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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인사고과를 위해
본인 업적을 기술해 제출하라길래
올해 하반기동안
제가 쓴 기사들을
몽땅 읽어보았습니다.
음...
'업적'은 없고,
다만
유난히
외국인 인터뷰가 많다는 게 눈에 띕니다.
미국, 영국은 물론이고
뉴질랜드, 헝가리까지
국가도 다양합니다.
고정된 출입처가 없는 제게
인터뷰할만한 인물을 발굴해내는 일은
꽤나 고난이도의 작업인데요..
언젠가부터는 주로 각 대학이라든가 국제교류단체가 초청하는
외국 유명인사들을 '노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외국인 인터뷰를 유난히 많이 하게 되었지요..
저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는데도
신종플루에 안 걸리고 넘어간 게 용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지난주 일요일에는
바베이도스(Barbados)에서 오신 분을 만났습니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긴 한데,
도무지 낯선 국명이라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서인도제도의 남쪽,
카리브해에 있는 섬나라로
영연방국가랍니다.
1627년 영국의 지배가 시작되었고,
1966년 영연방으로 독립했다네요.
공용어를 보니 '영어'입니다.
이런~
통역이 없다고 '통보'받았는데
상대가 영어권 국가에서 오신 분이면
영어권 국가에서 살아보기는 커녕
어학연수 경험도 없는 저로서는
살짝 부담이 됩니다.
얼른 'Barbados'의 발음기호부터 확인해 보았습니다.
낯선 나라,
'바베이도스'에서 오신 분은
바로 이 분입니다.

1946년 박물관의 국제협력을 촉진하기 위해 파리에서 창립된
유네스코 자문협력기구로,
150여개국에 2만여명의 회원을 두고 있는 국제박물관 협의회(ICOM)의
알리산드라 커민스(Alissandra Cummins) 회장입니다.
ICOM 역사상
첫 여성 회장이지요.
약속장소인 장충동의 호텔에서
그녀와 처음 만난 순간
머릿 속에서
다음의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머나먼 카리브해로부터, 그녀가 왔다.
갈색 피부에서 미지(未知)의 바다가 묻어났다.
...이런 문장으로 시작하는 기사를 쓰고싶었는데
기사에 걸맞지 않은 문장이라고
야단맞을 것 같아서 포기했습니다.
이 문장이 떠올랐던 것은
커민스 회장을 만나기 직전에
서인도제도가 배경인 진 리스의 소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읽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때론 의도하지 않게
제 주변의 어떤 일들이 아귀가 딱딱 맞아 돌아가는 경우가 있는데
이번도 그런 경우가 아닌가 싶습니다.
미술사를 전공하고 관련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전문가들을 만나는 건
제게 언제나 즐거운 일입니다.
커민스 회장은 영국에서 미술사와 박물관학을 전공했는데요.
이번 인터뷰는
그 어느 때보다 훨씬 더 마음에 남았습니다.
아마도 그녀가
저와 마찬가지로 제3세계 국가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일 겁니다.
미국이나 영국 학자와는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진
미술사학자를 만난 건 처음이었습니다.
어쩌면 제게 필요한 건,
서방의 강대국 미술사학자들의 시각이 아니라
커민스 회장과 같은 시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그녀에게 일종의 동류 의식을 느꼈는데,
제가 커민스 회장을 만나기 전
'바베이도스'에 대해 찾아보았듯이
수많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저를 만나기 전
'대한민국'을 인터넷에서 찾아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일단 그녀는
캐러비안 아트에 대한 강한 자긍심을 지니고 있었고,
기록되지 않은 캐러비안 아트에 대해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싶어서
박물관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캐러비안 아트가 어떤 것인지 참 궁금했는데
그녀에 따르면
"예전엔 바다와 연관된 자연의 모습을 많이 표현했고,
요즘은 점점 인간 내면의 풍경을 표현해가고 있다"더군요.
그녀의 관심분야는
아프리카.오세아니아 미술과 20세기 유럽 미술간의 연관관계인데,
다른 말로 하자면
포스트 콜로니얼리즘(post-colonialism),
즉 '후기식민주의'입니다.
'후기식민주의'란 한 국가가 식민지 체제를 겪은 후에
발생하는 모든 담론들을 뜻하지요.
일제 강점기를 겪은 우리나라도 절대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서구의 박물관 관계자들을 인터뷰하면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생각하게 되어 있으니까요.
문화재나 박물관을 바라보는 서구적인 시각은
앞으로의 우리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식민지 경험이 있는
제3세계 학자들의 시각이 아닌가 합니다.
그녀는 저와의 인터뷰에서
"앞으로 박물관은 역사에 기록된 승자(勝者)의 이야기 뿐 아니라
평번한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도 보여주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고,
다른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박물관, 식민시대 문화변화상도 보여주어야 한다"고 했는데
이 두 이야기 모두가,
강대국의 식민지였던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미술사학자로서 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커민스 회장과 인터뷰를 하면서
제가 가장 관심이 갔던 것은
바로 아까 말한 그 부분,
앞으로 박물관이 나아가야할 길에 관한 것이었지만...
일반 독자들의 관심사는
좀 더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박물관협회보 기자였다면 그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겠지만
대중을 상대하는 일간지 기자는
전문가가 아닌 보통 사람들도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 거리를 끄집어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사를 읽지 않으니까요.
읽히지 않는 신문기사는
아무리 내용이 훌륭하더라도
기사로서의 생명력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외국인을 인터뷰할 때 흔히 써먹는 방법,
클리셰처럼 굳어져버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게 되었지요.
"한국 미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한국 미술품 중 인상적인 건 무엇이냐?"
.... 이러면 사람들이 관심을 많이 가지거든요.
타자(他者)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은
분명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만,
외국인을 만날 때마다 이런 질문을 하고 있자면...
꼭 타인의 시선으로 우리를 객관화할 필요가 있나..
우리는 우리 스스로 자신감을 가질 수 없을까.. 하는 회의가 들곤 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커민스 회장이 전형적인 서구 학자는 아니기 때문에
좀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쨌든,
외국인도 관심을 가지는 우리 것에 대해
우리가 잘 모르고 있는 부분도 분명히 있는 거니까요.
커민스 회장은 조선시대 초상화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마침 조선시대 초상화 카탈로그를 보고 있던 중이었거든요.
한국박물관 100주년 기념 전시회를 위해
마침 전주에서 태조 이성계 어진(御眞)이 올라와 있었는데
그 초상이 아주 인상적이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굉장히 파워풀한 초상이고,
옷의 푸른빛이 마음에 든다는 이야기는 기사에 썼습니다만...
너무 전문적인 이야기인 것 같아서 뺐으나 제 개인적으로는
흥미로웠던 코멘트는
"의자는 2차원으로 표현했는데 얼굴은 3차원으로 그려졌다.
굉장히 흥미롭다"는 것이었습니다.
훈련된 미술사가의 눈으로 보면
난생 처음 보는 낯선 그림도 그렇게 분석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눈썰미가 없어서 공부를 계속할 생각을 버렸습니다만,
그런 식으로 그림을 뜯어보는 걸 보고 있자니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5세기 초 조선의 한 화가가 그린 왕의 초상이
21세기 초 머나먼 서인도제도에서 온 미술사학자의 눈에 의해
읽혀지리라고는
그 초상을 그린 화가도,
모델이 되었던 왕도
당시엔 미처 생각하지 못했겠지요.
전 사실 너무 딱딱하다는 생각에
어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외국인의 눈을 통해
그림을 보니
아, 훌륭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날의 인터뷰를
아래에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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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 어진(御眞·임금의 초상), 굉장히 파워풀해요"
- 입력 : 2009.11.02 03:09 / 수정 : 2009.11.02 08:03
- ▲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커민스 ICOM 회장 '한국박물관 100주년' 포럼 위해 방한
"굉장히 파워풀한 초상이군요. 인물의 크기와 옷의 푸른빛이 인상적이에요. 푸른색은 제가 좋아하는 빛깔이기도 해요(웃음). 실물이 어떨지 기대가 됩니다." 1일 오전 서울의 한 호텔에서 조선시대 초상화가 실린 도록을 넘기던 알리산드라 커민스(Cummins·51) ICOM(국제박물관협의회) 회장이 태조(太祖) 이성계의 어진(御眞·임금의 초상)을 들여다보며 호기심에 가득 찬 눈을 반짝였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개최하는 한국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 국제포럼 참석차 방한한 커민스 회장은 기자에게 한글로 된 명함을 건네며 "한국에 대여섯번 오다 보니 아예 한글 명함을 만들었다"고 했다. "한국문화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고려청자, 신라의 금관, 조선시대 초상화 등이 아주 인상적이에요." 커민스 회장에게 서울은 인연이 깊은 곳이다. ICOM 사상 첫 여성 회장으로 선출된 것도 2004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박물관대회에서였다. 2007년 연임에 성공한 그는 내년 11월 초까지 ICOM 회장직을 맡게 된다. 1946년 박물관의 국제협력을 촉진하기 위해 파리에서 창립된 ICOM은 유네스코 자문협력기구로, 150여개국에 2만여명의 회원을 두고 있다. 카리브해의 섬나라 바베이도스 출신인 커민스 회장은 영국에서 미술사와 박물관학을 공부했다. 현재 바베이도스 역사박물관 관장을 맡고 있는 그는 석사과정에 있던 22세 때부터 박물관에서 일했다. "대학원에서 아프리카·오세아니아 미술과 20세기 유럽 미술 간의 영향관계를 공부하면서 박물관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는 "나는 박물관이란 인간에게 자신이 누구이고,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설명해주는 곳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박물관들은 왕(王)이나 귀족 같은 역사책에 기록된 사람들에 관심을 기울여왔죠. 저는 이제 박물관이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출 때가 왔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인류에 대한 완전한 그림을 그릴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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