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틴 학살(Katyn Massacre)사건

카틴숲 학살사건(Katyn Forest Massacre)으로도 알려진 카틴학살사건은,
구소련 비밀경찰총수(1938-1953)였던 베리야(Lavrentiy Pavlovich Beria 1899-1953)의,
폴란드 장교단원 전원 처형 제언을 근거로,
구소련 내무성(NKVD)이
폴란드의 장교들,
정치가들, 지성인들
그리고 전쟁포로가 된 국민들까지
수만명을 대량학살했던 사건을 말한다.

1940년
3월 5일자의
이 공식문서에는
스탈린(Joseph Stalin)과 베리야를 포함한
구 소련 최고권력기구였던 공산당정치국(Politburo)소속
전원의 서명이 들어 있다.

희생자의 수는 대략
2만2천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지만,
가장 일반적으로,
21,768이란 숫자가 언급되고 있다.
희생자들은 러시아의 카틴(Katyn)숲과 칼리닌(Kalinin/Tver)과
하리코프(Kharkov)수용소와 그밖의 다른 곳에서 학살됐다.

대략 8,000명은
1939년
소련의 폴란드 침공 때
전쟁포로가 됐던 장교들이었고,
그 나머지는 첩보원, 헌병, 방해활동자(saboteur),
지주, 공장주, 변호사, 성직자, 그리고 공무원들로 지목돼
끌려온 폴란드사람들이었다.

폴란드의 징병제도가,
면제되지 않은, 모든 대학졸업자는
예비역 장교가 되어야만 했기 때문에,
구소련은 폴란드의 지식층과
폴란드의 시민이었던,
유대인,
우크라이나인,
조지안 그리고 벨라루시안
지식층을 송두리째 뿌리 뽑을 수 있었다.

원래 카틴학살은, 러시아 스모렌스크(Smolensk)에서 19km떨어진
카틴과 그네즈도보(Gnezdovo)마을 부근의 카틴숲에서 있었던,
코젤스크(Kozelsk)전쟁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폴란드군장교들에 대한 학살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스타로벨스크(Starobelsk)나 오스타시코프(Ostashkov)수용소의
유사한 전쟁포로 처형과 서 벨라루스(Belarus)와
서 우크라이나(Ukraine)의 정치범 처형,
스탈린의 명령에 의한, 카틴숲에서의,
스모렌스크의 내무성(NKVD)본부에서의,
스모렌스크 도살장(slaughterhouse)에서의,
그리고 칼리닌(Kalinin/Tver), 하리코프(Kharkov),
모스크바(Moscow), 그리고 다른 구소련 도시들에서의
사살에도 적용되고 있다.

나찌 독일은
1943년에 카틴숲에서
대형 무덤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그 폭로는 모스크바와 당시 런던에 있던
폴란드 망명정부 사이의 외교 단절을 야기했다.
소련은, 결국 그 이후의 은폐는 물론,
그것이 비밀경찰(NKVD)에 의해 자행된 학살이란 것이 밝혀진,
1990년까지 계속해서 그 학살을 부인해 왔었다.

러시아연방 검찰청의 수사는
그 학살에 대한 구소련의 책임을 확인해 주고는 있지만,
아직도 이 만행이 전범(戰爭犯罪)인지, 아니면 특정 민족에 대한
계획적인 집단학살(genocide)인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이것이 판명됐다면, 폴란드 정부가 요구했던 것에 대한,
이 만행으로 부터 살아남은 자들의 기소가
수반됐을 것이다.
또 러시아 정부는,
사후 처우에 대한 공식적인 잣대인,
스탈린지지자들의 압제에 의한 희생자들의
죽음에 대한, 분류도 하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당시의 국제 정치 상황을 잠시 부언해 보면,

카틴 숲의 학살(Zbrodnia katyńska/Катынский расстрел)은
소련 국내의 스모렌스크(Smolensk) 근처
게네즈도보(Gnezdovo)마을
부근의 숲에서
소련의 비밀경찰(NKVD)이
폴란드군 장교, 지식인, 예술가,
노동자, 성직자 등 2만 2천-5천여명을
재판 없이 살해하고 암매장한 사건이다.

사실
카틴(Katyń)은
이 사건이 있었던 장소에서
가까운 지명의 이름일뿐
사건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지만,
당시 전쟁 중이던 독일이
대외선전용으로,
잘 알려진
이 지명을 사용하여
모두들 그렇게 알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우연히 발견되었으나,
1943년초 스탈린그라드에서 패배한후
의기소침해 있던 국민들에게
총력전을 호소해야만 했던
P.J. 괴벨스는
이를
반소련
선전에 이용하여
연합군 진영을 분열시켜 보고자 했었다.

실제로 그 소식은 국제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구 소련은 1941년 가을, 독일이 저지른 학살이라고 변명하였으나
독일은 1940년 봄 구 소련이 자행한 만행이라고 반격했다.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는, 오랫동안,
1939년에 독일과 구 소련이 폴란드를 분할 점령하였을 때,
구 소련에게 함락된 폴란드군 포로의 행방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려 온 터라
국제적십자사에게 이 사건의 진상 조사를 요구했다.

이에 화가났던 구 소련은 폴란드 망명정부와 단교했고,
영국과 미국은, 구 소련과의 불필요한 마찰은
전쟁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 아래,
이 사건에 관여하지 않았다.

당시 폴란드의 입장도 역시, 이 사건으로 인해,
아우슈비츠에서 나치 독일에 의해 계속 자행되던
대량학살에 대한 저항을 늦출 수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괴벨스의 선전공작은 실패로 돌아갔다.

암호해독의 거점이었던 브렌체리_퍽에서
추축국의 무선통신을 해독했던 연합국측도
이미 나치 독일이 대형 매장지를 발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1944년에 구 소련은 카틴 숲을 재조사하여 잔여 시체들을 발굴했고,
같은해 미국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카틴 숲 사건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하여
조지 알(George Howard Earle III 1890-1974)
대위를 밀사로 파견했다.

알은 조사끝에
소련이 그 일을 저질렀다고 보고했으나,
루즈벨트는 이 결론을 거부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아마도
그 사건의 당사자는
나치 독일이어야만 한다고 마음을 굳혔던 것 같다.

알의 보고는 결국
루즈벨트의 명령으로 폐기, 은폐됐다.
억울했던 알은,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조사를 공표하게 해달라고 공식적으로 요구했으나,
루즈벨트는 이를 금한다는 명령서을 알에게 보냈다.

알(Earle)은
보직 해임되어
전쟁의 남은 기간을
사모아에서
보냈다.

(* 이 글은 지인의 요청으로, 이미 알려진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발췌, 요약, 기술한 것일 뿐, 어떤 정치적인 목적도 게재되어 있지 않으며,
어떤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어서도 아니됨을 알려드립니다.)
Q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