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음악 역사의 산증인
비톨트 루토스와프스키비록 개인사는 불행한 정치적 사건들로 얼룩져 있지만, 예술이 결코 정치의 종속변수가 아니라는 것을 실천한 영혼이 바로 루토스와프스키입니다. 어쩌면 많은 폴란드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종교적인 시선으로 음악을 바라봅니다. 창조적 활동을 일종의 영혼을 낚는 행위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1948년 ‘폴란드판 쇼스타코비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쇼스타코비치는 약관의 나이에 교향곡 1번을 발표한 사회주의 소련의 총아였지만, 오페라 <므첸스크의 레이디 맥베스>에 대해 “음악이 아니라 혼돈”이라는 그의 비판이 ‘프라우다’지에 실리면서 ‘형식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게 됩니다. 1948년에도 문화의 당파성을 강조한 즈다노프 독트린이 발표되면서 그는 또다시 자기 비판을 해야 하는 처지에 몰렸습니다.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이 같은 비난은 사실상 반동으로 몰리는 것과 다름없었지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동유럽이 ‘철의 장막’ 소련의 직접적 영향권 아래 들어가면서 동유럽 각국에서도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을 잇달아 예술의 공식 원칙으로 천명합니다. 추상적이고 실험적인 예술을 배격하고 민족적 특징이 분명하며 인민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 원칙은 이를테면 ‘내용은 사회주의, 형식은 민족주의’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작곡가 루토스와프스키의 교향곡 1번이 발표된 것이 공교롭게도 이즈음입니다. 당초 파리 유학을 꿈꾸던 작곡가는 1939년 독일 나치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통신병으로 참전했지만 폴란드 서부 전선에서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8일 뒤 무사히 탈출에 성공한 루토스와프스키는 장장 400킬로미터를 걸어서 바르샤바로 돌아옵니다. 바르샤바 음악원에서 함께 수학했던 동료 작곡가 록산나 파누프니크와 바르샤바의 허름한 카페에서 피아노 2중주를 함께 연주하면서 힘든 시절을 헤쳐 나갔지요.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비운의 작곡가루토스와프스키는 1941년부터 교향곡 1번을 틈틈이 써나가 1944년 1악장을 완성했고, 1945년 종전과 더불어 폴란드가 독립하자 크라쿠프에서 목관 3중주를 초연하기도 합니다. 이듬해에는 교향적 변주곡이 파리에서 빛을 보면서 서서히 작곡가로서 주목을 받습니다. 1948년 드디어 그의 교향곡 1번은 폴란드 라디오 방송 교향악단의 연주로 초연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만 형식주의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10년간 폴란드의 연주 프로그램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심지어 폴란드 문화부 차관이 “루토스와프스키 같은 작곡가는 전차 밑으로 던져버려야 해”라고 말했다 전해집니다. 1957년 그는 “창조적 예술가의 정신은 극도로 예민하며 섬세한 악기와 같다. 이 악기를 공격하고 짓밟으려는 시도로 인해 우리는 극심한 우울증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고 회상합니다. 전도유망했던 작곡가는 이후 1954년까지 생계를 위해 주로 어린이를 위한 쉬운 피아노 소품이나 실내악, 영화음악, 라디오 방송과 시 낭송을 위한 부수 음악 등을 작곡해야 했습니다. 실용적이거나 기능적인 작품에 사실상 손발이 묶인 셈이지요. 하지만 루토스와프스키는 훗날 “이 시기는 내가 원했던 방식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었던 대로 작품을 써나갔다. 당시는 의도적인 타협의 시기였다”고 회상합니다.
작곡가가 폴란드 음악계의 중심으로 복귀한 것은 1954년 즈음입니다. 그때 폴란드 민속음악이나 민족주의적 색채가 뚜렷한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을 발표했지요. 그래서인지 이 작품에 대한 작곡가의 감정은 양가적입니다. 1973년 인터뷰에서 루토스와프스키는 이 작품에 대해 “민속음악에 영향을 받은 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진지한 작품”이라 평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는 이 작품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신선함은 일부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절하하기도 합니다. 일련의 정치적 파동 때문에 루토스와프스키에게 있어 민속음악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원칙에 따라 외부에서 강요된 것이라고만 이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작곡가는 “정부의 압력에 의해 민속적 선율로 작곡을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오해”라고 말합니다. 1988년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도 그는 “정부는 초창기부터 우리 음악계에 대해 일일이 간섭하기를 중단했다. 아마 그들이 보기에 음악은 그리 공격적이거나 큰 의미를 갖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음악은 문학이나 시, 연극이나 영화와 같은 방식으로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회상합니다.
루토스와프스키는 1958년 작곡가 벨라 버르토크를 추모하기 위한 ‘장송 음악’을 발표합니다. 평생 동유럽의 민속음악을 채집ㆍ정리하여 자신의 작품에 녹여 넣은 30년 연상의 버르토크는 루토스와프스키에게도 전범인 동시에 극복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작곡가는 “내가 민속음악 작업을 중단한 것은 더 이상 깊은 흥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걸로 끝이었으며 1955년 이후로는 결코 사용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루토스와프스키의 가족사에도 폴란드 현대사의 굴곡과 아픔은 고스란히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지주 집안의 의사였고, 아버지 요제프는 독일 피아니스트 오이겐 달베르트를 사사했지요. 정치적 행동주의자였던 아버지는 폴란드 민족운동에 가담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반(反)독일 세력의 거점으로 꼽혔던 모스크바로 향합니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1917년 10월혁명이 일어나고 신생 소련이 독일과 화해 무드를 조성하자, 작곡가의 부모는 ‘반혁명 행위’로 투옥되기에 이릅니다. 결국 아버지는 이듬해 처형당했고 어머니는 추방령을 선고받아서 살아남은 가족들과 함께 폴란드로 되돌아옵니다. 6세 때부터 피아노를, 13세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운 루토스와프스키는 14세에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를 작곡한 조숙한 음악 영재였습니다. 작곡가 스스로도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을 작곡가로 간주했고 피아니스트나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연주자로 활동하는 작곡가가 되리라는 걸 알았다”고 말합니다.
혼돈에서 질서를 창조한 그의 음악세계루토스와프스키는 동료 작곡가 파누프니크와 바르샤바 음악원에서 함께 수학하고 전쟁 시기를 함께 견뎌냈지만, 두 작곡가의 삶은 1954년을 기점으로 갈라집니다. 파누프니크는 그해 7월 영국 망명을 선택한 반면, 루토스와프스키는 폴란드에 남아 3주 뒤인 8월에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을 발표한 것이지요. 루토스와프스키는 1957년 작곡가 연맹 총회의 의장을 맡으며 서서히 폴란드 음악계의 중심으로 진입합니다. 훗날 서방에서 만난 파누프니크는 루토스와프스키에게 “다시 새장 속으로 돌아가려고?”라고 되묻습니다. 1953년 스탈린의 사망으로 해빙 무드가 일어나고, 폴란드에서도 블라디슬라프 고무카가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하면서 조심스럽게 자유화 바람이 일기 시작합니다. 고무카의 취임 시기와 폴란드에서 바르샤바 가을 음악제가 개최된 달이 공교롭게도 1956년 10월로 같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이 음악제는 2년 뒤부터 해마다 열리면서 현대음악의 조류를 동유럽에 소개하는 창구 역할을 합니다. 형식주의로 분류됐던 쇤베르크와 베르크의 작품들이 폴란드에 초연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입니다. 루토스와프스키 역시 헬싱키와 잘츠부르크는 물론 ‘새로운 음악을 위한 국제 하계 강좌(ISCM)’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면서 서유럽의 급진적 모더니즘 어법을 본격적으로 고민하기에 이릅니다. 작곡가는 당시 서구 음악계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베베른의 양식으로 작곡하고 있다는 점에 놀랐다. 베베른을 미학적으로나 기술적으로 모방하는 것은1959년에 이르면 정점에 이르렀다”고 술회합니다. 루토스와프스키 역시 버르토크를 추모하는 ‘장송 음악’에서 음렬주의를 본격적으로 실험하지만, “내게는 새로운 언어로 말하는 첫 단어가 되겠지만 결단코 마지막 언어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초기 민속음악에 경도됐던 루토스와프스키의 음악세계에 또 다른 전환점이 찾아온 것은 1960년입니다. 라디오 방송에서 우연히 존 케이지의 ‘피아노 협주곡’을 접한 작곡가는 “그 몇 분처럼 내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꿔놓은 시간도 없었다. 너무나 이상한 순간이었고, 예전과는 다른 음악을 쓸 수 있다는 걸 갑자기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이를테면 버르토크나 쇤베르크에서 존 케이지로 작곡가의 화두 역시 일대 변환을 맞은 것입니다. 작곡가는 케이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신은 화약고의 불꽃이 됐다”며 놀라움과 고마움을 동시에 표현합니다. 이듬해 1961년 발표한 ‘베니스인들의 놀이(Jeux Venetiens)’와 1964년 작곡한 현악 4중주에도 케이지의 영향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음악 구조를 지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우연성을 접목시키는 ‘제한적 우연성’이라는 과제에 매달린 것입니다. 이 같은 실험은 “나는 혼돈으로부터 출발해서 점차 그 속에서 질서를 창조한다”는 작곡가의 말로 정식화됩니다. 1980년대 내내 폴란드에서는 레흐 바웬사 주도의 자유노조 운동이 거세게 일었습니다. 루토스와프스키는 폴란드 공산 정부의 어떤 공식적 지위도 맡지 않고 정부 관료와도 만나지 않는 것으로 자유노조 운동과의 연대감을 드러냅니다. 1983년 자유노조상을 받았을 때 그가 그 어떤 상보다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1995년 ‘작곡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그라베마이어 상을 수상하고, 안네 소피 무터(바이올린), 크리스티안 짐머만(피아노), 로스트로포비치(첼로)와 폭넓게 교류하며 이들을 위한 작품을 쓰는 등 확고한 국제적 명성을 누렸습니다.
비록 개인사는 불행한 정치적 사건들로 얼룩져 있지만, 예술이 결코 정치의 종속변수가 아니라는 것을 실천한 영혼이 바로 루토스와프스키입니다. 어쩌면 많은 폴란드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종교적인 시선으로 음악을 바라봅니다. “나는 창조적 활동을 일종의 영혼을 낚는 행위로 간주하며, 이런 ‘낚시’는 수많은 사람이 겪는 고통과 외로움을 치유하는 특효약”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힘은 상상력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기도 합니다. “작곡가의 개인적 기법은 마치 중독자의 혈관 속에 흐르는 알코올과도 같다. 단 석 잔만으로도 취하게 하는데 충분한 것처럼, 아무리 작은 창조력이라도 음악 작품을 쓰기에는 충분하다”는 작곡가의 말처럼 말이지요.
글·사진 제공 _ 김성현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