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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의 극치'

동독이 1961년에, 떠나는 그 시민들을 막기 위해서, 베를린 장벽을 세웠을 때, 그 체제는, 공산주의 체계를 도망치기 위해 어떤 위험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저들의 의도와 활기에 대해서, 설명하지 못했다.
어떤 이들이 열기구(hot air balloons)를 타고 장벽 위를 날던 사이, 다른이들은 발틱해를 가로지르면서 멀리 돌아 항해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자동차에 비밀 칸막이를 만들어 곧장 몰래 숨어들기도 했으며, 또 다른 수백명의 사람들은 베를린 지하의 부드러운 모래 땅의 이점을 이용하여 장벽 아래 그들이 건너갈 터널을 만들기도 했다
그 벽이 허물어진 뒤 거의 20년이 지난 오늘날, 냉전 시대의 베를린 벙커와 터널 시스템은, 여행자와 지방 주민 모두에게 가장 인기 있는 구조물 중의 하나가 되어 있다.
2008년에만도, 150,000명 이상의 방문객들이, 20세기에 그 도시가 겪어냈던 강렬하고 강력했던 역할과, 또 아직도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유물들인, 버려진 벙커들과 터널들을 돌아보면서, 독일 수도 베를린이 갖고 있는 어둡고 칙칙한 이면을 실감했다.
헤이노 퍼치(Heino Ferch 1963-)가 열연한, 2001년 1월에 개봉됐던, TV용으로 제작된 수준 높은 독일 영화, ‘드 터널’(The Tunnel)이 보여주는 것처럼,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하쏘 허셀(Hasso Herschel)은, 비밀 터널을 통하여, 동에서 서로 도망치는 수십명의 사람들을 도왔다. 그 중 어떤이들은 그의 손으로 직접 판, 땅굴을 이용하기도 했다. ‘이것이 내 전 생애에 내가 했던 가장 잘한 일이었다.’고, 최근에 74세의 그 노신사는 말했다.
은퇴한 그는 정규적으로, 어떻게 지하 통로로 탈출이 가능했는지를 설명하면서, 구경온 사람들을 베를린 길거리 밑에 숨은 지하세계로 인도한다.
그가 1961년에, 가짜 패스포트를 가지고 서독으로 탈출한 후, 그는 1962년 9월에 처음으로 장벽 바로 밑에 여러 개의 불법 터널을 팠다. 그것의 입구는 장벽을 건너, 경계 동쪽의, 베르나우러 거리(Bernauer Strasse)에 있는, 한 집안에 숨겨져 있었다고, 그의 탈출을 도왔던, 그의 누이 아니타 묄러(Anita Moeller)가 설명한다..
‘우리는 집안으로 들어가서, 지하실로 내려갔고, 그 다음, 바닥에 있는 구멍으로 들어갔어야만 했다’고, 그녀의 갓난 딸과 남편과 함께 탈출했던, 묄러는 말했다. ‘처음에 나는 걱정했는데, 그것은 내가 폐소공포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둠과 좁은 장소를 두려워 했고,…하지만 내가 일단 터널 속에 들어 갔을 때는 걱정 따위를 할 시간은 내게 없었다.’
모두 29명이, 그 갱을 통하여 탈출하였는데, 그것이 그것을 당시의 가장 성공적이었던 터널 설계 중의 하나로 만들었다.
어떤 터널의 길이가 겨우 30m였던 반면, 어떤 것들은 그 길이가 170m에 달했다. 어떤 것들은 겨우 기어서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튜브 같았던 반면, 또 어떤 것들은 충분히 설 수 있을 만큼 높았다. 1961년 10월 부터 1982년 4월 까지, 그 다양한 땅굴을 파는데, 짧게는 3일, 길게는 6개월이 걸렸다. 대략 300명 정도의 사람들이 그 터널들을 통하여 탈출했다.
동독을 탈출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국경수비대원들은 탈출자들을 현장에서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연구자들은 그 장벽을 넘어려다 136명이 죽었다고, 그리고 동서독으로 나누이는 1378km의 그 국경선상에서, 8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비명에 죽어갔다고 추산하고 있다.
터널을 통하여 도망치다가 죽임을 당한 사람이 몇명인지는 분명치가 않다. 지난 달에 그 도시는, 터널을 파다가, 1962년 6월 12일에, 동독 당국자들에 의해 발각됐던, 노프케(Siegfried Noffke)씨와 호엩게르(Dieter Hoetger)씨를 표창했다. 노프케씨는 죽임을 당했고, 호엩게르씨는 살아남았지만 치명적인 부상를 입었다.
‘우리는 모두 71개의 터널을 찾아냈는데, 그 중 20%가 성공한 것이었다’고 베를린 지하세계 협회 이사장 아놀드(Dietmar Arnold)씨가 말했다. ‘대부분의 터널은, 흔히 당시 동독에 남아 있던 가족들을 구출하려했던, 이미 서쪽으로 건너간 남자들에 의해서, 서쪽으로 부터 동쪽으로 파여져 있었다.’고 아놀드씨는 최근 터널을 둘러보고 있던 관광객들에게 말했다.
둘러보기는, 보통, 웨딩(Wedding)의 인근, 떠들썩한 이민촌에 있는, 냉전시대 미로 벙커에서 시작한다. 여기에 있는 지하세계 협회는, 파낸 흙을 실어내는데 사용했던, 들통과 삽과 나무로 만든 작은 구루마를 갖춘, 실례(實例)를 보여주는, 모형 터널을 만들어 놓았다. 벙크 안의 불빛은 어둠침침하고, 섬뜩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냉전 시대에 사용됐던 형광성의 페인트가 벽에서 빛나고 있었다.
나중에, 그 관광단은, 그 토질이 지극한 점토인 관계로, 당시에 땅굴 파는자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던 곳 중의 하나였던, 밑테(Mitte)동네에 있는 베르나우러 스트리트(Bernauer Strasse)로 이동했다.
이곳이, ‘자유로 가는 길을 뚫어려고’, 최소한 15개의 시도가 이루어졌던 곳이라고, 아놀드씨는 설명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지 20주년 되는 기념일인 오는 11월 9일에, 통일 독일 베를린 개선문(Brandenburg Gate)에서는, ‘자유의 축제’가 그 절정을 이룰 것이다.
대략 1,000개 정도의 특대형 폴리스티렌 벽돌들이, 국경을 상징하기 위하여, 본래의 장벽 코스를 따라 세워져 있는데, 11월 9일에는 그것들 모두가 도미노 현상으로 무너지게 될 것이다.
우리도 그런 놀이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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