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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은 자신을 어떻게 보았나의 고찰
자신을 어떻게 간주하는가라는 질문은 그가 어느 만큼한 은혜를 하나님 앞에 받았는가의 은총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게 해준다.
개신교에서 그 동안 아브라함은 중시하면서 유달리 야곱에 대해 천시하려던 그 속내의 뜻은 대관절 무엇이었을까 ? 성경을 되짚어 읽어나가다 보면, 아브라함의 아들들이 여럿이었고 - 그것이 본처에서 났든 몸종에게서 났든 제 3 부인에게서 났든 - 이삭도 아들이 둘 이상이었으나, 오로지 단 한 아들만 하나님의 선택을 입었다.
그러나 유독 야곱 혼자만이 그의 열두 아들 전부 다 하나님의 선택을 입는 기이한 승은을 입는다. 이 점은 왜 그럴까, 라고 왜 개신교는 한번도 고찰해본 적 없을까 ?
야곱에 대한 질문할 점은 더 있다. 창세기는 성경이 시작하는 가장 중요한 테마이고 주제이고 서막이다. 창세기가 빠지면 다른 성경은 뒤죽박죽이 된다. 이 창세기 안에서 야곱에 관한 장만이 가장 길다. 그것은 왜 일까 ?
오늘 한국기독교들이 업수이 여길 정도로 야곱의 신세가 하나님 보시기 별 볼 일 없었다면, 창세기 저자가 야곱에 대해서도 이삭 모양 짤막하게만 기술하고 끝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렇지 않다. 야곱에 관해서는, 그가 소싯적에 팥죽 한 그릇 팔아먹은 일부터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양들의 교미 앞에다 얼룩무늬 나뭇가지들을 갖다 세운 일까지 소상하게 기록해 놓는다. 왜 그랬을까 ?
야곱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곱이 중요한 이유는 야곱이 바로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시는 이스라엘이기 때문이다.
누구를 더러 왜 하나님의 사랑을 유달리 받았는가 를 묻는 일은 사실 해답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속 뜻을 도통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우리로서는 물어야 하고 묻고 싶다. 야곱은 어찌하여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그리 많이 받았을까?
이것에 대해 야곱 그 자신에 관해 야곱의 입으로 나오는 자신을 알려주는 글귀가 하나 있다.
"나는 가치없는 자입니다." - 창세기 32:10
밤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며 하는 말 가운데 나온다. 그는 에서가 장정 400명을 거느리고 자신을 맞으러 나온다는 소식을 그날 받았다. 40의 수는 고난의 숫자다. 40의 열배 되는 장정을 데리고 나온다는 것은 야곱의 앞에 큰 위험이 임박했다는 단서적 숫자 일 수 있다.
아버지(이삭)의 집을 떠날 때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에게, 너의 형의 노여움이 풀리면 집으로 돌아오라고 통보를 보내겠다 고 약속하였지만,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노예처럼 일하던 20년 동안 아무 소식도 받지 못하였다.
다만 오직, 하나님께서 이제 라반의 집을 떠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라라고 알려주신 그 소명에 뜻을 좇아 자기 자녀들과 부인들을 거두어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라반은 열심히 일하는 야곱의 품삯을 열번이나 바꾸어 깎았고, 그러함에도 야곱은 큰 부자가 되어 돌아가게 되었다.
야곱은 말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그 많은 부인과 자녀들과 재산들을 거느리게 하신 그 모든 축복들에 대해, 그것은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에 불과함에도 하나님께서 내리신 은총이라고.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저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저의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주님께서 저에게 말하시기를, 저의 가족 저의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셨고 당신께서는 저를 위하여 모든 일들이 잘 되게 해주실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지난 동안 저에게 보여주신 그 모든 친절과 신뢰를 저는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입니다. 요르단 강을 건널 때 저에겐 지팡이 말고는 하나도 없는 맨몸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제 두 큰 그룹과 같이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 - 창세기32:9,10
이 기도에서 야곱은 한 마디도 자기가 라반의 집에서 어찌나 열심히 일했던지,라반에게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라반이 자기를 어찌 혹사시켰는지. 자신이 하나님을 얼마나 잘 순종했는지 따위 허접한 기도는 전혀 하지 않는다. (** 이 글 쓰는 저는 오늘도 어제도 그제도 그그제도 그런 허접한 기도를 매일 섞었다 ! )
그저 야곱은 감사하고 있다. 그리고 말씀드리고 있다. 자기가 얼마나 가치없는 인간인지, 하나님의 그 모든 은총을 받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다는 것을 사실로써 담담히 아뢰고 있다.
야곱의 이 기도문을 붙잡고 한참을 눈을 감았었다. 매일같이 나는 구더기 같은 존재, 나는 지렁이 같은 존재 라고 말로는 떠들면서도 정작 하나님 앞에 가면, 주절주절 드리는 기도 속에다는 얼마나 허접하고 얼마나 하나님 입장에서 보실 적엔 욕지기 나는 소리를 많이 나는 채워넣었던가. 내일도 또 그럴 것 같다.
야곱은 그저 자기가 과거에 진짜로 허접한 빈 몸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지난 이십년동안 하나님께서 돌보아주셨다는 것을, - 라반의 집에서 양을 치며 땡볕에 굽히고 품삯을 열번이나 깎이우고 아내까지 바꿔치기 당했던 괴로움 같은 것은 꺼내지도 않는다. - 그리고 닥쳐올 에서와 상봉 앞에서 자신을 지켜달라고 간구하고 있다.
우리는 때로 또는 매일,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에 얼마나 흡족한 자격자인지 감탄하며 살고 있지 않는가 ?
이스라엘 자손을 향하여, 유태민족은 구원이 끊어졌다 라고 손가락질 하는 기독교인들의 속내란, 기실, 바로 그런 심뽀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루터도 칼빈도 마찬가지다. 자기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누릴 자격이 있어서 기독교인이 된 양.
기독교가 반유태주의 위에 뿌리 내리고 성장하여 왔다는 사실, 역사적 이면을 확인하는 순간, 게다가 기독교가 로마세법이 지정하여준 양식대로, 유태인과 유태교, 모세율법을 멀리 하고 - 세금 덜 내기 위하여 - 나아가 반유대로 가고 더 하여 이교도들의 취향까지 닮아가며 오늘날까지 교세를 확장하여 왔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것은 마치, 나의 조상이 살인자였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나 같은 충격이 왔다.
그것을 모르고 은총을 누리고 있다니!
유태인들은 이천년간 거주하던 곳에서 곳으로 추방당하고 또 쫓겨다니고 또 쫓기며 살아 갔는데, 만약, 우리 기독교도들을 향하여 그런 식으로 쫓기고 쫓기고 살해당하고 가슴에 노란 별을 붙이고 추방 당하며 살라고 한다면, 우리는 유태인 처럼 그래도 이천년 간 변함없이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며 구세주를 기다리며 살 수 있을까 ?
답이 없다 !
2009.7.04. 파아란 한은경.
http://cafe.daum.net/paaran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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