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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이면을 수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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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단편  
가을날의 레겐스부르크    2009/11/08 02:38 추천 0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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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겐스부르크는 내겐 '행복'의 동의어로 남아있다. 레겐스부르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성음 레코드 책자의 바흐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앨범에 참여한 한 연주단체의 이름으로서였다. 레겐스부르크란 말이 참 시적으로, 다정스럽게 들렸다. 그리고 1991년 7월 올훼스의 창을 읽으며 첫 배경으로 레겐스부르크를 접했다. 그 레겐스부르크 음악학교에서 곧 러시아의 광활한 대지로 번져갈 에픽같은 사랑의 첫 시발점으로 러시아에서 가슴아프게 끝나는 것과 대조되도록 너무도 낭만적이고 순수하게 펼쳐졌던 것이다. 마치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러시아의 대지와 헷세풍의 독일 소도시의 느낌이 각각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에 반영되는 느낌이었달까. 아니나다를까, 그 해 8월 레겐스부르거 돔스파첸이 온다는 소식을 이틀전에 듣고 과감히 입시학원을 빠지고 공연에 갔던 모험을 했다. 당시 그들의 합창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순 없었지만, 뒷무대의 추억이 걸죽하게 남았다. 그리고 다음에 왔던 빈 소년 합창단, 파리나무십자가 소년 합창단의 공연을 듣고, 이 레겐스부르거 돔스파첸이 얼마나 노래를 잘하는 합창단이었는지, 아니 얼마나 신실하게 공연을 해 들려주었는지 그들 합창의 진정성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bicycle

 

 

 

레겐스부르크는 유난히 가을과 어울리는 도시이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사실 관광시즌인 여름이 훨씬 더 활기차고 아름다울 텐데, 아마도 내가 처음 레겐스부르크를 갔던 때가 가을이어서 그랬을까. 아니, 고등학교 때 가을에 레겐스부르크 배경으로 자작소설을 지었는데, 그 때 바로 있었던 모의고사에서 족보에도 없는 1등을 하고, 1달후 자작그림을 그려서 족보에도 없던 최고점수를 받았던 그 가을날의 기억때문에 그랬을 게다. 그렇게 레겐스부르크는 내게 기적의 대명사로 통했다. 그 레겐스부르크를 처음 방문한 것이 2000년 11월이었다. 한창 가을 풍경이 절정을 달리고 있었고, 날씨가 아주 춥진 않았다. 나무마다 단풍이 울긋불긋 물들어있고, 또 아직 낙엽이 쓸쓸하게 밟혀서 부서지는 게 아니라, 잎이 생생하게 살아서 길에 수북히 쌓여있었다. 기찻길 주위로는 노란 벼가 익는, 한국에서 정겨운 가을날 모습으로 그려지는 풍경이, 집 모양만 달라서 양 옆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가을날의 레겐스부르크 산책은 정말 멋있었다. 도착한 날 레겐스부르크 대성당에는 레겐스부르거 돔스파첸의 750주년 기념 공연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것도 정말 운이 좋았다. 그들을 축하하기 위한 연회에도 따라와도 좋다고 하여 레겐스부르크 시청도 갈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풍경도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쵸콜렛 가게를 들르는 것 외엔, 도시 곳곳에 단풍색이 너무 짙어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그다지 나지 않았다. 산책하며 이리저리 풍경사진을 찍었다. 단풍길을 달리는 자동차와 운하 옆에 비스듬히 세워진 자전거는 그 자체가 이야기가 있는 사진을 만들어 그 운치를 더 해 주었다.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의 레겐스부르크 이야기는 내 가족되는 사람으로부터, 내가 가을날 레겐스부르크에서 경험한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영화보다 영화같은 실제 이야기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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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일주일 공연은 실패했다. 배우들은 아름다왔지만, 그들은 서로 감정 이입이 잘 되지 않았다. 결국 역동감없이 무대배경과 동일시되도록 정적으로 이어지기만 했던 씬들은 그렇게 계속 카타르시스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가서, 오히려 갈증과 아쉬움만 더 해 주었다. 연출가가 결국 여배우를 바꾸겠다고 했던 날, 샤를렌과 로트하르는 연출가의 차를 빌려서 교외로 드라이브를 나갔다.

"새로운 시도였어."

농장에 잠시 차를 멈추고 들판에 음식을 차려놓고 피크닉을 즐기고 있을 때 로트하르가 말했다. 그는 이입되지 않은 자신의 연기에 대해 사람들의 혹평과는 다르게 해석하고 있었다.

"배역과도 거리를 두고, 관객과도 거리를 두고... 근데 그거 참 힘든 작업이었어."

"왜?"

"차라리 남한테 포개어지는 건 쉬운데 말야... 남의 인생을 사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는데 말야... 철저히 나 자신이어야 한다는 건, 뭔가 내 안의 감옥에 갇히는 것 같고... 끊임없이 나를 의식해야 하는 작업은 어쨌건 쉽지 않았어."

"왜 거기에 널 이입시키지 않았니?"

샤를렌이 사과를 그에게 내밀며 물었다.

"오히려 그 배역이 날 계속 대면하게 만들었어. 그건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어."

그리고 로트하르는 사과를 받아 한 입 베어먹고 샤를렌을 쳐다보았다.

"그 연극을 하면서, 네가 남을 의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자 샤를렌이 가슴이 겨우 내리앉는 심정으로 로트하르를 쳐다보았다.

"그래, 맞아. 나 역시 낙인찍힌 여자니까. 아무리 그게 추상적인 거라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잔인했다면 네가 이해할까. 자유로운 영혼으로, 아무 사심없이, 정말 순수하게 사랑했지만 그가 미성년자란 이유만으로 결국 결과는 내게도 예외없이 다가왔어. 난 패배한 여자였어. 그러다보니 이제 나야말로 남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거야. 그것이 계속 나를 따라다녀."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으로 그 십자가를 짊어지면 안 돼?"

잠시 샤를렌을 지켜보았던 로트하르가 다 먹은 사과를 땅에 묻으며 물었다.

"이 정도라도 충분하지 않아? 모두 완벽하게 채워질 순 없는 거잖아."

"충분하다기 보단 과분해. 그래서..."

"결국 마찬가지야. 넌 행복 가운데에서도 스스로 부인하고 파괴를 해야만 하는 속죄의 의무를 느끼고 있어."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로트하르가 말했다.

"널 사랑하지만... 너에게 가장 시험을 느끼고... 그래서 자꾸 헤어지는 의식을 스스로 행하게 돼."

그에게 기대며, 그가 눈 앞에 보이지 않은 것에 힘입어, 샤를렌이 고백했다.

"그래. 네 연극이 바로 그런 의도에서 나왔던 거야. 나를 만나고 나서 네 인생이 꺽여들어갔다는 건 알아. 나를 만나기 전까지 넌 젬퍼와 바이에른을 오가며 사람들의 뮤즈이자 사랑을 받았던 프리마 발레리나였지. 이렇게 된 게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지만, 나 역시 그 때문에 우리가 만난 걸 자책했고, 네게 다가오는 걸 꺼려했지. 하지만 그건 널 사랑했기 때문이었어."

그리고 그는 살짝 그녀의 이마에 내려앉은 금발 머리칼을 쓸어내고, 그녀의 뺨에 그의 뺨을 살짝 포갰다.

"그럼 나와 헤어지면 넌 옛날의 너를 회복할 수 있을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기꺼이 헤어지겠어. 먼저 너 자신을 살리는 일이 중요하니까. 하지만 그 5년동안 헤어져 있었어도 우린... 결국 그러지 못했지. 그리고 지금의 넌... 사랑의 본능보다는 오히려 죽음의 본능에 더 가까이 있는 것 같아. 우리의 인생은 이미 다른 길로 들어섰고, 우리에겐 이제 다른 숙제가 있어. 우리 함께 풀어내야 할... 너 혼자가 아니라 우리 함께 말야."

 

긴 벌판을 달려 그들이 도착한 마을은... 아니 도시는 레겐스부르크였다. 중세의 모습을 간직한 (꾸밈없는) 소박한 도시의 모습과 구비구비 이어지는 작은 길들 그리고 두 개의 높은 첨탑이 있는 대성당과 그 앞으로 세찬 물결로 흐르는 푸른 도나우 강이 바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그들은 돌아갈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도무지 뮌헨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잠시 차를 멈추고, 운하와 수풀을 따라, 길과 숲을 구분할 수 없도록 수북히 쌓여있던 울긋불긋한 잎들이 바람가는 방향을 따라 한결씩 한결씩 회오리치며 휘날리는 아름다운 가을길을 나란히 함께 걸었다.

 

 

  

 

 

그들이 성당 종루에서 마을 전체로 울려퍼지던 저녁 종소리를 듣고, 대성당 안으로 들어갔을 때 마침 성당 안에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르간 반주에 맞추어 한 소년의 목소리로 노래가 흘러들고 있었다.

"코르넬리우스의 곡이군."

직업병처럼 로트하르가 바로 곡을 알아보더니 피식 웃었다.

"여기 아이들이 헨젤과 그레텔을 부르는 음반을 듣고, 우리 학생들한테도 연습시켰더랬지."

"생각해보니, 뮌헨 오페라극장에서 크리스마스날 아이들이 공연하는 헨젤과 그레텔을 본 기억이 있었던 것 같아. 그들이 이들이었나?"

 

 

 

sandmannszene_berlincon.jpg

 

 

  

 

 

 

9년동안 지겹도록 그 속에서 살고 있다 지난 몇달간 듣지 못한 그 음성들을 여기서 듣고 감회에 젖었던 걸까. 로트하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살짝 고개를 향한 채 은근히 노래를 경청하고 있었다. 코어프레펙트였던 직업병으로 남들은 모르는 발성과 소리의 결을 저 혼자 미세하게 파악해 지적도 하고, 감탄도 하고... 근데 저 위에서 노래하는 알토 소년의 목소리는 당시 샤를렌이 처음 만났던 로트하르의 목소리와 비슷하게 들렸다... 로트하르는 알아채지 못한 것 같지만, 적어도 그녀의 가슴속 기억으론 그랬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거의 포개어졌다. 그 연상작용으로, 아까 피크닉에서 잠시 말도 나왔었으니만큼, 샤를렌은 노래를 들으며 어느 덧 로트하르가 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시절 잘나가는 발레리나였던 그 때 자신의 모습이, 그 때의 생각이, 기분이, 그 때 그 자신이고 있었던 것이 순간 느껴져서... 가슴 벅찬 기쁨을 느꼈다.

'정말 난 할 수 있을까? 그 때의 나를 찾고 더 이상 시험받지 않는 동등한 사랑을 나눌 수 있을까?'

 

 

Regensburg

 

 

도나우 강가에서 저녁을 들고 광장으로 나오니 이제 밤이 되어 있었다. 뮌헨으로 돌아가기가 어려운 시간이었기에 대성당 광장 주위로 호텔을 찾았더니, 그들이 찍은 호텔에서 그것도 첨탑이 보이는 다락방을 구할 수 있었다. 마치 그들을 위해 허락된 듯한 방을 보고 기분이 좋아져서, 그들은 그 동안 그들을 오랜 갈등으로 내몰았던 온갖 불편한 감정들을 잊을 수 있었다. 

 

지붕을 따라 비스듬히 난 측창 아래 서 있던 로트하르가 여기서 바라보는 대성당의 첨탑이 장엄하고도 뭔지모르게 두려운 느낌을 준다고 샤를렌을 불렀다. 장난이었다. 이제 그들이 함께 바라보는 창 밖으로 밤하늘을 가득 수놓은 은하수 아래 가끔 별똥별이 떨어졌다. 투명한 유리창문을 통해 비취는 고딕 첨탑이 어두운 쪽빛 하늘에 유리창 양편으로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마치 한 거대한 그림처럼, 아니 그들이 서 있는 연극무대 뒷면에 그려진 (설치된) 한 장엄한 무대배경처럼 보였다. 그 두개의 고딕 첨탑이 이루는 장엄한 무대배경 아래서 그들은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서로를 풀어헤치며 그들 사이 그 동안 멈춰져버렸던 사랑의 가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가히 늦은 시간은 아닌 것은 아닌데 떠오른 태양이 내리닿는 각도가 제법 가파르다. 문 밖 복도에서 뭔가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샤를렌은 겨우 눈을 떴다. 그러나 바로 창가의 햇빛을 정면으로 받고 이마를 찌푸리더니 그 빛을 피해 돌아눕곤 다시 눈을 감았다. 로트하르가 막 끓인 커피 두잔을 가지고, 힘겹게 방문을 열며 그녀가 누워있는 침대로 왔다. 아직도 잠에 빠져 있는 그녀를 보고, 그가 창가로 가 창문을 활짝 열고는 그녀에게 다시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의 금발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가볍게 쓸어주며 그녀의 얼굴에 바짝 고개를 대고 그 귓가에 뭐라 속삭이니, 그제서야 그녀가 한숨을 푸욱 쉬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그녀를 달래듯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커피가 담긴 컵을 내미니, 그녀가 커피의 향긋한 향을 맡곤 입가에 주름을 잡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이불을 살짝 당겨 벗은 몸을 가슴 이하로 가리우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뮌헨에 돌아와 부랴부랴 연습실로 달려왔을 때, 새로 섭외한 발레리나 출신의 20대 초반의 젊은 여배우를 마주치고, 샤를렌은 그 날 레겐스부르크에서 나눈 사랑이 정말 완벽했던 건 운명이었을 지도 모르겠다고 예감했다. 완벽한 것은 절대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완벽이란 말은 성립할 수 없을 테니까. (소설 캐논 인버스 중에서, 음악발췌는 레겐스부르거 돔스파첸 도쿠멘테 음반 중 Vol.4, 6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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