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 4.3 사건의 진상 8(전국 남로당 간부 검거)
제 2장 제주 3.1 발포사건
8 3.1 사건 파업해제
3웡 16일 남로당 제주 3.1 사건 대책위원들은 파업을 해제하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이 모아졌다. 해제는 도청을 중심해서 관공서부터 하기로 하였다.
3월 19일 파업에 가담한 174개 단체에서 56개 단체가 파업을 해제하고 118개 단체는 파업을 계속하고 있었다.관공서들은 파업을 해제하였고,학교와 일반 단체만 해제하지 않았다.학생들도 3월 24일부터 조금씩 등교하기 시작하여 3월말에는 파업에 가담한 자들의 엄청난 희생과 제주도민에 게 어려움만 주고 총파업이 거의 해제되었다.
9.3.1 사건에 대한 미군정의 조치
미군정에서는 박경훈 지사 후임으로 전북 출신이며 한독당 농림부장관을 역임한 유해진 씨가 4월 10일 부임하였고,강인수 감찰청장 후임으로 서울 출신 김영배 씨가 3월 31일 부임하였다. 제주 주둔 경비대 9연대장 정창국 후임으로 이치업 소령이 5월에 부임하였다.제1구 경찰서장 갇옹효 후임으로 5월 24일 제주 출신 김차봉,다음 문용채 씨가 부임하였다.
제주감찰청장으로 부임한 김영배 씨는 경찰도 파업에 가담한 사람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 깜짝 놀라 제주 출신 경찰에 대해 사상적으로 의심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핵심 부서는 육지출신으로 교체하는 한편 제주 출신은 한직으로 보내게 되어 제주 출신 경찰은 자연 불평하게 되었고,협조하지 않게 되었다.제주 출신 경찰 100여 명은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고 사표를 제출하였다.
총파업을 선동한 500여 명을 체포하여 199명을 기소하고 61명 기소예정, 178명 계속 구금, 258명 석방, 연행자 중에는 총파업 본부장인 도청산업국장 임관호, 과장 이관석,인사과장 송인택 ,회계과장 강산염 등 도청간부 10여 명도 있었다.47년 5월 7일 응원경찰 400명은 제주도를 떠나 육지 본대에 귀대하였다.
새로 부임한 도지사 유해진은 제주도는 좌익이 강한 섬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부임하면서 경호원으로 서청단원 7명을 데리고 왔다. 이들은 밤에 지사의 관사를 경비하였다,
경무부에서는 5월 7일 응원경찰을 본대에 귀대시킨 이후 제주 경찰만 가지고는 치안이 어려울 것 같아 반공청년단원인 서청단원들을 계속 제주도에 상주시켰다.
10 서청단원 제주도에 투입
서청은 평남청년회, 함북청년회, 함남대한혁명 청년회, 황해청년회 등이 통합하여 46년 대구사건 후 11월 30일 서울에서 조직되었다. 서청 대표는 평남 정주 출신 신우기성이었다. 회원은 약 6,000여 명이었으나 47년 6월에는 2,000여 명으로 줄었다. 이들의 목표는 "조선의 국제 문제를 방해하는 음모자들을 제거한다" 였다.즉 반공이었고,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가 없었다.그들이 이러한 것은 북조선에서 공산당 때문에 살 수 없어 월남하였는데,공산당이 두고 온 북조선의 가족들을 수감시켰거나 살해하거나 추방시켰고, 재산을 강탈하거나 몽땅 몰수당하여 공산주의라면 이를 갈며 한을 품었다.
그들은 막상 남쪽으로 왔으나 먹고 살기가 막연하였다.그렇다고 미군정에서 지원을 해주는 것도 아니었다.이승만과 조병옥이 이들에게 약간의 경제적으로 지원을 하였는데 조병옥은 이러한 서청을 제주도로 보냈다.
서북청년들은 민청에 대해서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민청은 이러한 서청을 보고 참자니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그것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제주도의 주도권을 민청이 완전히 장악하였는데 몇 달 사이에 주도권이 바꾸어졌기 때문이다.민청의회원 수는 전국에 17,671 개 지부에 826,940 명으로 서청과는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경무부장 조병옥이 하지 장군에게
"민청은 남로당의 외곽단체이므로 즉시 해산시켜야 합니다."하고 건의하자 하지는 "서청도 같이 해산시켜야 한다"며 조건부 해산을 하겠다고 하자 조병옥은 하지에게 "서청을 하산시키면 경찰 힘만으로는 도저히 치안을 감당할 수 없다고 설득하여 47년 5월 16일 민청은 해산되었으나 서청은 그대로 였다. 남로당과 민청은 어디 두고보자 하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 민청은 47년 6월 5일 이름을 바꾸어 민애청으로 다시 출범하였다. 민애청과 서청은 극과 극이었다.
11 3.1 발포사건의 결과
1)( 47년 3월2일 제주 남로당의 선동으로 제주도청 직원 140명이 3.1 발포사건을 항의하면서 총파업에 들어갔고, 북제주군청,제주읍사무소 학교 등 156 단체 41,211명이 파업에 동참하였다. 심지어 모슬포,중문, 애월 파출소의 경찰까지 파업에 동참하였고, 3월 13일 중문지서 경찰 6명이 발포사건에 항의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2) 3월 18일 56개 직장이 파엄을 해제하였고, 한 달 동안 3.1발포사건에 대하여 항의하다 3월말에는 전원 파업을 해제하고 직장에 복귀하였다.
3)3월 말까지 파업에 가담한 자들 30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되었고, 4월 10일까지 합 50여 명이 연행되었다. 500여 명 중 330여명이 재판을 받았고 이 중 52명이 실형 선고를 받았으며, 52명이 집행유예,56명이 벌금을 ,168명이 기소유예,나머지는 훈방되었다.
4) 발포사건의 장본인인 도립병원 앞에서 총질을 한 이문규 순경을 파면하였고, 피업에 가담한 경찰 66명에 대해서는 직장이탈사태로 파면되었다. 그리고 제주 출신 경찰은 파업에 가담하여 사상이 불순히디고 하여 한직으로 밀려 났고,육지 찰이 제주 경찰의 핵심자리를 맡았다.
5) 47년 4월 2이루제주도 군정장관 스타우드 소령이 해임되고 베로스 중령으로 교체되었다. 그리고 4월10일 제주도지사 박경훈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사임하여 김영배로 교체하였고, 3월 31일 제주감찰청장 강인수를 해임하고 김영배로 교체하였고,경찰 고문관 팻트리지 대위도 리데루 대위로 교체하였다. 군정이나 경찰이나 똑같이 발포사건에 대해 책임을 통감한 조치였다.
대구사건을 경험한 응원경찰이 공포에 질려 순건적인 실수로 벌어진 사건이지 경찰이 계획적으로 지휘의 명령에 의한 발포사건은 아니다. 이것으로 3.1 사건은 수습되었다.
제주 남로당의 파워가 엄청나다는 것을 제주 남로당의 선동으로 일어난 제주 3.10 총파업으로 알 수 있었다.
좌파들은 정부에서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과대 포장하여 국민들을 선동하여 세를 확장해 나가는 것이 전술이다. 그래서 좌파는 부정부패,군부독재,빈부격차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국민을 선동하여 성장한다.
한국의 좌파는 5,18 사건으로 급성장하였고, 효순이 미선이 사건을 통해 세를 과시하였으며, 소고기 파동으로 그들은 결집하여 진보연대를 조직, 한국은 낮은 단계 연방제 공산화가 되었고,2012년을 높은 단계 공산화인 목표를 향해 투쟁하고 있다.
12, 47년 8월 12일 전국남로당 간부 검거
7월 20일 남산에서 민전이 주최한 '미소 공동위원회 재개' 인민대회 때 좌파 20여만 명이 모이자 우익에서는 놀라 기절할 지경이었다. 조병옥 경무부장은 8.15 행사를 기헤 남로당에서 전국적인 폭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에 의해 경찰은 이를 사전에 봉쇄하기 위하여 좌파단체 간부들을 전원 체포하라고 전국 경찰에 명령을 내렸다.
47년 8월 12일 밤 이 명령에 의해 전국에 있는 경찰들은 일제히 좌파 간부 검거에 나섰다. 남로당,민전,전평, 전농 등 좌익단체 간부 1,30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8월 14일 경무부에서는 성명을 발표 하였다.
<북의 세력은 남조선을 그 세력 범위 안에 예속하려고 남조선의 자기 동지인 불순분자와 통모하여 사상 투쟁과 비합법적인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 성명서에 좌파에서는 이번 검거 선풍을 좌파를 때려잡기 위한 방법이라고 항의하였다.실은 민전 주최로 8.15 2주년을 맞아 전국적인 기념대회를 하기 위해 준비위원회를 조직했는데 경무부장 조병옥 씨가 기념행사에 대한 강력한 제한조치를 취한 것이다.그러나 민전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강행할 뜻을 보이자 8월 12일 새벽 좌익단체 사무실을 급습하여 간부들을 연행한 것이다.
제주도 경찰도 8월 14일 민전 간부와 남로당에 가입하였던 공무원들을 연행해 갔다.연행자 중에는 전 제주지사 박경훈, 조천면장 출신 민전부의장 김시범,사무국인 제주금융조합이사 출신 고창무 등과 사회인사와 이관석 학무과장,도청직원 8명과 도립병원의사 간호사 세무서 직원 등 30여 명이 연행되었다. 나머지 간부들은 연행 당하지 않으려면ㅇ 육지나 일본으로 도망쳐야 했고, 도망치지 못한 사람들은 한라산에 들어가 숨어살아야 했다.
제주도 인민위원회 위원장 오대진,김택수 등은 일본으로 도피하였다. 이상의 검거한 사람들은 3.1 발포사건과는 관련이 없다. 얼마 후 이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해방에서 지금까지 제주도에서는 민청과 인민위원회의 좌익 세력에 눌려 우익진영이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가 조병옥의 좌익 검거령이 내려지자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세력확장을 하며 아연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경찰도 47년 7월 제주 경찰학교를 설립,12월말까지 146명을 졸업시켜 제주 경찰에 배속하였다. 제주 경찰은 총 465명으로 증가 되었고, 남로당의 활동은 점점 어려워졌다. 경찰은 남로당에 가입한 공무원에 대한 권고 사직하여 공무원에 대해 일제 쇄신을 꾀하였다.
남로당 제주도장도 이 때부터 중장당 군사부 조직과 같이 군사부를 신설하여 군사부 중심으로 조직을 재편하였다.
~~~~~~~~~~~~~~~~계 속~~~~~~~~~~
글쓴이; 이선교
실린곳;제주 4.3사건의 진상
펴낸곳;도서출판 현대사 포럼
**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이 한반도 내 唯一합법정부임을 선언하여 북한을 不法점거단체로 인식케하는 대한민국 국가정체성의 핵심조항]이며 [헌법 3조에 입각해서 볼 때 남북통일統一 역시 대한민국과 북한의 통일이 아니라 대한민국에 북한이 통합되는 과정,즉 흡수통일吸收統一이 될 수 밖에 없다] --숭실대 강경근 교수 헌법상 규정된 이 통일방식을 제쳐두고 반역도 제갈대중이와 북의 빨/갱/이 김정일 살인마귀놈과 야합한 6.15 적화통일 휴지조각을 이행하라고 주장하는 박근혜는 규탄되어야 하며 호남인이 주축이 되어 북의 미군철수 북침설 연방제에 동조하는 빨/갱/이 방송 MBC는 영구 퇴출되어야 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