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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이별주
한숙희와 정순은 어느새 커다란 병의 코냑을 반도 넘게 비워 버리고 있다. '사모님. 이제 그만 드세요. 저도 좀 취하네요. 좀 어지러워요.' '아이구! 술은 취하라고 마신다잖아. 괜찮아. 아! 기분 좋다!' '사모님도 참.' '정순아!' '예.' '내가 너한테 왜 이렇게 정을 주는지 아니?' '사모님 워낙 정이 많으시잖아요.' '아니야. 나 아주 못된 년이야. 그럼! 아주 못됐지.' '어휴. 무슨 그런 말씀을.' '나 사실은 죄가 있어. 죽을 죄.' '예?' 한숙희에게 잠시 슬픈 미소가 엿보인다. '우리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가 바람둥이였거든. 한량!' '예?' '내가 열두 살 때 조그만 계집애 하나를 집에 데려오셨더라고. 그리고는 나한테 그 계집애가 내 동생이라는 거야. 내 동생이래!' 한숙희는 술에 취해 몸을 흐느적거리기 시작한다. '얼마나 미운지. 그 계집애가 얼마나 미웠는지.' '그래서요? 사모님.' '그애 엄마,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 첩은 폐병으로 갑자기 죽었다고 하시잖아. 그러니 우리 엄마하고 나보러 그 애를 돌보라는 거야. 우리 엄마는 그냥 순하고 착하기만 해서 아버지 말씀대로 그 애한테 참 잘해주셨지.' 한숙희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한숨만 내쉰다. '그런데 나는 아니야. 난 그 애가 죽도록 미웠어. 생긴 건 얼마나 또 예쁘게 생겼던지. 아무리 내가 못되게 굴어도 단 한 번도 싫은 표정도 짓질 않았어. 그 나쁜 계집애!' 한숙희는 또 술 한 잔을 마신다. '집에 아무도 없을 때는 내가 일부러 밥도 주질 않았어. 굶겼어. 그런데도 나를 따르는 거야. 말도 한마디 안하고 나만 졸졸 쫓아다니는 거야. 그래서 더 미웠어.' 그리고 한숙희는 또 술을 마시려한다. 정순은 술잔을 빼앗는다. '그 애가 온지 일 년 좀 못되어서 부모님하고 오라버니는 멀리 종갓집에 상을 치르러 가셨지. 나하고 그 애 영희만 남겨 놓고 말이다. 그런데 다음날 그 애가 갑자기 열이 펄펄 끓더니 아프기 시작하는 거야.' '그래서요?' '난 모르는 체 했어. 그냥 누워있는 대로 내버려뒀지.' '어머.' '여러 날 지나고 부모님이 오셨을 때는 애가 거의 혼이 나간 거 같았어. 난 부모님한테는 밤에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다고 거짓말을 했어. 어차피 영희 그 계집애는 말을 하기도 힘든 정도였고 정신이 들어도 고자질을 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오라버니가 의사를 불러왔는데......' '그런데요?' '너무 늦었어. 급성폐렴이라는 거야.' 한숙희는 이제 눈물을 마구 흘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럼 그 동생분......' '그래. 죽어버렸어.' '어쩌면......' '그런데 그 계집애 죽기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뭐라고......' '그 계집애 눈을 한번 뜨더니 나를 찾는 거야. 그리고는 언니 언니 그러잖아.' '망할 놈의 계집애! 끝가지 나를 미워하지 않더라구.' 한숙희는 방바닥을 엎드려 엉엉 울고 있다. 그리고 정순도 눈물을 흘리며 한숙희를 껴안는다. 그렇게 두 여인은 서글피 울며 밤을 보냈다.
주강의 공장은 시제품을 이리저리 만들어보느라 하루하루가 바쁘기만 하다. 주강이 옥남의 전화를 받는다. '아! 바빠 죽겠는데 왜 또 전화야?' '여보! 동생네 우리 집으로 데려옵시다.' '아! 그것이 그렇지가 않아.' '왜요? 이층이 비어있는데.' '그것이 관사지 내 집인가? 직원들이 쓰게 돼있어.' '어휴! 당신이 사장인데 어떻게 해봐요 좀!' '에헤이! 사장이라고 다 마음대로 하는가? 바쁘니 끊어!' 주강은 전화를 탁 끊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곰곰이 생각해본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다시 전화를 건다. '어이! 배사장.' '응. 왜? 무슨 일 있어?' '저기... 우리 집, 관사 말이야.' '응. 왜?' '거 이층 내 맘대로 써도 되는 것인가?' '이런! 아니 이 사람아! 자네가 사장이야. 자네 쓰라고 회사에서 내준 집인데 무슨 걱정이야? 나 원 참!' '그래?' '그럼! 왜? 누구 데려올 사람 있어?' '응. 우리 조카네.' '아 그럼! 당장 데려와. 사람 참!' '그래도 남의 돈으로 사업하면서 내 맘대로 하면 되겠는가? 양심이 그런 것이 아니지.' '허허허허! 그래서 우리가 자네한테 사업을 맡기는 거야. 어쩼든 그 집은 자네 것이나 마찬가지야. 자네 맘대로 해.' '알았네. 고맙네. 배사장.' '나 이런!' 주강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있다. 그리고 다시 옥남에게 전화를 한다. '어이!' '왜요? 자기 마음대로 전화 끊어버리더니. 어이구!' '천두네 우리 집으로 오라고 해. 빨리 연락해!' '정말요? 정말?' '에헤이! 거 속고만 살았는가? 빨리 전화해.' '어휴! 알았어요! 알았어! 아이고! 좋아라!' 옥남은 마치 날아가기라도 할 듯 기뻐하며 정순에게 소식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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