로 서울로 올라온 그는 국립국악원 강좌와 상설무대를 찾아다녔고, 작곡가 나운영(1922~93) 선생 밑에서 배우면서 함께 민요 채집을 시작했다. "나 선생님께선 민속 음악의 어법을 서양 음악에 적용시켰으면 하는 바람이셨어. 하지만 죄송스럽게도 나는 그때 이미 국악으로 너무 나가버린 뒤였지. 선생님께선 '불교 연구하라고 절에 보냈더니 아예 스님이 됐다'며 걱정도 하셨어."

1974년 문화재연구소 전문위원이 된 그는 하루에도 수십 리 길을 걸으며 촌로들의 노래를 녹음기에 담았고, 돌아오면 그 노래들을 옮겨 적었다. 선생은 "남들은 월급이 형편없고 고생만 한다고 반기질 않았지만, 나는 생계 수단도 되면서 현장 조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냥 신났다"고 말했다.

1970년대 월간 《뿌리 깊은 나무》 한창기 발행인의 후원으로 판소리 감상회를 매주 거르지 않고 100회까지 진행하면서, 완창(完唱) 공연을 주도한 것도 그의 공으로 꼽힌다. "1950~60년대 서구화와 더불어 국악 공연이 사라지자, 명창들이 설 자리를 잃었어. 멍하니 앉아있다가 한숨만 늘어갔고, 자칫 모두 굶어 죽을 판이었지. 누군가 나서서 명맥을 이어가야 했어."

민속악이 있는 현장에는 어김없이 이보형 선생이 있었지만, 한국고음반연구회 회장 외에는 별다른 자리나 상 욕심이 없기로 국악계에서 유명하다.

"나 스스로 이 세상에서 대단한 일을 할 사람이라고 생각지 않아. 능력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가야 하지만, 나처럼 못난 사람은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찾아서 하는 거지. 국악계에서 황무지로 남아있던 분야에서 쓰레기통을 뒤져가며 귀한 자료를 찾아내서 조금이라도 문화 보존에 기여한 것이 가장 보람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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