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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선비 살해사건
낙서장  
조선선비 살해사건    2007/03/11 22:11 추천 0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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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가 요구하는 선비상 』

  이덕일 (역사평론가,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1. 정도전의 발상의 전환


  (1)친명파였던 정도전은 권문세족의 친원 정책에 반대하다가 나주 회진

  부락에 유배

* 귀양 간 정도전에게 보낸 부인의 편지

-“당신은 평일에 부지런히 독서에만 몰두하여 아침에 밥이 끓든 저녁에 죽이 끓든 간섭하지 않아 집안에는 한 섬의 쌀도 없었습니다. 방에 가득한 아이들은 끼니때마다 배고프다고 울고 날이 찰 때는 춥다고 울부짖었습니다. 제가 끼니를 맡아 그때그때 수단을 내어 꾸려가면서도 당신이 열심히 공부하시니 언젠가는 입신양명 하여 처자들이 우러러 의뢰하고 집안에는 영광을 가져오리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끝내는 국법에 저촉되어 이름은 더럽혀졌으며, 행적이 깎이고, 몸은 남쪽 변방에 귀양 가서 풍토병이나 걸리고 형제들은 나가 쓰러져서 가문이 망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현인, 군자의 삶이란 진실로 이런 것입니까?” (「가난」,『삼봉집』)」


* 유배시절에 대한 정도전의 회상

-“다만 내가 찬찬하지 못하고 너무 고지식하여, 세상의 버림을 받아 멀리 귀양 왔는데도 동리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두텁게 대접하니 이는 나의 곤궁함을 불쌍히 여겨서일까? 아니면 먼 지방에서 생장하여 당시의 의논을 듣지 못하여 내가 죄 있는 자인 줄 몰라서일까? 아무튼 모두가 지극히 후대해주었다. 내가 한편으로는 부끄럽고 한편으로는 감동하여 그 시말(始末)을 적어서 나의 뜻을 표시한다.”(「소재동기」, 『삼봉집』)


* 정도전은 유배 생활을 통해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얻었음

-역성혁명의 이론적 배경

“통치자는 법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서 다투는 자와 싸우는 자를 평화롭게 해 주어야만 민생이 편안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은 농사를 지으면서 병행할 수 없는 것이므로 백성은 10분의 1을 세로 바쳐서 통치자를 봉양하는 것이다. 통치자가 백성으로부터 수취하는 것이 큰 만큼, 자기를 봉양해 주는 백성에 대한 보답도 역시 중한 것이다. 후세 사람은 부세법을 만든 의의가 이러한 것을 모르고, ‘백성들이 나를 공양하는 것은 직분상 당연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가렴주구를 자행하면서도 오히려 부족하다고 걱정하는데, 백성들이 또한 이를 본받아서 서로 일어나 다투고 싸우니 화란이 일어나게 되었다.”(『조선경국전』부전(賦典) 부세(賦稅)


* ‘사람들이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약을 맺고 정부를 세운다.’는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의 사회계약설보다 무려 300여년이 빠른 것이었다.

 

(2)조선 개창의 의미

*유배 이후 9년 동안 잇단 시련 끝에 함주의 이성계 방문

-정도전의 승부수 : 우왕 9년(1383)

「정도전은 (이성계의 군대가) 호령이 엄숙하고 군대가 정제(整齊)된 것을 보고 나아와   서 비밀히 말하였다.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이에 임금(이성계)이 말하였다.

“무엇을 이름인가?”

정도전이 대답하였다.

“왜구(倭寇)를 동남방에서 치는 것을 이름입니다.”(『태조실록』7년 8월 26일)」


-둘의 만남은 이성계의 군사력과 정도전의 혁명사상의 결합:역성혁명의 핵심은 토지개혁

“농장(農莊)의 규모가 한 주(州)보다 크기도 하고, 군(郡) 전체를 포함해 산천으로 경계를 삼는다······佃戶들은 세금으로 소출의 팔구 할을 내야 한다.”(『高麗史』, 食貨 1, 田制)

-자영농의 몰락으로 개혁 필요성 대두


*위화도 회군(1388)⟶과전법 공포(1391)⟶조선개창(1392)

온건개혁파 신흥사대부:이색·정몽주 중심으로 고려 왕조는 존속시킨 채 개혁 주장

역성혁명파 신흥사대부: 정도전·조준 중심으로 새왕조 개창 주장


*과전법-고려말 조준의 토지개혁 상소문

“무릇 어진 정사는 경계(經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토지제도가 바로잡혀야 나라의 물자가 족해지고 민생이 후해지는 것이니 이것이 지금 가장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입니다… 위로는 시중(고려의 최고위직)으로부터 아래로는 서인에 이르기까지 관에 있는 자는 물론, 군역에 종사하는 모든 자와 백성 및 공사천인(公私賤人)으로 적에 올라 국역을 맡고 있는 모든 자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어야 합니다.”(『고려사』, 조준 열전)”

-과전법 시행(1391): 모든 백성에게 토지 분배 실패하고 직역자(職役者) 등에만 토지 분배. 과전법에 대한 정도전의 평가

“전하께서는 즉위하시기 전에 친히 그 폐단을 보시고는 개탄하여 사전을 혁파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셨으니, 이는 대개 국내의 토지를 몰수하여 국가에 귀속시키고 식구를 헤아려 토지를 나누어 주어서 옛날의 올바른 전제(田制)를 회복하려고 한 것이었는데, 당시 권문세족들이 자기들에게 불리하다 하여 입을 모아 비방하고 원망하면서 온갖 방해를 하여 이 백성들로 하여금 지극한 정치의 혜택을 입지 못하게 했으니 어찌 한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정도전,『조선경국전』, 부전)”

-과전법 시행 후 이성계는 배극렴(裵克廉) 등 군신들의 추대 형식으로 조선을 개창(1392)


(3)요동정벌-정도전 발상의 전환의 완성

「정도전이 지나간 옛일에 외이(外夷)가 중원(中原)에서 임금이 된 것을 차례로 들어 논하여 남은의 말을 믿을 만하다고 말하고, 또 도참(圖讖)을 인용하여 그 말에 붙여서 맞추었다.(『태종실록』, 5년 6월 27일)」


※정도전에게 배울 오늘의 교훈

-정도전의 유배 생활 같은 민중 생활 체험 필요

-친명·친원파가 아니듯이 친미·친중파가 아닌 친한국파 정치인이 필요

-미래의 역사방향과 일치하면 기존 가치 초월한 평가 가능


2. 조광조의 원칙 중시의 개혁


(1)조광조 등장 무렵의 조선 정국

-정국(靖國)공신들이 주도:현 정국과 비슷

-정국공신:연산군의 폭정을 종식한 공로 있으나 곧 부패했던 정치세력

-중종이 조광조를 중용한 이유-정국공신에 대한 견제

-조광조는 당대 일류급 인물

“조광조는 소년 시절에 학문을 좋아하여 게을리하지 않고, 뜻을 세움이 고원(高遠)하며, 옛것을 좋아하고 세상일을 개탄하면서 과거보기 위한 글을 일삼지 않으니, 부형과 종족(宗族)들에게 세속과 어긋나서 남의 비방을 산다고 꾸짖음을 당하였다. 장성하여서는 성리학에 잠심하였다. 자기의 한 말을 실행하고 행동은 예법을 준수하니, 한때의 유사(儒士)들이 애모(愛慕)하여 종유(從遊)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중종실록』10년 6월 8일)”

-중종 10년(1515) 이조판서 안당(安瑭)의 추천으로 조지서(造紙署) 사지(司紙)가 되었으나 다시 문과 전시(殿試)에 급제해 사간원 정언(正言)이 됨.


(2)조광조의 혜성 같은 등장

*조광조가 출사할 무렵 정국 현안은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순창군수 김정(金淨)의 신씨 복위 주장 공동상소 문제-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가 사망하자 새 왕비를 간택하지 말고 반정 직후 폐출된 중종의 첫부인 신씨(愼氏) 복위 주장-간쟁을 맡은 대간(臺諫)들까지 박상과 김정의 처벌 주장-체포

-조광조의 대간 처벌 요구

“언로가 통하고 막히는 것은 국가에 가장 중요한 일로서 통하면 다스려지고 평안하지만 막히면 어지러워지고 망하므로, 임금이 언로를 넓히기에 힘써서 위로 공경(公卿)·백집사(百執事)로부터 아래로 여항(閭巷)·시정(市井)의 백성에 이르기까지 다 말할 수 있게 했습니다······대간이 된 자로서는 언로를 잘 열어 놓은 뒤에야 그 직분을 다해 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정 등에 대하여 재상(宰相)이 죄주기를 청하더라도 대간은 풀어 주어서 언로를 넓혀야 하는데 도리어 스스로 언로를 훼손하여 먼저 그 직분을 잃었으니, 신이 이제 정언이 되어 어찌 구태여 직분을 잃은 대간과 일을 같이하겠습니까? 서로 용납할 수 없으니 양사(兩司:사헌부·사간원)를 파직하여 다시 언로를 여소서.(『중종실록』10년 11월 22일)”

-단숨에 정국의 핵심으로 떠오름


(3)조광조 개혁정책의 목적-조선을 성리학적 사회로 만드는 것

*왕실과 지배층의 모범 요구

-아악(雅樂) 연주자를 여악(女樂)에서 남악(男樂)으로 대치

-왕실의 반발 무릅쓰고 불교적 성격의 기신재(忌晨齋)와 도교적 성격의

 소격서(昭格署) 혁파.

* 민생 안정에 주력: 토지 문제와 노비문제 해결에 매진

-사림파의 토지제도 개혁안:정전제(井田制)·한전제(限田制)·균전제(均田制)

-정전제:동양 전통의 이상적 토지제도-토지를 ‘우물 정(井)’ 자 형태로 아홉으로 나누어 여덟 가구가 하나씩 경작하고 가운데 하나는 공동 경작해 세금으로 내는 토지제도였   다-토지의 균등한 분배

-한전제:정전제가 실현불가능하자 대안으로 내세운 법안-중종 13년(1518) 50결로 토지   소유 제한하는 토지소유상한제 실시-1년도 안되어 효과 없음이 밝혀짐-균전제 주장의 배경

-균전제:일정한 토지를 국유화해 백성에게 나누어주는 제도

「박수량이 아뢰기를,

“우리나라는 백성의 빈부 차이가 너무도 심합니다. 부자는 그 땅이 한량없이 연해 있고 가난한 자는 송곳을 세울 곳도 없습니다. 비록 정전법(井田法)이 훌륭하다 하더라도 지금은 시행할 수가 없으니, 균전법(均田法)을 시행하면 백성이 실질적인 혜택을 입을 것입니다.(『중종실록』13년 5월 27일)”

-노비 숫자 제한 주장


(4)자파 세력 강화 과정:현량과와 위훈 삭제

*현량과(1518:중종 15년):조정 내 사림파 세력을 확장 위해-추천에 의한 관료 선발제도- 120명의 추천자 중 면접을 통해 28명을 급제

*위훈삭제(僞勳削除):반정에 공이 없으면서 공신이 된 인물들의 훈작 삭제-중종의 집권기반에까지 손을 댄 것-사림파는 주저하는 중종을 압박해 117명의 정국공신 중 65%에 달하는 76명의 녹훈(錄勳)을 삭제-가장 큰 정치적 승리

*중종과 훈구파의 결탁

-훈구파 홍경주에게 내린 중종의 밀지-

“정국공신은 다 나를 도와서 추대한 공이 있는데, 지금 4등을 공이 없다 하여 삭제하기  를 청하니···(나중에는) 연산(燕山)을 마음대로 폐출한 죄로 논한다면, 경(卿) 등이 어육(魚肉)이 되고 다음에 나에게 미칠 것이다.”(『중종실록』 15년 4월 13일)

-조광조 사형, 현량과는 폐지·소격서 부활·위훈 삭제된 공신들 다시 복훈


※조광조에게 배울 교훈

*원칙주의-임금에게 솔선수범 요구

*현실에서는 패배했지만 역사에서는 승리

-조광조 사형 1년 후 사관의 기록

“조광조 등이 일을 행할 때 탄핵과 논박을 크게 하여 조정의 재상들이 주현(州縣)을 범할 수 없었고, 주현의 관리들도 역시 각기 스스로를 삼가니 백성들 사이에 침어(侵魚)의 괴로움이 없어지고 조정에서도 또한 뇌물을 쓰는 사람이 없어졌다. (『중종실록』, 15년 10월)”


-조광조에 대한 율곡 이이의 평가

“조광조가 대사헌이 되어 법을 공평하게 행사하니, 사람들이 모두 감복해서 그가 거리에 나갈 때면 매양 사람들이 그가 탄 말 앞에 늘어서서 ‘우리 상전(上典:속어로 그 주인을 부를 때 쓰는 말) 오셨다’라고 하는 정도까지 이르렀다”(이이,『석담일기(石潭日記)』)

-조광조에 대한 퇴계 이황의 평가

“그(조광조)로 말미암아 선비들의 학문이 지향해야 할 바를 알게 되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나라 정치의 근본이 더욱 드러나게 되었다···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한때 사림들이 화를 입은 것은 애석한 일이지만, 선생(조광조)이 도(道)를 드높이고 학문의 뜻을 확립한 공로는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정암선생 문집』 행장(行狀) 〕”


3.정조와 정약용의 개방적, 미래지향적 개혁 


(1)정조의 미래 지향적 개혁

*정조는 노론과 화해 추구하면서 미래지향

  -규장각(奎章閣):개혁문신 양성기관:검서관(檢書官)에 서얼인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유득공(柳得恭)․서리수를 임명-사회 밑바닥의 신분제 철폐의 움직임에 호응.

  -장용영(壯勇營):개혁무신 양성기관

  -천주교도 보호:성리학 유일사상 체제에서 다원 사상 체제 지향

  -정약용 등 남인 육성:노론 일당 독재 체제에서 다당 체제 지향


(2)개방성

*서학(西學) 수용-서학은 단순한 종교라기보다는 서양과학 이론의 수용 통로

*서학은 17세기 중반 인질로 끌려간 소현세자에 의해 유입-인조 23년(1645) 아담 샬이 준 서학 서적, 輿地球, 天主像 등 지니고 귀국-귀국 2달 만에 사망-소현세자가 가져온 각종 서학서적은 조선 지식인들에게 전해짐

*남인들의 서학 수용 이유

  -정권에서 밀려난 남인들은 주자학 절대주의 사상에 회의

  -성호 이익의 실학사상-선조 이경상 통해 서학서 접촉-서학서를 통해

  서양과학 이론 적극 수용

(3)실용성

*화성 신도시 건설:정조의 갑자년(1804) 구상에 의해 건설

  -재위 13년(1789) 사도세자 묘소 이전:양주 매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정약용이 중국 윤경(尹耕)의『보약(堡約)』과 유성룡의『성설(城設)』을 참고해서「성설(城設:화성 설계도)」 작성

-근대 실학정신의 구현:백성들의 강제 노동(부역)이 아니라 임금 노동에

 의해 건설

*새로운 형태의 계획 도시

-상업혁명 선도:화성 행궁 앞에 삼남(三南)과 용인으로 통하는 십자로(十字路) 개통하고 상가와 시장을 배치-국고로 상인들 인위적 유치

“(수원부사 조심태가 말하기를) 반드시 본고장 백성들 중에서 살림밑천이 있고 장사물정을 아는 사람을 골라 읍 부근에 자리 잡고 살게 하면서 그 형편에 따라 관청으로부터 돈을 받아 장사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관청에서 무이자로 6만 냥을 마련해 고을 안의 부자 중에 원하는 자에게 나누어 주어 장사하게 해서, 3년 후에 본전과 함께 거두어들인다면 백성들을 모집하고 산업을 경영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정조실록』, 14년 5월 17일)”.

-미곡전(米穀廛:곡식상), 어물전(魚物廛), 목포전(木布廛:옷감상), 미곡전(米穀廛:곡식상), 유철전(鍮鐵廛:놋과 철상), 관곽전(棺槨廛:관과 곽 등 장의상), 지혜전(紙鞋廛:종이·신발상) 등의 시전 개설

-행정도시이자 역사상 최초의 계획적인 상업도시

-농업 혁명 선도:수원 외곽의 버려진 땅에 대규모 저수지인 만석거 조성하고 대규모 국영 시범농장인 대유둔(大有屯) 건설

-병농일치(兵農一致)의 이상 실현: 2/3는 장용외영의 장교 서리와 군졸, 관예 등에게 나누어 주고, 나머지 3분의 1은 가난한 수원 백성들에게 나누어줌: 둔소(屯所)에서 모든 농기구 제공받음-반은 경작가가 갖고 반은 수성고(修城庫)에서 화성의 보수와 관리 비용으로 사용

-첫해인 정조 19년(1795)에 당시 최고의 1,500여석의 소출

-사업 확대:정조 22년(1798) 저수지 축만제(祝萬堤)와 대농장 축만제둔(祝萬堤屯)을 설치-대유둔을 북둔(北屯), 축만제둔을 서둔(西屯)이라고 불렀음-황해도 봉산에도 둔전 설치-봉산 둔전은 수확의 삼분의 일만 국고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병사들의 것이 됨.

-현재의 행정도시 논란에 교훈


4. 21세기의 과제-새로운 아젠다의 필요성


(1)한국현대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해방 당시의 과제

-농업국가를 산업국가로 바꾸는 것

-형식적·내용적인 민주국가를 수립하는 것

-산업화·민주화의 자력 수립으로 두 과제 모두 달성

-새로운 아젠다의 필요성

*성공적인 아젠다의 조건

-미래지향성-정조의 아젠다

-통합지향형-김유신과 김춘추의 아젠다

*현재 우리 사회에 필요한 아젠다는?

  -정신적·물질적인 삶의 질 향상

  -한국사 전래의 대륙성과 해양성과 현재와 접목할 필요성 ■


- 이덕일(역사 평론가,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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