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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빨간 경대
이사를 앞둔 정순이 밤늦도록 짐정리를 하다 지쳐 잠이 들었다. 개고 있던 옷가지를 베고 잠이 든 정순의 입술이 사르르 떨리며 움직인다.
'자네! 나 왔네!' 한여름 뙤약볕이 내리쬐는 마당에 들어선 임원장이 모자를 벗으며 땀을 닦고 있다. '어머! 원장님.' 정순은 후다닥 마루로 뛰어나왔다. 이제 제법 뛰기까지 하는 천두도 쫓아 나온다. '어이구! 우리 천두! 잘 있었냐?' 그리고 임원장은 자전거 짐칸에 묶은 커다란 보따리 짐을 풀어 내린다. '이거 받게.' 임원장은 옅은 하늘색 보자기에 싸여있는 그 짐을 마루에 올려놓는다. '이게 뭐예요?' '그거 경대! 내 하도 예뻐서 하나 샀네.' 정순은 너무 기뻐 무슨 말을 하지도 못하고 보자기를 풀어본다. '어머!' 빨간 경대, 활짝 피어오른 매화와 작은 새들이 아주 곱게 자개로 새겨져있다. 무지갯빛이 피어나며 정순의 눈을 아롱이는 예쁜 자개문양들이 여름바람에 살랑살랑 나부끼며 날아오르는 것 같다. '예쁘지 않은가?' 좋아하는 정순의 모습을 보고 임원장은 은근히 더 부추겨 보고 싶어진다. '너무 예뻐요.' 정순은 가녀리게 솟아있는 받침대에 매달린 거울을 살며시 들여다본다. '아! 내가 며칠 전 장에서 하도 예뻐서 샀는데 숨겨놓느라고 애 먹었네. 허허허허.' '저 화장도 안 하는데......' '화장은 무슨? 자네는 화장 안 해도 돼. 그냥 들여다보기만 하면 돼.' 그리고 임원장은 주머니를 뒤적인다. 그리고는 마루에서 벌떡 일어선다. '아니! 이것이 어디 갔나? 어?' '왜요? 원장님.' '아 이런! 내 자전거 타고 오면서 흘린 모양이네. 아! 이걸 어쩔 것인가?' '뭔데요? 원장님.' '내 자네 줄라고 구리무 작은 통 하나 샀는데. 어허! 참!' '어머!' '왜 그러는가?' '원장님 손에 피 나시잖아요.' '응?' 임원장의 손바닥에 피가 맺혀있다. '아! 내 자전거 타고 오다가 좀 넘어졌네. 아이고! 저 경대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다보니 다쳤구만. 허허허허.' 정순은 임원장에게 빨간약을 발라주며 입으로 불어주고 있다. 그리고 임원장은 그저 정순이 사랑스러워 그 얼굴만 빤히 바라보고 앉아있다. '야! 이 녀석아!' 갑자기 임원장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거기 앉으면 안 돼! 이 녀석아! 네 엄마 것이야.' 임원장의 고함소리에 정순은 깜짝 놀라 천두를 바라본다. 철부지 천두가 경대 위에 올라 앉아 놀고 있었다. 지난 추억을 실어 날아온 꿈.
그리고 새벽녘 잠에서 깬 정순은 그 경대를 들여다보며 아침을 맞는다.
'아이고! 여보! 여보! 와요! 왔어요!' 옥남이 대문 앞에서 펄쩍펄쩍 뛰며 소리를 질러댄다. '무엇이야! 왔어? 왔어?' 주강이 슬리퍼 바람에 뛰쳐나온다. '저기! 저기!' 아이고!' 옥남이 손을 흔들어대며 있는 방정을 다 떨고 있다. '어허허허! 왔구만!' 이기사가 모는 검은 승용차 그리고 그 뒤를 따라오는 작은 트럭이 주강의 집 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아이고! 동생!' 옥남은 허겁지겁 차문을 열며 반가워 어쩔 줄 모른다. '언니!' 정순의 품에 안겨있던 설희가 차안에서 팔짝 뛰어 내린다. '삼촌!' 설희는 얼른 주강에게 뛰어가 목에 안겨버린다. '아이고! 우리 설희! 허허허허!' '삼촌! 우리 왔어요.' 정순이 방긋 웃는다. '그래! 그래! 잘 왔네. 허허허허!' 주강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웃음을 그치지 않고 있다. '경철아! 경철아! 천두네 왔다!' 주강이 소리친다. '어머. 경철이도 있어요?' '응. 자네 보러 왔지. 이사도 도와주고 말이야. 허허허허.' '누님!' 경철이 신이 나서 나온다. '어머. 오래간만이네? 경철이.' '와! 누님 더 예뻐지셨네요.' '얘! 놀리니?' 옥남은 이기사의 팔을 꼭 붙잡고 또 싱글벙글 웃는다. '어휴! 이기사 고마워요. 좀 있다가 우리랑 같이 밥 먹고 가요. 우리가 아주 한상 준비했어. 이기사.' '예. 예. 고맙습니다.' 이기사도 덩달아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언니!' 영미가 아들 희원을 안고 집에서 나온다. '영미야!' '에헤이! 가족상봉은 좀 있다하고 빨리 짐부터 나르세!' 주강이 경철을 팔을 끌고 트럭으로 다가간다. '어? 동생.' '왜요? 언니.' '텔레비전이 없네?' '응. 별채에 강집사님 먼 친척이 오신다고 해서 주고 왔어요.' '아니. 그거 박상사가......' '에헤이! 거 또! 쓸데없는 소리!' '아! 알았어요.' 천두는 벌써 집안으로 들어가 순시라도 하듯 다 둘러보고 다닌다. 1975년 초가을, 정순은 말죽거리 주강의 집으로 이사했다. 보이지는 않지만 보일 듯한 새로운 삶을 또 찾아서.
-2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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