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가 보고자 하였던 것은, 느끼고자 했던것은 오직 휴식이었을까요?
애인과의 한때의 농익은 밀회였을까요?
하나님께 제단을 쌓듯 가까이 가고자 하는 노력의 표출이었을 수도 있잖아요?
그만의 성취감에 도취된 건축가적 작품을 향한 의지였을런지도 모르지요.
어쩌면, 노숙자의 독백은 아니었나요?
이민자의 회한을, 이루려던 꿈의 수포로인한 도발적 행위였다 할 지라도 단하루만 이라도
인생을 향유하려 했다면 그의 삶은 아름다운 무엇이있지 않겠는지요.
마치, ‘나는 이미 이 큰 토론토라는 도시에서 설자리를 잃었기에 고향내가 나는 숲으로 올
수밖에 없었노라, 아무도 나를 받아주지 않아도 좋다. 숲으로 가자. 그곳에서 다시 시작
하는거야. 나의 삶터를 만들고 자연을 친구로 하면 다람쥐와 풀벌레들은 나를 박대하지 않
겠지……..’ 스스로의 자위적 자구적 대책이었는지요?
모든 금색의 잎들이 다 떨어진후 얼마나 쓸쓸해 질것인가를 염려하기 보다는 봄되면 새싻이
돋아 다시 포근하게 감싸 줄 것만을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겨울되어 눈보라 혹한 추위가 되면 아무 쓸데없는 헛수고가 된다고 염려하기 보다는 긴 긴
여름날 햇볕이 쨍쨍내리쬐는 대지를 피해 한줌 휴식을 늘어지게 취할 수 있을것이라는 기대
가 훨신 컷을 것입니다.
그 기대는 희망이고 소망이되어 이미, 숲속에 머무르는것이 아니고 열려진 창문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보려던 의지이며 추위에 떨면서도 창문에 끼인 성에를 옷깃으로 닦으며 보려던 바깥
세상에 대한 도전의식입니다.
진정 그가 원하던, 보고자 했던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늙은 뽕나무에 올라가 머얼리서 오시는 님을 미리 보려는 그리움이었나요?
문첩첩 닫힌 방에서 삐끔히 내어다 보며 인기척, 발자욱 소리 기다리던 새악시적 소심함이
아니고 화알짝 사방팔방 그리고, 하늘문까지 열어제낀 채 늘어지게 한잠 자며 여유있게,
오실것을 굳게 믿으면서 평안속에서 소망하며 기다린 끝에 구름타고 오시는 이와의 역사적
만남 이었을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