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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설거지
돼지는 한 마리도 찾아볼 수 없는 텅 빈 우리 앞에 정순을 넋을 놓고 기대어 앉아있다. 간간히 불어오는 여름 그 바람이 정순의 앞치마를 살짝 건드린다. 이젠 매일매일 공사장 인부들의 밥을 대어주는 것에 지쳐가고 있다. 점점 늘어나는 인원에 그 먹성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천두엄마.’ 조씨가 그녀를 찾아 돈사 안으로 들어온다. ‘오셨어요?’ ‘돈 받아 왔네.’ ‘예. 수고하셨어요.' 조씨는 신문지에 꼭꼭 싼 돈뭉치를 건네준다. ‘돼지 값이 그새에 또 떨어졌어.’ ‘다 팔았으면 다행이죠. 뭐.’ 정순은 외상값을 갚으려 조씨에게 돈을 건넨다. ‘아이고! 이거 받기가 미안하구만.’ ‘무슨 그런 말씀을. 여태 도와주신 게 얼마나 많은데요.’ ‘미안하네. 우리 아들 녀석 학비만 아니라도 안 받을 텐데.’ ‘어서 받으세요.’ 정순은 조씨의 손에 돈다발을 쥐어준다. ‘갈 곳은 정했는가?’ ‘여기 공사장 소장님이 많이 봐주셔서 아직 집을 헐지는 않는데요. 그것도 얼마 못가요. 이젠 떠나야죠. 어쩌겠어요?’ ‘이거야 원! 그 크던 임씨 집안이 아주 사라지네 그려. 세상이 왜 이러나?’ ‘저..... 마지막으로 부탁이 있는데요.’ ‘그래? 뭔가 말해보게나.’ ‘저 이사할 때 이삿짐 좀......’ ‘아! 내가 그 생각을 못했네. 암! 해줘야지. 그런데 삼륜차 갖고 되겠는가?’ ‘그럼요. 짐이 뭐 있겠어요? 어차피 내 집도 아닌데요.’ ‘어디로 가는가? 서울?’ ‘아뇨. 전주요.’ ‘언제 가려는가?’ ‘다시 연락드릴게요. 전주에 한번 가봐야 돼서요.’ ‘그러게.’ 조씨는 그나마도 도울 일이 생겨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안이 된다.
인부들의 점심시간, 따가운 햇볕을 피해 여기저기 그늘을 찾아 앉아 정순이 퍼주는 점심을 먹고 있다. 정순의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힌다. ‘아이고! 저 젊은 아줌마 음씩 솜씨가 보통이 아니야.’ ‘그러게 우리가 아주 임자 만났어.’ 인부들은 매번 정순의 음식을 먹을 때마다 입이 닳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이대리도 그 모습에 항상 흐뭇하다. 정순은 식사가 끝나면 항상 따뜻한 보리차까지 날라다 준다. 더운 여름이지만 속이 탈나지 말라는 그녀의 마음씨가 담겨있다. ‘아주머니! 아주 잘 먹었습니다. 진수성찬입니다.’ 인부들의 반장인 장씨가 느물느물 웃어가며 정순에게 그릇을 돌려준다. ‘예. 고맙습니다.’ ‘아이고. 이 젊은 분이 고생이 많으십니다.’ ‘아뇨. 늘 일을 해와서요.’ ‘어떻게...... 부군께서는?’ ‘예. 돌아가셨어요.’ ‘아이고. 이를 어쩌나!’ 얼굴까지 잔뜩 찌푸리며 혀를 차는 장반장의 모습이 그리 좋지 않다. ‘내가 여기 반장이니 뭐 어려운 일 있으며 말하세요.’ ‘예. 고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대리님이 많이 도와주셔서.’ ‘에이! 거 젊은 사람이 뭐 아나요? 나같이 나이 좀 먹은 홀아비나 알지.’ ‘예?’ ‘허허허허! 나중에 또 이야기 합시다. 그럼.’ 장반장은 뒷짐을 지고는 천천히 걸어가 버린다. 그리고 이대리가 장반장을 자꾸 쳐다보며 정순에게로 온다. ‘아주머니. 장반장이 뭐라고 했습니까?’ ‘아니에요. 그냥 음식 잘 드셨다고.’ ‘그래요?’ ‘그런데 무슨......’ ‘아! 예. 드릴 말씀을 잊고 있었군요.’ ‘무슨?’ ‘아주머니. 이제 곧 여기는 힘드실 텐데 제가 자리 한번 알아봐드릴까요?’ ‘예? 자리라니요?’ ‘서울 공사현장에 함바집이 필요할 텐데. 제가 자리를 넣어드릴 수 있습니다.’ ‘함바집요?’ ‘공사장 식당 말입니다. 밥집요.’ ‘어휴. 제가 어떻게......’ ‘아닙니다. 아주머니 정도면 거의 최상급입니다. 저도 공사장 여기저기 다녀봤지만 아주머니 정도의 음식은 처음입니다. 정말입니다. 아주머니.’ ‘그게 사실은......’ ‘왜요? 무슨 문제라도?’ ‘제가 하기가 좀 어렵네요.’ ‘왜요?’ ‘남지를 않아요. 지금이야 사정도 봐주시고 동네니까 해드리지만 돈이 모자라요.’ ‘예? 정말이세요?’ ‘예. 죄송해요.’ ‘아이고! 그럼 진작 말씀을 하시죠. 저는 남으시는 줄만 알고.’ ‘아니에요. 사정 봐 주신 것 만해도 감사하죠.’ ‘어쩐지...... 이런 음식을 공사판에서 먹는다는 게 힘들죠.’ 이대리는 미안한 마음에 물끄러미 서 있다가 슬쩍 자리를 떠난다.
저녁 일찍 인부들의 식사를 마치고 정순은 마당에서 잔뜩 쌓여있는 설거지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천두도 제 깐에는 도움이 된다고 엄마 옆에 앉아 그릇을 옮겨주고 있다. ‘어! 아저씨!’ 천두의 말에 정순은 깜짝 놀라 대문 쪽을 바라본다.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서있는 박상사, 박중헌이 그곳에 서있다. ‘어머! 갑자기......’ 정순을 노려보며 성큼성큼 다가오는 박중헌. 정순은 겁을 먹고 살짝 뒤로 물러선다. 천두는 그릇을 손에 쥐고 멀뚱멀뚱.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정순씨!’ ‘설거지......’ 정순은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그의 눈을 쳐다보지도 못한다. ‘설거지? 누가 이런 짓 하랬습니까?’ ‘그게... 공사장 분들이 식사하실 곳이 없어서......’ ‘뭡니까!’ 박중헌은 발 앞에 있던 커다란 광주리를 발로 걷어차 버린다. ‘어머!’ 마당에는 인부들의 밥그릇이 나뒹굴고 있다. 그리고 천두는 벌써 엄마 등 뒤로 숨어있다. ‘아저씨! 왜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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