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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어 메탈 대책 - 해저 자원개발을 빠르게 진행해야   2009/05/17 17:26 추천 0    스크랩 0
http://blog.chosun.com/malaykorea/3946921
MB 정권의 주요 과제의 하나인 에너지 절약 기술의 개발·보급이나 재생 가능 에너지를 활용한 신산업 창출에는, 레어 메탈(희소금속)의 확보가 필수다. 레어 메탈의 대체품의 발명과 함께, 제3국의 자원개발 투자나 대륙붕의 해저 자원 개발등의 시책이 중요하다.

공급의 불안정화를 염려

가까히 사용되고 있는, 휴대 전화의 기반이나 흰색 롬 등에 사용되고 있는 레어 메탈류의 수요는, 점차, 더 사용할 뿐이다. 게다가 개발이 급하게 된 대체 에너지를 이용한 태양열 발전, 풍력 발전을 시작해서 차세대 자동차등의 기술에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레어 메탈류이다. MB정권의 한국판 그린·뉴딜을 진행시키는데도, 이러한 광물자원의 확보를 빠뜨릴 수 없다.

그런데 , 우리 나라는 그 안정공급을 하기에는 환경이 열악하다. 예를 들면, 자동차의 배기가스 정화용 촉매에 이용되는 플라티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국내 수요량 많은 부분을 수입 해야 하고. 액정 디스플레이의 유리 정밀 연마에 사용하는 세륨, 형광체에 사용하는 테르비움과 유로피움등의 금속은 중국으로부터의 수입 의존율이 높아 수년내에 대폭적인 공급 부족이 예상되고 있다.

또 영구자석, 센서등의 세라믹 제품, 2차 전지등의 재료로서 폭넓게 사용되는 랜턴, 네오디뮴등의 희토류의 원소는 거의 100%를 중국으로부터 수입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은 자원 내셔널리즘의 경향을 강하게 하고 있어 공급의 불안정화가 염려되고 있다.

이에 대해 정부는, 아프리카 외교를 진행시켜 레어 메탈의 매장량을 조사하는 탐사 기술을 여러나라에 제공하여, 그것을 담보로 해서 장래의 권익 확보를 목표로 해야 한다. 그와 더불어 레어 메탈의 대체품 개발이나, 사용량의 삭감을 향한 기술개발 사업도 해 가야 한다.

그런 것들을 강화하는 것과 동시에, 향후의 에너지 전략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해저 자원을 발굴해서, 레어 메탈을 안정공급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나라의 배타적 경제 수역(EEZ)의 해저에 존재하는 열수 광상에 포함되는 레어 메탈의 탐사, 특히 동해의 대륙붕의 지형·지질 조사를 강하게 진행해야 한다.

우리 나라는 1970년대, 이후의 기술을 예상해서, 반도체 부문에 집중해서 투자를 하여, 신산업으로서 기르는 것에 성공했다. 정부의 산업 정책의 중요성에 대해 재차 강조하고 싶다. 미국의 오바마 정권은 신산업 창출을 위해서 대체 에너지 개발에 본격적으로 임할 자세를 보이고 있어 우리 나라도 뒤져서는 안 된다.

한편, 향후, 재생 가능 에너지와 함께, CO2 배출량 삭감이 필요한 에너지 대책으로서는 원자력의 이용이 필수다. 지금, 우리 나라는 원자력 발전이 세계 톱 클래스의 기술개발로 에너지 문제를 극복하여 현재, 환경 문제 대책으로서 CO2 배출량이 적은 원자력 발전에 의지하고 있다.

차세대 원자력 발전의 연구도

향후, 경수로에 의한 원자력 에너지의 이용은, 석유와 동일한 정도의 양 밖에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한다. 경수로에 의한 원자력 발전 발전이 계속되는 것은 틀림없지만, 차세대 원자력 발전의 연구도 아울러 중요하다.

# 참고 : 레어메탈의 개요

레어메탈은 휴대전화나 액정TV 등의 전자부품 재료용, 자석이나 배기가스 촉매 등의 자동차부품 재료용을 중심으로 수요가 고조되고 있으며 가격변동이 큰 편임.

미래의 첨단산업에 있어서는 하이브리드차용 자석, FPD용 투명전극, 초경공구, 자동차용 배기가스 촉매, PET수지용 촉매 등의 재료로서 필수불가결한 존재임.

일부는 국내에서도 산출되었으나 가채량 감소와 비용 상승으로 인해 국내 광산은 폐산하여 현재는 자원의 대부분을 중국이나 남아공 등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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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타이푸삼 축제   2009/05/17 17:24 추천 0    스크랩 0
http://blog.chosun.com/malaykorea/3946920
그들은 엽기적이다, 아니다 숭고하다…말레이시아 타이푸삼 축제
 
 가느다란 쇠꼬챙이를 뺨에 관통시키고 날카로운 갈고리로는 가슴을 피어싱, 1년간 저지른 죄를 신께 사죄하려, 수백개의 가파른 계단을 오른다
 
 다민족ㆍ다종교 국가인 말레이시아는 매년 이즈음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다. 1월 말부터 2월 초순까지 전국적인 규모로 열리는 힌두교 축제 `타이푸삼` 때문이다.
 
 타이푸삼 축제는 힌두교 신화에서 유래됐다. 신화에 따르면 여신 스리 마하마리암만에게는 똑똑하지만 게으른 장남 카나바다와 순수하고 우직한 차남 무루간이 있었다. 스리 마하마리암만은 두 아들에게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해 그 주위를 세 바퀴 돌고 오는 사람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선언했다.
 
 무루간이 고행을 하며 지구를 세 바퀴 돌고 있을 때 카나바다는 집에서 편히 쉬는 것을 본 스리 마하마리암만이 그를 꾸짖자 그는 재빨리 어머니 곁을 세 바퀴 돌면서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어머니라고 말했다. 감동한 스리 마하마리암만은 장남에게 권력을 물려줬고, 고행을 마치고 돌아온 무루간은 상심한 끝에 바투동굴에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뒤늦게 스리 마하마리암만은 달콤한 말에 현혹돼 경솔한 행동을 한 자신을 반성하고 무루간을 만나기 위해 바투동굴을 찾았으나 무루간은 1년에 한 번씩만 만나 주었다. 그날이 바로 `타이푸삼`이다.
 
 무루간 신을 숭배하는 다양한 의식이 진행되는 타이푸삼은 올해 2월 8일부터 시작되며 이를 보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취재진과 여행자들이 몰려든다.
 
 사흘에 걸쳐 진행되는 타이푸삼은 우선 첫째날 사원과 신상(神像)을 꽃으로 꾸미는 것으로 시작한다.
 
 둘째날에는 각 지역 사원까지 꽃과 신상으로 장식한 마차를 끌고 신자들이 그 뒤를 따르는 행렬이 이어진다. 수도 쿠알라룸푸르 외곽에 위치한 신화 속 힌두교 성지 바투동굴을 향하는 행렬은 보통 15㎞를 넘는다. 무루간 신의 초상을 실은 5t에 달하는, 은으로 제작된 수레를 따르는 신도는 수만 명. 관광객들과 축제 참가자들까지 합하면 행렬의 장대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하이라이트는 셋째날이다. 이날은 바투동굴 근처로 힌두교 신도들과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수백 명에 이르는 지원자들이 고행을 몸소 실행하는 예식이 거행된다.
 
 길게는 1m에 이르는 가느다란 쇠꼬챙이를 혀, 뺨 등에 찔러 관통시키는가 하면 날카로운 갈고리로 등과 가슴에 피어싱을 한다. 아무도 피를 흘리거나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그 비밀은 공식적으로 밝혀진 바 없다. 힌두교도들은 이것을 신의 가호라고 믿는다.
 
 자처해서 고행에 나선 신도들은 `카바디`라 불리는 화려한 장식의 등짐을 진 채 바투동굴에 이르는 까마득한 높이의 계단을 오르고, 이 순간 축제는 절정에 이른다.
 
 272개의 가파른 계단을 하나씩 밟고 올라 마지막 계단에 이르면 그동안의 수고를 보상하고도 남을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마천루를 하나 세워도 될 만한 100m가 넘는 높이의 바투동굴 내부는 전체가 힌두교 사원으로 꾸며져 있고 화산 분화구처럼 하늘로 향한 구멍이 뚫린 자리에 제단이 자리 잡고 있다. 수많은 신도들이 꼬챙이를 양 볼에 찌르거나 무거운 카바디를 진 채 등 뒤로는 낚싯바늘을 찔러 오렌지를 주렁주렁 매달고 가는 모습은 엽기적이면서도 장엄하기 그지없다.
 
 카바디는 삶이 주어진 짐을 의미하며 계단을 오르는 동안 고통을 이겨냄으로써 참회와 속죄라는 타이푸삼 축제의 의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의식이다.
 
 군중은 이때 힌두교의 요체이자 신성한 본질을 의미하는 타밀어인 `벨(Vel)`을 외치는데, 그 외침 속에서 고행자들은 점점 황홀경에 빠져든다고 한다.
 
 동시에 군중은 코코넛 열매를 깨뜨리는데 코코넛 열매는 사람의 머리를 의미하며 내재된 참 자아를 발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타이푸삼 축제는 힌두교인에게는 육체의 고통을 이겨냄으로써 1년 동안 지었던 죄를 신 앞에서 사죄하고 축복을 비는 신성한 고해성사이자 이방인에게는 독특한 힌두교 문화를 가까운 곳에서 경험할 수 있는 기회로 주목받고 있다.
 
 문의 말레이시아 관광청 홈페이지(www.mtpb.co.kr), (02)779-4422
 
 출처: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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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기본교리   2009/05/17 17:23 추천 0    스크랩 0
http://blog.chosun.com/malaykorea/3946919

이슬람 기본교리

1. 이슬람이란 어떤 종교인가
2. 이슬람의 개요(Islam at a glance)  
3. 이슬람의 교리-5주(五柱)
4. 6신(六信) : Iman
5. 이슬람의 도덕 체제(Moral System of Islam)
6. 이슬람에서 하나님의 개념(Concept Of God In Islam)
7. 이슬람에서 예언자의 지위(Prophethood In Islam)
8. 사후(死後) 의 삶(Life After Death)
9. 이슬람에서 인간의 권리(Human Rights In Islam)

1. 이슬람이란 어떤 종교인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이슬람은 유일신-우리말로는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의 뜻에 완전히 순종, 복종하는 종교이다.

‘알라’란 특정한 신의 이름이 아니라 영어로는 the God 에 해당되는, 즉 유일한 신 이라는 뜻이며 ‘이슬람’(어원적 의미로 순종 또는 평화)이란 바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뜻을 따름으로써 평화를 얻는 길을 의미한다.

이슬람에서 신격은 하나뿐이며, 그 어떠한 인격도 신격화되거나 신성을 가질 수 없는 철저한 유일신 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꾸란(일명 코란)은 구약 신약 등과 함께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받은 성서이고, 무함마드(saw)는 모세, 예수 등 많은 예언자들과 함께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은 사도이며 동시에 마지막 사도이다.

무슬림(이슬람교도)은 이 선지자들 모두를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존중하고 존경하며 따르지만 그 누구도 신격을 갖춘 대상으로 따르는 것은 아니다. 이슬람에서 신격은 하나님 한 분 뿐이다.

무슬림의 신앙은 ‘하나님외에는 신이 없고, 무함마드는 하나님의 사도이다’ 라는 신앙 고백(샤하다;shahada)으로서 시작된다.

이슬람의 기본 교리는 여섯가지 믿음과 다섯가지 실천이라 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상이 가장 기본적인 이슬람에 대한 소개이다.


2. 이슬람의 개요(Islam at a glance)

1)이슬람(ISLAM)과 무슬림(MUSLIM)

이슬람(Islam)은 아랍어로 평화, 복종 그리고 순종을 의미한다. 이슬람은 하나님께서 선자자 무함마드(그 분께 하나님의 평화가)께 계시하신 하나님의 가르침과 인도를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무슬림(Muslim)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계시하신 가르침과 예언자의 말씀에 따라 자신의 삶을 완전히 개조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이다. 무슬림은 또한 같은 기본원리에 의해 인간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마호메트교 (Muhammadanism) ”는 이슬람에 대한 잘못된 표기이고 이슬람의 진정한 참뜻에 어긋난다.

‘알라 (Allah) ’는 아랍어로 하나님의 올바른 표기이다.

그것은 복수의 형태, 또는 여성형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특별한 용어이다.

2)계시의 연속성

이슬람은 새로운 종교가 아니다. 본질적으로 이슬람은 하나님이 모든 예언자들에게 계시하셨던 동일한 말씀과 인도이다:

말하라: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우리에게 계시된 것과 아브라함, 이스마일; 이삭, 야곱 그리고 그들의 자손들에게 계시되었던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하나님으로부터 모세, 예수, 그리고 예언자들에게 내려졌던 성서들을 믿습니다. 우리는 예언자들을 차별하지 아니하며,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께만 경배를 드리나이다. ” (성 꾸란 3장 84절)

예언자 무함마드(그 분께 하나님의 평화가)에게 계시된 말씀은 포괄적이고 완전하며 최종적인 형태의 이슬람인 것이다.

3)이슬람의 다섯 기둥

① 신앙 선언(Shahada): 하나님을 제외하고 숭배할 것이 없으며, 무함마드는 심판의 날까지 모든 인류에게 보내진 메시지를 입증하기 위한 최후의 사도 이다. 그의 예언자적 지위는 무슬림들이 그의 모범적인 삶을 본보기로 따르도록 하는데 있다.

② 예배 (Salat): 매일 하나님께 드리는 다섯 차례의 예배가 의무로서 행해진다.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강건하게 하고 활기를 북돋아주며 인간에게 보다 높은 품성을 가지도록 유도한다. 예배는 마음을 정화시키고 악행과 사악한 것에 대한 유혹으로 부터 지켜준다.

③ 단식 (Saum): 라마단 달(이슬람력 9월) 동안 무슬림들은 새벽부터 일몰까지 음식, 음료 그리고 성행위 뿐만 아니라 사악한 의도들과 욕구들을 삼가 한다. 그것은 사랑, 진실 그리고 헌신을 가르친다. 그것은 건전한 사회적 양심, 인내, 욕심 없는 마음과 정신력을 발전시킨다.

④ 자카트 (Zakat) : 공동체에서 가난한 이웃을 위하여 종교적인 의무와 속죄의 의미로 한 해 동안의 순수 저축액의 2.5퍼센트를 매년 지불하는 것이다.

⑤ 순례 (Hajj): 성지 메카를 순례하는 것으로서 경제적, 육체적으로 감당할 수 있다면 일생에 한 번은 수행하여야 한다.

이러한 기둥들 이외에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의지를 이행하는 것으로서 이 또한 숭배의 행위로 인식되며 이를 행하는 것이다.

이슬람은 하나님의 유일성과 위대함에 대한 믿음이 요구되며, 인간으로 하여금 우주의 의미와 그곳에서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게 해준다. 이러한 믿음은 인간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인식하게 함으로써 모든 두려움과 미신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여준다. 믿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이 행동으로 표현되고 시험을 그쳐야 하는데 이 믿음의 표현이 “이슬람의 다섯 기둥들 ” 이다.

유일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우리가 인류와 모든 사물의 창조자이시고 부양자이신 하나님의 전능하심 아래에서 따르도록 요구한다. 이슬람은 선민사상을 거부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선행이 천국에 이르는 유일한 길로 여긴다. 따라서 어떠한 중재자도 없이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가 성립된다.

4) 인간 : 자주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

인간은 하나님의 최고 창조물이며 가장 높은 가능성들을 갖고 있으며 자신의 의지, 행동 그리고 선택에 있어 비교적 자유로운 상태에 있다. 하나님은 바른 길을 인도하시고 선지자 무함마드(그 분께 하나님의 평화가)의 삶은 완벽한 모범을 보여준다. 인간의 성공과 구원은 두 가지 모두를 따르는데 있다. 이슬람은 인종, 성별 또는 피부색의 차별 없이 인간의 인격이 동일하며 존엄함을 가르치고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한 권리를 부여한다.

성 꾸란에 언급되고 예언자 무함마드의 삶에서 예증된 하나님의 계율은 모든 경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

그것은 높은 신분의 사람들과 미천한 사람들, 왕자들과 농부들, 지배자들과 지배 받는 자들에게 평등하게 적용된다.

5) 성 꾸란(Quran)과 하디스(Hadith):

성 꾸란은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계시하신 말씀이고 이슬람의 가르침과 율법의 기본적인 원천이다. 꾸란은 모든 면에 있어서 신념, 도덕성, 인류의 역사, 예배, 지식, 지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그리고 이에 대한 근본 원리를 다루고 있다. 광범위한 가르침 위에서 사회 정의, 경제, 정치, 법률제정, 법체계, 그리고 건전한 국제 관계의 체제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은 성 꾸란의 중요한 내용이다.

무함마드(그 분께 하나님의 평화가) 자신은 읽거나 기록할 수 없었던 문맹인 이었다. 그러나 성 꾸란은 그의 생존기간 동안 그의 관리 아래 추종자들에 의하여 암기되고 기록되어졌다. 원형 그대로인 완전한 성 꾸란의 구절은 그것이 계시되었던 언어인 아랍어로 모든 사람들에게 통용될 수 있다. 그 뜻은 많은 언어들로 해설된 해설서가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예언자 무함마드(그 분께 하나님의 평화가)의 가르침, 말씀 그리고 행동을 기록한 하디스(HADITH)는 그의 절친한 교우들에 의하여 매우 신중하게 기록되었고 수집되었으며 성 꾸란의 절들을 해설하고 상세히 설명한다.

6) 숭배의 개념:

이슬람은 단순한 의식주의를 가르치거나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이슬람은 의도와 행동을 강조한다.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삶의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행동하고 선을 요구하며 악행과 박해를 금하며 자선과 정의를 실행하고 인류에게 봉사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성 꾸란은 이러한 개념을 다음과 같이 숭고하게 제시하고 있다

너희들이 얼굴을 동과 서로 돌리는 것만이 올바른 신앙은 아니니라; 그러나 하나님과 최후의 심판일, 천사들, 성서들 그리고 선지자들을 믿고; 하나님을 위한 사랑으로 너희들의 친척, 고아들, 가난한 사람들, 여행자들,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 그리고 노예들의 몸값을 위하여 너희들의 재산을 사용하며; 꾸준히 예배를 드리고, 정기적으로 자선을 행하며 그리고 너희가 맺은 계약들을 이행하고; 고통과 역경 그리고 공포의 모든 시기를 통하여 변치 않고 인내하는 것은 옳은 일이니라. 그와 같은 사람들은 진실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니라.(성 꾸란 2장 177절)

7) 이슬람에서 삶의 방식

이슬람은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따를 수 있는 명확한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이슬람의 가르침은 포괄적이고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도덕적 그리고 정신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성 꾸란은 인류에게 지구상에서 자신과 일가 친척, 공동체, 나아가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의무를 가르치며 창조주에 대한 자신의 생활과 의무를 상기 시켜 준다.

인간은 목적이 있는 삶에 대한 기본적인 지침들을 부여 받고, 이러한 높은 이상을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삶 속에서 도전이 주어져 있다. 이슬람에서 인간의 삶은 전체적으로 통합된 단일체이며 단편화 된 경쟁하는 부분들의 모임이 아니다 그러므로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은 인간의 삶에서 분리된 부분이 될 수 없고 결합되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8) 역사적인 시각

무함마드(그 분께 하나님의 평화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도시인 메카(Makkah)의 고귀한 가문에서 서기 570년에 태어났다. 그는 40세에 최초로 계시를 받았으며, 그가 이슬람을 전도하기 시작하자 그의 추종자들은 박해를 받았고 모진 고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아라비아의 또 다른 도시인 메디나(Madinah)로 이주하도록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 그는 23년의 짧은 기간동안 예언자적 지위인 그의 사명을 완수하고 63세에 서거하였다. 그는 완벽한 삶을 영위하였고 그의 삶은 성 꾸란의 가르침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이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을 위한 모범이 될 수 있었다.

9) 이슬람의 이성적인 접근

진실을 표현하는 명확하고 솔직한 방법을 갖고 있는 이슬람은 지식을 추구하는 누구에게도 이성적으로 전달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삶의 모든 문제를 위한 해결책이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모든 면을 찬미함으로써 보다 좋고 완성된 삶을 향한 안내자이기 때문이다.

10) 이슬람 - 현대사회의 병폐에 대한 해결책

인류의 형제애 : 선진국들은 인간을 달에 보낼 수 있지만 인간이 같은 인간을 미워하고 싸우는 것을 중단시킬 수 없다. 지난 1,400년에 걸쳐 이슬람은 어떻게 인종적 편견이 종말을 고할 수 있는지 실제로 보여 주었다.

또한, 진정한 형제애의 이슬람적 기적은 매년 성지 순례(Hajj)를 통하여 모든 인종들과 국가들이 차별과 편견을 버리고 하나된 모습으로 순례에 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족: 문명의 기본적인 단위인 가족이 모든 서구 사회에서 붕괴되고 있다. 이슬람의 가족 체제는 남편, 아내, 자녀 그리고 친척의 권한에 대하여 훌륭한 평형상태를 유지하도록 가르친다. 이슬람은 잘 구성된 가족 체제 안에서 인간의 애타심, 관대함 그리고 사랑을 권장한다.

11) 조화로운 인생관

인간들은 그들의 인생관에 따라 산다. 세속적인 사회의 비극은 삶의 다른 면을 연결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세속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 과학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은 대립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슬람은 이러한 갈등을 끝내고 삶에 대한 인간의 통찰력에 조화를 이루게 한다.


3. 이슬람의 교리-5주(五柱)

1) 신앙의 고백(Shahadah)

"Asshuhadu an la ilaha ill-Allah, wa asshuhadu anna Muhammadan-Rasulullah"
나는 하나님 외에 신이 없음을 증언합니다,
또한 나는 무함마드가 하나님의 사도임을 증언합니다

이 두 구절은 이슬람의 가장 중요한 교리이자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구절의 내용을 부정하고는 이슬람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 첫 구절은 알라(하나님)의 유일성을 강조하는 말이고 두 번째 구절은 무함마드가 사도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무슬림들은 예배드릴 때 뿐 아니라 하루에도 몇 차례씩 습관적으로 이 구절의 암송을 반복한다. 또한 비무슬림이 이슬람교에 입교하고자 할 때는 누구나 이 구절을 선서함으로써 무슬림이 될 수 있다.

2) 예배 (Salah)

어느 종교나 신에 대한 일정한 숭배의식이 존재한다. 무슬림들은 매일 5번씩 정해진 시간에 - 일출 전 새벽, 정오, 오후, 일몰 후, 밤 - 메카를 향해 예배를 드린다. 하루 다섯 차례의 예배가 이슬람이 생활 속의 종교로 자리잡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정확한 예배 시간을 맞추려는 노력과 메카를 향한 예배 방향을 맞추려는 노력이 이슬람의 천문학과 기하학을 발달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예배를 드리기 전에 항상 '우두'라고 불리는 세정(洗淨)을 행하는데 이는 신체의 청결 뿐 아니라, 마음의 청결도 포함한다. 무슬림들은 어디서나 예배드릴 수 있으나, 남자들은 보통 집단으로 모스크에서 행하도록 권장하고 있으며, 여성은 보통 가정에서 한다. 매주 금요일에는 모스크에서 합동예배를 드린다.

3) 단식 (Sawm)

무슬림은 이슬람력 9월(라마단) 한 달간 일출부터 일몰까지의 낮 시간 동안 단식을 해야한다. 이슬람에서의 단식은 단지 먹고 마시기 뿐 아니라 흡연, 거친 말과 행동을 삼가며 심지어는 성행위까지 자제한다.

타종교에서의 금식은 일정 기간 동안 물만 먹고 위를 완전히 비워 신체적·물질적 활동을 중지시킴으로써 종교적·정신적 성취감을 증대시킨다는 다분히 개인적인 목적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에서의 단식은 먹는 일과 굶는 일을 반복함으로써 한달 동안 매일 비슷한 시간에 배고픔의 고통을 반복해서 느낀다. 즉, 이 배고픔의 고통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가난한 자의 고통을 알게 해주고 나아가서 여유 있는 사람들이 부족한 사람들을 돕도록 유도하는 사회적인 목적을 갖고 있다. 따라서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지며, 단식 행위를 공유함으로써 무슬림 공동체의 결속을 꾀하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다. 라마단 기간에 병에 걸렸거나 장거리 여행중인 무슬림은 단식의 전부 또는 일부를 적당한 시간이 될 때까지 연기할 수 있다. 노약자, 임산부, 수유 중인 어머니, 월경 중인 여성,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병사들, 만성적인 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무슬림은 면제된다. 단식이 끝난 다음날인 이슬람력 10월1일은 파제절(罷祭節, Eid al-Fitr)이라고 불리는 이슬람의 2대 축제 중의 하나가 거행된다.

4) 희사 (Zakah)

기독교의 십일조와 마찬가지로 이슬람에서는 1/40을 희사로 바친다. 그러나 십일조와 이슬람의 희사제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기독교의 십일조와 달리 이슬람의 희사제도는 자기 수입의 1/40이 아니라 자기 순수입의 1/40을 희사한다는 점이 다르다. 이슬람에서는 꼭 물질적인 희사 뿐 아니라, 정신적인 구호 행위도 희사로 간주한다. 예컨데, 다른 사람을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거나, 언제나 밝은 웃음으로 인사함으로써 공동체에 유익한 행위를 한다거나, 몸이 불편한 장애자들을 돕는 행위 등도 희사에 들어간다. 따라서 수입이 없거나 오히려 부족한 사람들은 물질적 희사보다는 정신적 희사로 대신함으로써 상대적인 박탈감이나 열등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꾸란에는 이렇게 모금된 희사금을 어디에 사용해야 하는지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 재난을 당한 사람들, 여행자들, 이슬람 선교에 종사하는 사람들, 이슬람을 공부하는 유학생들 등이 이에 해당된다.

5) 성지순례 (Hajj)

다섯 번째 의무는 성지순례(hajj)로서 이슬람력 12월의 메카 순례를 말한다. 모든 성인 무슬림은 신체적 건강과 경제적 여유가 있는 자에 한해 적어도 일생에 한번은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를 순례해야만 한다. 순례자는 바느질하지 않은 천 2장으로 몸을 감싸고 순례한다. 메카의 카바 성전 주위를 돌고, 그 벽 한 모퉁이에 있는 검은 돌에 입을 맞추고, 사파(Safa)와 마르와(Marwa) 언덕을 돌고, 악마를 나타내는 미나(Mina) 근처에 돌을 던지고, 그곳에서 양을 희생으로 바치며, 아라파트(Arafat) 평원에 모이는 등의 일정한 의식이 정해져 있다.

예를 들면, 사파와 마르와 사이를 일곱 번 도는 것은 이스마일의 어머니 하갈이 메카로 이주한 후, 미친 듯이 물을 찾아다닌 것을 기리기 위한 것이며, 양을 바치는 것은 아브라함이 신의 명령에 따라 이스마일(무슬림은 이삭이 아니었다고 믿는다)을 희생으로 바치려 했던 사실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이 양을 희생으로 바치는 풍습이 이슬람의 2대 축제 가운데 하나인 희생제(Eid al-Adha)를 탄생시켰다. 역사를 통해 순례의식은 무슬림을 단결하게 하였고, 그들 사이의 인종적, 언어적, 그리고 정치적 장벽을 허무는데 기여했다.


4. 6신(六信) : Iman

1) 하나님 (알라, Allah)

신은 전지전능하며, 과거의 것, 그리고 지금의 것, 그리고 미래에 올 것을 모두 만드신 창조자이며, 선과 악을 구분하는 정의로운 심판자이며, 예언자와 성전을 통해 인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자비로운 안내자이다. 신에게는 필적할 아무런 상대도, 협력자도, 자손도 없으며, 그의 권능을 막을 어떤 인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하신 하나님(Allah)에 대한 믿음

유일하신 하나님(Allah)에 대한 믿음일러 가로되, 하나님은 오직 한분 이시고 영원하시며 성부와 성자를 두지 않으셨으며, 그분에 비유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느니라 /꾸란112장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수호하시니, 하늘과 땅의 열쇠들이 그 분의 것이로다 /꾸란 39장62,63절

꾸란에서 위와 같이 언급하고 있듯이 세상 모든 삼라만상의 존재와 소멸은 바로 그 분, 하나뿐인 신으로부터 시작되며 결정지어지고 또한 그 모든 것을 거두는 것도 그분이다. 또한 이 모든 권능은 오직 한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이를 대신할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음을 "라 일라하 일랄라 /La Ilaha Illallah : 그분외에는 신이 없다"이 구절을 통해 사도 무함마드(그분에게 평화가) 또한 모든 이에게 그 사실을 기억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이는 신앙인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으로 이슬람 사상의 바탕이며 기둥이다. 그러므로 이슬람에서는 '유일신', 그 존재를 의심하거나 비하 혹은 인격화시키는 것을 용서받을수 없는 가장 큰 죄로 간주한다.

2) 천사들

무슬림들은 신의 창조물들 중 모두가 인간에게 보이거나 들리거나 느껴지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예를 들어 "진(Jinn)"이라고 불리는 영마(靈魔)는 지상에서 많은 선과 악을 행하며 이는 꾸란에 나타나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나 보다 강력히 신의 계획을 따르는 피조물은 신의 심부름꾼에 해당하는 천사들이다. 천사는 남녀의 구별이 없으며 인간보다도 낮게 창조되었다. 신은 꾸란을 직접 무함마드에게 계시한 것이 아니다. 천사인 가브리엘을 통해 꾸란을 내려보냈다. 이 천사의 개념은 유대교나 기독교의 개념과 거의 동일하다. 대천사 가브리엘이나 미카엘이 있고 최후의 심판일을 알리기 위해 나팔을 부는 이스라필 천사도 있다. 아랍어로 이브리스(Iblis) 또는 알 샤이탄(al-Shaytan)이라 불리는 악마는 원래 천사였으나, 아담을 경배하라는 신의 계율을 조롱함으로써 신의 은총에서 버림받아 인류를 타락시키려고 시도하고 있다.

하나님(Allah)의 천사(Al malaika)에 대한 믿음

천사(Al malaika)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로서 인간의 능력이나 어떠한 특별한 과학적 지식 또는 특별한 육감으로는 그 존재 유무에 대해 증거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 존재를 부정하는 것 또한 큰 죄임을 꾸란에서는 밝히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주지해야 할 것은 '천사'는 하나님께서 창조한 피조물로서 그 존재를 믿어야 하지만 그것이 경배의 대상이나 구원의 주체는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인간과는 달리 천사에게는 선택을 위한 자유의지가 부여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에게서는 물질이나 육체적 욕망으로 인한 범죄의 속성을 찾아볼 수 없으며 그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뿐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에 의해 창조되어진 피조물로서 다음과 같이 구분되어 진다.

가브리엘(Jabril) 모든 천사들을 관장/ 사도와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한다.
이스라필(Israfil) 최후의 심판 때 나팔을 두 번 불게 되는데 첫번째 나팔을 울려 지상의 모든 생명체를 죽음에 이르게 하며 두 번째 나팔은 최후의 심판을 위해 죽었던 모든 생명체를 부활케 한다
메카일(Mackerel) 창조되어진 모든 세상과 자연의 섭리를 관리한다
이즈라일(Azrail) 인간의 영혼을 거두는 역할을 한다
자비니스(Zabanis) 지옥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
리드완(Ridwan) 천국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
문카 , 니키르 ,
무바쉬르 , 바쉬르 최후의 심판 날까지 인간이 지은 죄만큼 그들을 단죄하는 역할을 한다.
아티드 , 라킵  (인간에겐 수많은 천사들이 항상 동행하지만 그 중에 특별히) 인간에게서 비롯되는 모든 선과 악을 기록하는 역할을 한다

3) 성서들

무슬림들은 신이 인간들 중에 정의로운 한사람을 예언자로 선정해 그의 입을 통해 복음을 전하도록 했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복음들이 성서가 되었다. 인간이 타락하고 잘못된 길로 들어설 때마다 신은 예언자들을 통해 복음을 내렸다. 언제 어떤 민족들에게 어떤 예언자들을 통해 어떤 복음들이 내렸는지 우리는 다 알 수 없다. 그러나 일부는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다윗에 의해 전해진 시편, 모세가 유대인들에게 전한 토라(Torah, 구약), 예수가 기독교인들에게 전한 인질(Inzil, 신약),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함마드가 무슬림에게 전한 꾸란이 그것이다. 하지만 무함마드 이전에 계시된 성서들은 번역과정을 통해서 내용이 변질되었거나 위정자들이 정치적·경제적 목적으로 일부 내용에 수정을 가했기 때문에 그것들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이다. 실제로 무슬림들은 유대인 자신들이 신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고 묘사하기 위해서 구약(Torah)의 몇 구절을 바꾸었거나, 또는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신이라고 증명하기 위해 복음서를 다시 쓴 것은 아닌지 묻고 있다. 오직 꾸란만이 계시된 이후부터 한 점 한획 의 변질없이 그대로 우리에게 전해진 완벽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꾸란은 계시된 장소에 따라 메카에서 계시 된 장과 메디나에서 계시 된 장으로 나뉜다. 뒷부분의 짧은 장들이 주로 메카에서 계시된 장들로서 길이가 짧은 대신 상징적·은유적인 표현이 많아 이해하기 어려우며 신의 전능과 다가오는 심판의 날에 대한 경고를 강조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반면에 앞 부분의 긴 장들은 메디나에서 계시된 장들로서 실생활의 구체적인 규범들로 가득 차있다. 꾸란은 아랍어로 계시되어졌지만 그것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내용의 오역이나 변질을 방지하기 위해 엄격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렇게 번역된 것은 단지 '주해서' 혹은 '해설서'로 간주될 뿐이다.

꾸란은 수많은 아랍 민족들을 시·공을 초월해 하나로 묶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즉, 꾸란의 언어는 북 아프리카 서쪽 끝에서부터 아라비아 남부의 예멘에 이르기까지 아랍어를 사용하는 20여 개국의 표준어일 뿐 아니라, 1400여 년 동안 변함없이 꾸준하게 읽혀져 내려왔기 때문에 계시 당시의 아랍인이나 현대의 아랍인들이 별 어려움 없이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하나님의 성서(Al Khutub)에 대한 믿음

내가 너희에게 복음을 내려 보낼 것이니 나의 복음을 따르는 자 두려움도 그리고 슬픔도 없을 것이며, 방황하지도 불평하지도 않을 것이라 /꾸란 2장38절, 20장123절

하나님으로 부터 지상에 내려진 계시(성서)는 총 10.000편의 수흐프와 4권의 책(Khutub)이 있었으나 현재 대부분은 안타깝게도 거의 대부분은 유실되었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성서의 대부분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 받은 원서라 할 수 없으며 그에 대한 일종의 번역서 혹은 개정서 라 밖에 할 수 없다.

그 예로써 아브라함에게 계시된 수흐프는 현재 지구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모세 5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도 그 원본은 없는 수정 보완서 일 뿐이다.

또한 사도 예수에게 계시된 신약(Injil)은 새로운 것에 대한 계시가 아니며 이는 이전의 사도들에게 내려 졌으나 분실 또는 손상되어진 구약 서를 다시 회복코자 계시되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역사의 흐름을 거쳐 많은 부분이 또다시 수정 왜곡됨으로 인해 현존의 성서는 그 정통성을 상실했다.

이에 하나님께서 이러한 성서의 정통성과 그 의미를 위와 같은 성서들과는 달리 변질 없이 그 정통성 지키고자 내리신 것이 인간 세계의 마지막 성서인 꾸란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성서를 내려주시고 이것이 변질되지않게지켜주실 것을 약속하고 계심을 꾸란을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다.(꾸란85장22절)

이와 같은 이유로 해서 1천4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꾸란 낭송시 원문 그대로의 원어로 읽기를 권장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이며 하나님의 약속대로, 계시받은 꾸란의 원본은 일 점 일 획의 변환 없이 그 정통성을 유지하며 보존되고 있다

이같은 성서들이 변질되었건 변질되지 않았건 간에 최초에는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성서들임을 믿는 것이 무슬림의 세번째 믿음이다.

4 ) 사도들

사도(使徒), 예언자 혹은 선지자라 함은 신의 복음을 인간들에게 전하기 위해 신에 의해 선택된 인간을 말한다. 이슬람은 무함마드가 마지막 예언자임을 강조하지만, 구약, 신약, 꾸란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 즉 아담, 노아, 아브라함, 요나, 욥, 등을 인정한다. 무슬림들은 유대인들이나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을 이단으로 규정함에도 불구하고 모세나 예수 역시 예언자로 간주해 존경과 찬미를 보낸다. 꾸란은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것을 인정하지만,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거나 또는 예수가 신의 아들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부정한다. 또한 심판의 날까지 더 이상의 예언자는 오지 않는다.

사도와 선지자에 대한 믿음

사도(Al Rasul)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되어진 인간을 뜻하는 단어로 이는 선택된 사람의 신앙심이나 사상 또는 그 사람의 배경이 선택의 기준이 될 수 없으며 오로지 하나님의 특별한 뜻, 섭리에 의해 결정되어 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듯이 그분으로부터 선택되어진 사도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하나님의 사도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역시 잊어서는 안될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비록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되어진 사도라 할지라도 그들 또한 천사들과 마찬가지로 경배의 대상도 구원의 주체자도 될 수 없다는 점이다. 또한 선택을 받은 사도들에 대한 그 믿음에 차별을 두어서도 안되며, 받은 계시에 대하여 인간으로서 그 경중을 따져서도 안된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하나님의 말씀이며 단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역할의 차이가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통해 보면 수 많은 사도들이 그들의 발자취를 남기고 있으며, 그 수에 대해서는 정확한 숫자가 전해지고 있지는 않지만 대략 124,000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여기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아담과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그리고 무함마드등이 있는데 이중 아브라함은 신의 친구(Khalil)로 택함을 받았을 정도로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를 경배하였으며(꾸란4장 125절),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모세5경/토라를 계시 받은 모세(Kalimullah:신과 직접 대화를 나눈 사람),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꾸란3장 47절) 신의 뜻에 따라 승천(꾸란4장 158절)하기 까지 많은 기적을 이룬 사도 예수 등이 꾸란에 잘 명시되어 있다.

이중 특히 사도 무함마드는 최후의 사도로서 이전의 사도들에게 계시되었으나 그후 많은 왜곡을 통해 변질되었던 성서를 온전하게 회복, 완성하셨으며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경배의 길을 가르칠 것을 계시받았다.

5) 최후심판일 (來世)

최후의 심판 일을 믿는다는 것은 내세를 믿는다는 말과 같다. 이 운명의 날에 모든 산 자들은 죽을 것이며, 그들은 그 이전에 죽은 자들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행한 선과 악한 행위를 심판 받기 위해 신의 권좌 앞에 소환될 것이다. 그들의 죄과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결정된다. 꾸란은 천국을 시원한 샘물들과 풍성한 음식과 음료 그리고 아름다운 시종들이 있는 그늘진 정원이라고 묘사한다. 지옥은 무서운 짐승들, 잔인한 고문, 유독한 안개, 썩은 음식과 끊는 물만 먹고 마실 수 있는 곳이다. 지옥에는 평화도 조화도 없는 곳이며, 신은 나타나지 않고 형벌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곳이다.

최후의 심판과 부활에 대한 믿음

일반적으로 이슬람 사상에서는 인간의 육체적 발달 과정을 3단계로 보는데 그 첫번째가 흙의 단계(꾸란 )이며 두 번째가 자궁내의 단계(꾸란 ) 그리고 마지막이 탄생의 단계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적 단계 또한 생명이 주체이기는 하지만 아직 자의식이 없는 상태로 모체에 있는 시기, 그 후 호흡을 갖고 살다 죽음을 통해 무덤에 이르는 중단단계, 그리고 마지막 부활의 단계로 나눌 수 있다.

특히 위에서 구분한 바, 영혼의 중간 단계에서 마지막 단계로 이르는 과정에서 인간은 누구나 그 삶에 대해 옳고 그름을 행한 대가를 심판 받게 되는데 이는 마지막 단계에 있는 최후의 심판과는 또 다른 의미로써 이 중간 단계에서 내려지는 심판은 인간 사회의 법처럼 상황에 따라 또는 지휘나 가진 것에 따라 타협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행한 만큼 그대로 심판 받게 되는 것이다.

그 후 우리는 영혼의 마지막 단계의 최후의 심판 날에 이르게 되는데 이 시기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단정지을수 없으며 이는 창조하시고 거두시는 절대자 하나님의 권능이기 때문이다.(꾸란40장59절,34장3절,7장187절) 심판의 날에 모든 인간은 그가 생애에 행했던 모든 선행과 악업에 따라 분류되어 천국과 지옥으로 갈리워진다.

6) 정명(定命)

인간의 운명은 하나님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Free Will)'를 중요시한다. 즉, 다른 피조물과 달리 신은 인간에게만 '이성'이라는 축복을 내렸기 때문에 그 이성에 따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중시함과 동시에 자유의지의 선악에 따라 최후의 심판 일에 심판을 받는다.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

현세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많은 부분을 과학에 의지하며 살고 있다. 과학의 발전을 통해 보다 나은 삶을 이루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붓고 있으며 그로 인해 많은 부분에 있어 삶의 질은 어느정도 향상되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좀더 본질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과연 과학의 발전이 언제나,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삶의 질을 풍요롭게 해주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삶의 질의 향상이라기 보다는 단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과정상의 시간 단축 즉 편리성에 대한 기술적 진보라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한 답은 아닐는지… 또한 모든 사람들이 마치 유토피아라도 건설할 수 있는 과학과 전문 기술의 세기가 도래한양 기다려 마지않던 21세기가 되었지만 우리가 기대했던 것 만큼 그에 따른 많은 문제 또한 발생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에 대해서는 굳이 그 예를 나열하지 않아도 연일 매스컴을 통해 귀가 따갑도록 접하고 있다.

어쩌면 인간의 이러한 노력들 뒤엔 자연의 섭리, 인간의 섭리와 같은, 이 세상을 운용하고 있는 가장 기본이 되는 섭리를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닌 오로지 그 한계를 뛰어 넘기 위한 집착이 있는 것은 아닐지.. 물론 발전을 위한 노력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실제로 이슬람에서는 현세의 삶도 내세의 삶만큼이나 중요시 하며 현세의 삶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것을 권고한다) 그러나 과연 발전을 위한 노력만큼이나 그 가치들이 함께 고려되고 있는가? 과연 무엇을 위한 발전이며 그 결과가 어디로 향해가고 있는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어쩔 수 없는 유한적 생명체이다. 그러므로 주어진 시간 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에 도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함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특권이며 동시에 신성히 지켜야 할 의무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을 활용하되 그 권리와 의무의 한계를 벗어나려 해서는 안되며 노력한다 해서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인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순간도 또한 우리의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우리의 자손들이 그럴 것 처럼 시공을 초월한 하나님의 운영섭리에 속하는 피조물이며 그것이 인간에게 허락된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인정하고 믿으며 그 안에서 노력할 때에 우리의 방향을 올바로 볼 수 있으며 발전에 대한 가치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5. 이슬람의 도덕 체제(Moral System of Islam)

이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준수되고 존중되어야 하는 인간을 위한 보편적 기본 권리들을 총괄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권리를 성취하기 위하여 이슬람은 법적 보장 조항 뿐만 아니라 매우 효과적인 도덕 체제도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개인이나 사회의 복지를 가져오는 것은 무엇이든 이슬람에서 도덕적으로 선한 것이고 해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 도덕적으로 나쁜 것이다.

이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에 아주 많은 중요성을 두고 있어서 지나친 형식주의를 경계하고 있다.

성 꾸란은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너희들이 너희들의 얼굴을 동과 서로 돌리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하나님과 최후의 심판일, 천사들, 성서 그리고 선지자들을 믿고; 하나님을 위한 사랑으로 너희들의 친척, 고아들, 가난한 사람들, 여행자들,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 그리고 노예들의 몸값을 위하여 너희들의 재산을 사용하며; 꾸준히 예배를 드리고, 정기적으로 자선을 행하며 그리고 너희가 맺은 계약들을 이행하고; 고통과 역경 그리고 공포의 모든 시기를 통하여 변치 않고 인내하는 것은 옳은 일이니라. 그와 같은 사람들은 진실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니라 ”.( 2장 177절)

우리는 이러한 성 꾸란 구절에서 진실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에 대한 훌륭한 가르침을 받았다. 이러한 사람은 유익한 규정들을 따라야 하지만 그는 하나님과 주위 사람들의 사랑을 응시해야 한다.

우리는 4가지 주된 항목들을 부여 받았다:

1) 우리의 신앙은 진실되고 충심으로부터 나온 것이어야 한다.
2) 주위 사람들에 대한 자선의 행위로 우리의 신앙을 보여줄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3) 우리는 사회의 조직체를 돕는 훌륭한 시민들이어야 한다.
4) 각자의 정신은 어떤 상황에서 확고하고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이것은 어떤 특정한 행위의 형태가 선하고 악한 것으로 판단되고 구분되는 기준이다. 이러한 판단의 기준은 모든 도덕적 행위에 대한 중심역할을 한다.

어떠한 도덕적인 명령들을 내리기 이전에 이슬람은 인간의 마음속에 자신의 행동들이 언제 어디서든지 자신을 지켜보시는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다는 확신을 확고히 심어주려고 노력한다. 인간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숨길 수 있으나 하나님으로부터는 숨을 수 없고, 인간은 모든 사람들을 기만할 수 있으나 하나님을 기만할 수 없으며, 인간은 누군가 다른 사람의 수중으로부터 달아날 수 있으나 하나님의 수중으로부터는 달아날 수 없다.

따라서 인생의 목적을 하나님의 만족에 둠으로써 이슬람은 최고의 도덕적 가치에 기준을 둔다. 이것은 인류의 도덕적 발전을 위한 무제한의 방법들을 필연적으로 제공하게 한다.

하나님의 계시를 지식의 원천으로 함으로써 올바른 조정과, 적용, 혁신의 합리적인 여지를 제공해 도덕적인 기준에 영속성과 확실성을 준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두려움 안에서 도덕성을 허가해 주는데, 그 사랑과 두려움은 인간으로 하여금 어떠한 외적 압력 없이도 도덕률에 따르도록 한다.

이슬람은 하나님과 심판의 날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한 인간에게 진지함과 성실함 그리고 모든 진심을 다하여 도덕적인 행위를 채택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길을 제시해 준다.

이슬람은 창의와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어떠한 새로운 도덕적 가치도 추구하지 않으며, 잘 알려진 도덕적 규범의 중요성을 최소화하려고 시도하지도 않는다, 또한 어떤 도덕적 가치에 대해서는 그 중요성을 과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유없이 다른 것을 무시하지도 않는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도덕적 가치를 채택하고 균형과 조화로운 의식으로 삶의 총체적인 계획 속에서 각자에게 적합한 위치와 기능을 부여한다.

그것은 자신의 개인적인 관계, 사회적 행동 그리고 정치적 · 경제적 · 법률적 · 교육적 · 사회적 관계 등 인간의 개인적 혹은 집단적인 삶의 영역을 넓혀준다. 그것은 가정으로부터 사회까지, 식탁에서 전쟁터 그리고 평화 회담까지, 문자 그대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간의 삶을 망라하고 있다. 요컨대 삶의 어떠한 영역도 이슬람의 도덕적 원리의보편적이고 포괄적인 적용으로부터 제외되지 않는다. 그것은 도덕성이 최고의 영향력을 행사하게 하며 이 세상의 일들이 이기적인 욕구나 작은 이익에 의하여 좌우되는 대신에 도덕적 기준에 의하여 통제되도록 확실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선에 기반하고 모든 악으로부터 벗어난 삶의 체제를 인간에게 제시해 준다. 그것은 사람들이 선을 행하고 악을 금하기 위하여 미덕을 강조 할 뿐 아니라 해악을 근절하도록 호소한다. 그것은 양심의 판단이 우선하여야 하고 미덕이 악의 밑에 놓여 복종 되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이러한 사명에 부응하는 사람들은 함께 모여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무슬림이라는 이름을 부여 받게 된다. 이러한 공동체(움마 : Ummah)의 설립을 강조하는 유일한 목적은 그것이 선을 확립하고 강화하며 악을 금하고 근절시키기 위한 조직적인 노력을 기울이는데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슬림의 삶의 다양한 면들을 위한 이슬람의 기본적인 도덕적 가르침 몇 가지를 제공한다. 그것들은 무슬림의 사회적인 책임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도덕적 행동의 광범위하게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의 인식

성 꾸란은 무슬림의 가장 높은 자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희들 중에서 가장 영광을 받을 자는 너희들 중에서 가장 의로운 자(들)이니라. ”( 49장 13절)겸손, 정숙, 열정과 욕구의 억제, 진실성, 성실, 인내, 불변성, 그리고 약속 이행은 성 꾸란에서 다시금 강조된 도덕적 가치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내하는 자들을 사랑하시느니라. ”(3장 146절)

“너희 주님의 용서를 받기 위한 노력을 서둘러라, 그리고 천국은 하늘과 땅(의 전체)의 넓이가 같으니, 정의로운 자들을 위하여 준비된 것이니라 -

부유할 때나 또는 역경에 처하였을 때나 (아낌없이) 자선을 베풀고;

분노를 참으며,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는 자들이니라 ? 하나님은 선행하는 자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니라 ? (3장 133-134절)

“오 나의 아들아! 규칙적인 예배를 행하고, 올바른 것을 요구하며, 부정한 것을 금하라; 그리고 무슨 일이 너에게 일어나든 부단히 인내하라; 이것이 일상의 업무(의 처리) 속에 있는 (의지의) 견고함이기 때문이니라.

“(자만으로) 사람들에게 뽐내지 말고, 이세상에서 오만하게 걷지도 말아라:

하나님은 거만하게 자랑하는 자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니라.

“걸음걸이를 적절히 하고 너의 목소리를 낮춰라; 틀림없이 가장 귀에 거슬리는 소리는 당나귀들의 울음소리이기 때문이니라. ”( 31장 17-19장)

무슬림의 도덕적 품행에 대해 선지자 무함마드(그 분께 하나님의 평화가)께서 말씀하시기를 :

“나의 부양자이신 하나님은 나에게 9가지 명령을 부여하셨다: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든 하나님을 늘 의식하고; 화가 나던 기쁘든 간에 공정하게 말하고; 가난할 때나 부유할 때나 늘 절제를 보이며; 나와 사이가 갈라진 사람들과 우정을 회복하고; 나를 거부하는 자에게 베풀며; 나의 침묵은 생각으로 가득 채워져야 하고; 내가 바라보는 것은 경고가 되며; 나는 옳은 것을 명령해야 하느니라. ”

사회적인 책임

사회적인 책임에 관한 이슬람의 가르침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친절과 배려에 기초하고있다. 친절의 범위가 광범위 하다 보니 자칫 특수한 상황 속에서 무시되기 쉽기 때문에 이슬람은 친절의 특수한 행위에 중점을 두고 다양한 관계의 책임과 권리를 규정하고있다. 게다가 관계의 범위가 넓어지는 가운데 우리의 첫번째 의무는 우리의 직계 가족인 부모, 남편 또는 아내 그리고 자녀들에게 있고, 그 다음 우리의 친척들, 이웃들, 친구들과 친지들, 고아들과 과부들, 공동체의 불우한 사람들, 우리의 동료 무슬림들, 우리와 같은 인간들과 동물들에게 있다.

부모

부모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이슬람의 가르침에서 매우 강조되고 있으며 무슬림의 신앙 표현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너의 하나님께서 명령하시어 너희는 그분 외에는 아무도 섬기지 말고, 너희는 부모를 사랑하라 하셨느니라. 그들 중 한 사람 또는 두 사람모두가 노년에 이르렀을 때, 그들에게 경멸하는 말을 하지 말고, 그들을 배척하지 말며,

그들에게 존경하는 말을 하라. 그리고 친절로서 그들에게 겸손의 날개를 낮추고, 말하라: “나의 하나님! 그들이 제가 어렸을 때 저를 소중히 길렀던 것과 똑 같이 그들에게 당신의 자비를 베푸소서. ”(17장 23-24절)

다른 친척들

“그리고 친척들과, 가난한 자들, 그리고 여행자들에게 그들의 합당한 권리를 제공하라: 그러나 재산을 탕진하는 자와 같이 낭비하지 말지어다. ” (17장 26절)

이웃들

선지자 무함마드(그 분에게 하나님의 평화가)께서 말씀하시기를 :

“자신의 곁에 배고픈 이웃이 있을 때 배부르게 먹는 자는 하나님을 믿는 자가 아니며; 그리고: 그는 이웃들이 자신의 부정한 행동으로 인하여 상처 입을 수 있다는 것을 믿지않는 자이다. ”

실제로 성 꾸란과 순나(Sunnah : 선지자의 가르침)에 따르면 무슬림은 자신의 부모, 친척들 그리고 이웃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 동물들 그리고 유용한 나무들과 식물들에게도 자신의 도덕적인 책임을 이행하여야 한다. 예를 들면 유희를 위하여 새와 동물을 사냥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열매를 맺는 나무와 식물을 자르는 것은 아주 절박한 필요가 있지 않는 한 금지되어있다.

따라서 이슬람은 기본적인 도덕적 특성에 기초해 보다 높은 도덕 체제를 건설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인류는 자신의 가장 위대한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슬람은 자기 본위의 자만, 포악 행위, 방자함 그리고 자제심 결여로부터 정신을 정화시킨다. 이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만들어 내며 자신의 이상에 충실하며, 신앙심과 절제 그리고 수양을 갖추고 거짓과 타협하지 않는 사람을 만들어 낸다. 이슬람은 도덕적인 책임감을 이끌어내고 자제심의 능력을 배양하여 준다. 이슬람은 모든 상황에서 모든 창조물에 대한 친절, 관용, 자비, 동정, 평화, 사욕이 없는 선의, 양심적인 공정함과 진실함을 갖게 해 준다. 이슬람은 오로지 선 (善) 만이 기대될 수 있는 고상한 자질들을 육성한다.


6. 이슬람에서 하나님의 개념(Concept Of God In Islam)

모든 언어에는 하나님과 잡신에 관하여 사용되는 말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표현을 갖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이슬람에서 하나님(Allah)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하나님은 유일한 진리에 대한 고유 이름이다. 그 외의 어느 것도 하나님으로 부를 수 없다. 그 말은 복수형 또는 성별 (性別) 을 갖고있지 않다. 이것은 복수형인 신들(gods) 또는 여성형으로 여신(goddess)이 만들어질 수 있는 신(god)이란 단어와 비교할 때 이것의 유일성을 보여준다. 하나님(Allah)이 예수(그 분께 하나님의 평화가)의 언어이고 아랍어(Arabic)의 자매(姉妹) 언어인, 아람어(Aramaic)에서 하나님(God)의 고유의 이름을 주지하는 것은 흥미롭다.
유일하신 진리의 하나님은 이슬람이 하나님과 관계가 있다는 개념을 나타내 준다. 무슬림에게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the Almighty)이시고, 우주의 창조자 이시며 부양자(Sustainer)이시고, 그 분과 유사한 자가 없으며 아무것도 그 분과 비교될 수 없다. 선지자 무함마드(그 분께 하나님의 평화가)는 자신과 같은 시대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에 관하여 질문 받았고, 그 대답은 하나님의 유일성의 본질 또는 일신론의 좌우명으로 간주되는 것으로, 성 꾸란에서 짧은 장의 형태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되었다. 이것은 성 꾸란 112장으로써 다음과 같다:

“자비로우시고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그 분은 낳지도 나아지지도 않으셨으니; 그 분과 어떤 같은 것도 없나니. ”(성 꾸란 112장 1-4절)

어떤 비무슬림들은 이슬람에서의 하나님은 완전히 복종하기를 요구하는 엄격하고 무자비하고, 그 분은 애정이 깊으시거나 친절하시지 않은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렇게 근거 없는 주장보다 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것은 없다. 성 꾸란 114장은 한 절을 제외하고;

“자비로우시고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

라는 구절로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한 대답이 된다. 선지자 무함마드(그 분께 하나님의 평화가)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 중의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어머니가 자신의 소중한 자식을 대하는 것 보다 더욱 사랑이 깊으시고 동정심 있으시다. ” 라고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정하신 분이기도 하다. 악인들과 죄인들은 반드시 벌을 받고, 덕행이 있는 사람들은 그 분의 보상과 은혜를 받게 될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속성은 그 분의 정의의 속성에서 완전히 표명되고 있다. 하나님을 위하여 일생 동안 고통 받은 사람들과 평생을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한 사람들은 같은 대우를 주님으로부터 받을 수 없다. 그들이 같은 대우를 받는다고 기대하는 것은 내세에서 인간의 책임에 대한 바로 그 믿음을 부인하고 이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도덕적이고 덕행 있는 삶을 위한 모든 격려를 부인하는 것이다. 다음의 성 꾸란 구절은 이러한 점에 대하여 매우 명백하고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진실로 정의로운 자들을 위하여 그들의 주님 앞에 기쁨의 천국이 있도다. 이러할 진대 믿음 있는 자들을 죄지은 자들과 같이 대우하려 하시겠느냐? 너희들은 잘못 알고 있으니, 어떤 연유로 그렇게 판단하느냐? ” (성 꾸란 68장 34-36절)

이슬람은 하나님을 어떤 인간의 형상으로 특성을 묘사하거나, 그 분이 부, 권력 또는 인종에 근거하여 특정한 개인 또는 민족을 편애하고 있다고 묘사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 분께서는 인간을 동등하게 창조하셨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특성을 나타내어 오직 미덕과 신앙심을 통해서 그분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의 제 7일째에 휴식을 취하셨다거나, 하나님께서 그 분의 병사들 중 한명과 씨름을 하셨다거나, 하나님께서 인간에 대한 질투심이 강한 음모자라거나, 또는 하나님께서 어떤 인간의 육신을 가졌다는 생각들은 이슬람의 관점으로 볼 때 신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된다.

인격적인 이름으로 하나님(Allah)을 유일하게 사용하는 것은 모든 선지자들의 계시의 정수인 하나님에 대한 이슬람 신앙의 순수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이슬람은 어떠한 신 또는 인물을 하나님과 관련시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다른 죄들을 용서하여 주실 수도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결코 용서하시지 않을 대죄로 간주하고 있다.

창조주는 창조된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특성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만일 그 분께서 창조된 것들과 같은 특성을 가진 분이라면, 그 분은 일시적이 될 것이고 따라서 창조자를 필요로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로써 그분과 같은 것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만일 창조주가 일시적이 아니라면 그 분은 영원해야만 한다. 그러나 만일 그 분이 영원하다면, 존재 될 수 없으며, 만일 그 분을 존재하도록 할 것이 없다면, 외부의 어떤 것도 그 분이 계속하여 존재하도록 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그 분이 스스로 완전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만일 그 분이 자신의 존재의 연속성을 위하여 무엇인가에 의존할 수 없다면 이러한 존재는 끝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주는 영원한 분이다:

“그 분은 처음이고 마지막 이시니 ……” (성 꾸란 57장 3절)

그 분은 완전하시고 존재하는 분이시니, 성 꾸란은 이를 AL-Qayyum(스스로 완전히 존재하심)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사물을 존재하도록 한다는 관점으로만 창조주께서 창조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 분은 그것들을 보존하시고 멸하시며, 그것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의 최종적인 원인 이기도 하시다.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시고, 보호자이시며, 하늘과 땅의 모든 일을 관장하시니. 땅 위의 모든 기어 다니는 피조물 조차도 그분께서 부양하시니, 진실로 그분은 모든 피조물의 양식이 있는 곳과 쉴 곳을 알고 있나니. ”

하나님의 속성들(God ’ s Attributes)

만일 창조주께서 영원하시다면, 그 분의 속성들은 역시 영원하여야 한다. 그 분은 어떠한 속성들을 잃거나 새로운 속성들을 얻지도 않으신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분의 속성들은 절대적이어야 한다. 그러한 속성들을 갖고있는 창조주가 한 분 이상일 수 있는가? 예를 들면, 절대적으로 강력한 창조주가 둘이 될 수 있을까? 잠시 생각 해보더라도 이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성 꾸란은 다음의 구절에서 이러한 논쟁을 요약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식을 두지도 않으셨으며, 그 분 곁에 다른 신을 두지도 않으셨노라. 만일 모든 신들이 자신이 창조한 것을 빼앗아 간다면, 그들 중 어떤 신은 다른 신들 위에 군림 할 것이기 때문이니라. 하나님 외에 하늘과 땅에 다른 신들이 있었다면, 그것들은(하늘과 땅) 틀림없이 멸망하였으리라. ”성 꾸란 (23장 91절)

하나님의 유일성(The Oneness of God)

성 꾸란은 모든 신들의 허위성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여준다. 우상 숭배자들에 대하여 성 꾸란은 묻는다:

“너희가 스스로 조각한 것을 숭배하거나 하나님 대신에 그 자신들 조차도 스스로 보호할 힘도 없는 그런 것들을 너의 보호자로 두겠느냐? ”

천체를 숭배하는 자들에게 성 꾸란은 아브라함(Abraham)의 이야기를 상기시키고 있다:

“밤이 그를 덮어 가렸을 때, 그는 별을 보았고, “이것이 나의 주님이로다. ”라고 말하더라. 그러나 그것이 저물었을 때, “나는 저무는 것들을 좋아하지 않노라. ”라고 그가 말하더라. 그가 달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을 때, “이것이 나의 주님이로다. ”라고 그가 말하더라. 그러나 그것이 저물었을 때, “만일 나의 주님께서 나를 인도하시지 아니 하신다면 나는 분명히 길을 잃은 자들 중에 있게 되리라. ”라고 그가 말하더라.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을 때, “이것이 나의 주님이며; 이것은 (모든 것 중) 가장 크노라. ”라고 그가 말하더라. 그러나 그것이 저물었을 때, “오 나의 백성들이여, 반드시 나는 너희들과 연관된 것을 버리노라. 나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그 분에게 나의 얼굴을 돌렸고, 순수한 신앙인으로서 나는 우상 숭배자들 중에 있지 않노라. ”(성 꾸란 6장 76-79절)

신앙인의 태도(The Believer ’ s Attitude)

무슬림이 되기 위하여(즉, 하나님께 귀의하기 위하여) 그 분의 존재가 유일한 창조주, 보호자, 부양자, 등등이라는 의식 속에서 하나님의 유일성을 믿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뒤에 Tawhid ar-Rububiyyah(주인으로서 유일성)라고 부르는 이러한 믿음은 충분하지 않다. 많은 우상 숭배자들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모든 것들을 행하실 수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을 무슬림들로 만들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Tawhid ar-Rububiyyah가 되기 위하여서는 사람들은 Tawhid al-Uluhiyyah(신으로서 유일성)를 추가 하여야 하며 즉, 하나님만이 숭배 받을 자격이 있으시고 따라서 어떤 다른 것을 숭배하는 것 또한 그만두어야 하는 사실을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이다.

유일하신 진리의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지식을 성취하기 위하여 인간은 그 분에 대한 믿음을 지속적으로 갖고, 어떠한 것도 자신으로 하여금 진실을 거부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믿음이 한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갔을 때, 그것은 특정한 행동의 결과를 낳는 정신적 상태를 나타낸다. 이러한 정신적인 상태와 행동을 함께 취하는 것은 진정한 믿음을 위한 증거이다. 선지자께서는 “믿음은 마음에확고히 존재하며 행위로서 입증된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한 정신적인 상태들 중에서 맨 먼저의 것은 Ibada(경배)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느끼는 것이다.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불신자들을 ‘Kafir ’라고 부르며, 이 말은 ‘진실을 부인하는 자 ’ 그리고 또한 ‘은혜를 모르는 자 ’를 의미한다.

신앙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부여된 혜택에 대하여 감사한다. 그러나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간에 자신의 선한 행위는 하나님의 은총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현세나 내세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벌 주시지 않도록 항상 염려하여야 한다. 따라서 신앙인은 그 분을 두려워하고 자신을 그 분에게 완전히 맡기는 것을 커다란 겸손으로 알고 그 분을 섬긴다. 그러한 정신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을 마음에 두어야 한다. 기억하라. 하나님은 신앙에 대한 창조적인 생명력이고 그 생명력이 없는 신앙은 시들거나 쇠퇴하여 버린다.

성 꾸란은 하나님의 속성들을 매우 빈번히 반복시킴으로써 이러한 감사의 마음을 갖도록 유도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속성들의 대부분을 다음의 성 꾸란 구절들을 통하여 반복하여 언급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나니 그분은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도 알고 계시는 자비로우시고 자애로우시니라.

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으며 그분은 왕이시고 성스러운 분이시며 평화를 주시고 안정을 수여하시는 분이시며, 가장 위대하시고 권세와 모든 위대함의 소유자 이시니, 그들이 비유하는 모든 것 위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이 있기를 ……” 성 꾸란 (59장 22절)

“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나니 그분은 살아계시고 영원하시며 모든 것을 주관하시니 졸음도 잠도 필요치 아니하시니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그분의 것이니 그분의 허락 없이 중재할 수 있으랴. 그리고 그들의 앞과 뒤에 있는 것을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니, 그들은 그분께서 허락한 것 이외에는 알지 못하니라. 하늘과 땅에 그분의 권좌를 펼치시어 하늘과 땅을 관장하시니, 진실로 그분은 가장 높고 위대하시다. ” 성 꾸란 (2장 255절)

“성서의 백성들이여! 너희 종교의 한계를 넘지 말며 하나님에 대하여 진실 외에는 말하지 말지어다. 실로 마리아의 아들 예수는 하나님의 사도이며, 그의 말씀은 마리아에게 내려주시니 하나님과 그분의 선지자들을 믿고, 삼위일체를 말하지 말아라. 그것을 그만 두는 것이 너희들에게 보다 이로우니라. 실로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어떻게 그분에게 아들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그분께 속해 있으니 이 모든 것이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하시니라. ”성 꾸란 (4장 171절)


7. 이슬람에서 예언자의 지위(Prophethood In Islam)

예언자의 지위에 대하여 유대교와 기독교와 같이 하나님에 의해 계시된 종교들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이슬람에서 그것은 특별한 지위와 중요성을 갖고있다.
이슬람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숭고한 목적을 위하여 인간을 창조하셨다. 즉, 하나님의 가르침과 인도에 따라 고결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께서 행동하기를 원하시는 것에 대한 명백하고 실질적인 가르침들을 받을 수 없다면 어떻게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자신의 역할과 목적을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예언자 지위의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인간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여러 민족으로부터 한 사람 또는 그 이상의 선지자를 선택했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다. 어떻게 선지자들이 선택되었고 어떤 사람들이 이토록 위대한 영예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까? 예언자의 지위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에게 부여하신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이다. 그러나 역사를 통하여 여러 선지자들을 조사해보면 선지자의 3가지 특성들을 알 수 있다:



1. 그는 자신의 공동체에서 가장 도덕적이고 지적인 사람이다. 이것은 선지자의 삶이 그의 추종자들에게 본보기가 되기 때문에 필수적이다. 그의 인격에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몰아 부치기 보다는 자신이 전하는 말(message)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들을 이끌어야만 한다. 메시지를 받은 후에 그는 어떠한 죄도 저지르지 않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보통 사람들과 같이 계시에 의하여 잘못이 지적되는 약간의 작은 실수를 지속하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2. 그는 자신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하여 기적과 같은 계시에 의하여 도움을 받게 된다. 이러한 기적들은 하나님의 권능과 허락에 의하여 부여되고, 일반적으로 자신의 백성이 뛰어나다고 인정된 분야에서 일어난다. 우리는 중요한 세계적인 종교들 즉, 유태교,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로부터의 3인의 선지자들이 중요한 기적들을 인용함으로써 이것을 설명할 수 있다. 모세와 같은 시대 사람들은 마법에 뛰어났다. 그래서 그의 중요한 기적은 그 당시에 이집트에 있던 최고의 마술사들을 이기는 것이었다. 예수와 같은 시대의 사람들은 훌륭한 의사들로 인정 받았었다. 따라서 예수의 기적들은 죽은 자들을 일으키고 불치의 병들을 고치는 것이었다. 선지자 무함마드(그 분께 하나님의 평화가)와 같은 시대 사람들인 아랍인들은 그들의 웅변술과 시적 재능으로 유명하였다. 그래서 무함마드의 중요한 기적은 많은 아랍의 시인들과 웅변가들 전체가 성 꾸란 자체로부터의 반복된 도전에도 불구하고 창작할 수 없었던 것이 성 꾸란이었다. 게다가 무함마드의 기적은 그것에 관해 특별한 것을 내포하고있다. 이전의 모든 기적들은 시간과 장소에 의하여 제한되었다. 즉, 그것들은 어떤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사람들에게 보여졌던 것이다. 무함마드의 기적 즉, 전 인류를 위한 영원한 기적인 성 꾸란은 그렇지 않다. 과거와 현재의 세대들이 영적 앙양 (昻揚)을 위한 그것의 독자적인 표현법과 내용면에서 그것의 기적적인 특성을 목격하였고, 미래의 세대들도 그것을 목격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조사될 수 있고 그것에 의해서 성 꾸란의 신성한 출처가 입증 될 것이다.

3. 모든 선지자들은 자신이 계시 받은 것은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명백히 밝히고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이전에 계시된 것과 자신의 이후에 계시될 수 있는 것을 확증한다. 선지자는 그가 단순히 모든 시대에 모든 사람들의 유일하신 진리의 하나님에 의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계시를 전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계시는 본질적으로 하나이고 같은 목적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의 이전에 계시되었던 것 또는 그의 이후에 올 수 있는 것으로부터 빗나갈 수 없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가르침과 인도를 인류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가 왜 창조되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사후에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사후에 어떤 삶이 존재할까? 우리는 우리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할까? 바꾸어 말하면 이 세상에서 우리의 행위들에 대한 어떠한 보상 또는 처벌이 있을까? 이러한 것들과 하나님, 천사들, 천국, 지옥, 등등에 관한 많은 다른 질문들은 조물주이시며 보이지 않는 것을 아시는 분으로부터의 직접적인 계시가 없는 한 답변 될 수 없다. 그러한 답변들은 확실해야 하고 우리가 믿고 존경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제시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선지자들이 도덕적인 행위와 지적인 능력 면에서 그들의 사회에서 선택된 이유이다.

그러므로 위대한 선지자들 중 어떤 분들을 비방하는 성경의 내용들은 무슬림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 예를 들면, 롯(Lot)이 술에 취하여 자신의 딸들과 간음을 저질렀다고 전해지는 경우 또는 다윗(David)이 자신의 지휘관들 중에 한 사람을 그의 아내와 결혼하기 위하여 전장터로 파견하였다는 것이다. 선지자들은 무슬림들에게 이러한 이야기들이 보여주는 것보다 더욱 위대하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이슬람의 견해로는 사실이 아니다.

선지자들은 또한 하나님의 기적으로 격려 받고 계시의 연속성을 확언하도록 명령 받는다.

인류에게 보내진 계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신에 대한 명확한 개념: 하나님의 속성들, 하나님의 창조 그리고 하나님께 속하는 것과 속 할 수 없는 것

2) 보이지 않는 세계, 천사들, 진[(jinn : spirits : 영마 (靈魔))], 천국과 지옥에 대한 명확한 이해

3)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로부터 무엇을 원하시고 하나님께 복종하거나 불복종한 것에 대한 보상 또는 처벌이 무엇인가?

4)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의 사회를 이끄는 방법은? 즉, 명확한 명령과 법이 정확하고 정직하게 적용되었을 때 행복하고 이상적인 사회가 도래한다.




선지자들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은 위에서 설명한 것으로 명확해진다. 심지어 과학이 발전한 오늘날에도 초자연적인 세계에 대한 유일하고 확실한 정보의 출처는 계시이다. 인도라는 것은 과학이나 또는 신비적인 경험으로부터 얻어질 수 없다. 첫번째는 너무나 물질적이고 제한되어 있으며, 두 번째는 너무나 주관적이고 빈번히 오해하기 쉽다.

지금 당장 한 사람이 물어볼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선지자들을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보내셨는가? 우리는 확실히 알지 못한다. 어떤 무슬림 학자들은 24만 명의 선지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에게 한 사람의 선지자를(또는 그 이상) 보내셨다고 성 꾸란에 명확히 언급된 것만을 확신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명확히 하시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는 결코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근본 방침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성 꾸란은 25명의 선지자들의 이름을 언급하고 선지자 무함마드(그 분께 하나님의 평화가)에게 언급되지 않은 다른 선지자들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선지자들 25명은 방주의 예언자인 노아(Noah), 아브라함(Abraham), 모세(Moses), 예수(Jesus) 그리고 무함마드(Muhammad)를 (그 분들에게 하나님의 평화가) 포함하고 있다. 이 다섯분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분들이다. 이분들을 ‘신념이 강한(the resolute) ’ 예언자들이라고 부른다.

예언자의 지위에 대한 이슬람의 믿음에 있어 탁월한 면은 예외 없이 하나님의 모든 선지자들을 믿고 존경하는 것이다. 똑같은 유일한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선지자들이 왔고 하나님께 인류를 인도하시는 같은 목적을 갖고 있다, 따라서, 모든 선지자들에 대한 믿음은 의무적이고 논리적이다. 일부 선지자들을 받아들이고 다른 분들을 거부하는 것은 명백히 예언자들의 역할 또는 인종적인 편견에 근거한 오해를 전제 (前提)로 한다. 무슬림들은 하나님의 모든 선지자들에 대한 믿음을 하나의 신조로 간주하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와 무함마드를 거부하는 유대인들; 그리고 무함마드를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은 실제로 그들이 모세의 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모세를 거부하는 것과 같다. 이슬람은 그들 모두를 인류를 인도하는 하나님의 선지자들로서 받아들인다. 선지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부정하게 변경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성 꾸란은 하나님의 모든 선지자들에 대한 믿음을 무슬림들에게 아래와 같이 명령 하였다:

말하라: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우리에게 계시된 것과, 아브라함, 이스마일, 이삭, 야곱 그리고 그 자손들에게 계시된 것을 믿으며, 모세와 예수에게 계시된 것을 믿고, 그들의 주님으로부터 (모든) 선지자들에게 계시된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차별하지 않으며,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 복종합니다.”

성 꾸란은 이것이 사실이고 공정한 믿음이라는 것을 무슬림들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다음의 구절에서 계속되고 있다. 만일 민족이 다르더라도 신앙이 같다면 그들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단지 그들 자신의 일시적인 생각과 편견을 추종하고 있으며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알게 된다:

“ 그래서 만일 그들이 너희가 믿는 것처럼 믿는 다면 그들은 진정 올바른 길을 가고 있나니,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국 분열될 것이나 하나님께서 너희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힘을 주시니, 진실로 그분은 모든 것을 듣고 아시는 분이시니라.” 성 꾸란 (2장 137절)

분명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는 예언자의 지위와 관련된 적어도 두 가지 중요한 사항이 있다. 이러한 사항들은 대단히 오해 받고있는 선지자들로서 예수와 무함마드(그 분께 하나님의 평화가)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예수 (그 분께 하나님의 평화가)에 대한 성 꾸란의 해석은 그의 ‘신성(神性)’과 ‘하나님의 자식의 신분’에 대한 개념을 단호히 거부하지만 하나님의 위대하신 선지자들 중의 한 분으로서 그를 나타내고 있다. 성 꾸란은 아버지 없는 예수의 탄생이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명백히 하고 있으며, 성 꾸란은 이점에 대하여 아담(Adam)이 하나님에 의하여 아버지와 어머니 없이 창조되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예수의 모습은 아담의 것과 같으며,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 다음 그에게 말씀하시어: “있어라” 하니 그가 있었노라.” 성 꾸란 (3장 59절)

다른 선지자들과 같이 예수(그 분께 하나님의 평화가) 역시 기적들을 행하였다. 예를 들어, 그는 죽은 자들을 일으켜 세우고 맹인들과 나병 환자들을 치료하였지만, 이러한 기적들을 보일 때 그는 항상 그것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명백히 하였다.

실제로 예수의 인격과 임무에 관하여 잘못된 생각들은 그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설교한 하나님의 계시는 그가 생존해 있었을 때 기록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약 100년 후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성 꾸란에 의하면 그는 이스라엘(Israel)의 자손에게 보내졌다. 그는 모세에게 계시된 토라(Taurat)의 유효성을 입증하였고 그는 또한 그의 이후에 나타날 마지막 선지자의 소식을 가져왔다.

“그리고 마리아의 아들 예수가 “오 이스라엘의 자손들아! 나는 나의 이전에 온 토라, 그리고 나의 이후에 올 아흐마드라는 이름을 가진 선지자의 희소식을 확인하는, 너희들에게 보내진 하나님의 선지자이니라.”라고 말한 것을 기억하라.” 성 꾸란 (61장 6절)

주 (註): 아흐마드(Ahmad)는 “찬미 받는 자(the praise one)”라는 의미로서 무함마드의 또 다른 이름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유태인들은 예수의 성스러운 임무를 거부하였다. 그들은 그에 대한 음모를 꾸몄으며,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성 꾸란은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고, 그들은 그를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박지 못하였으며 그는 하나님에게 부름 받아 승천했다고 말한다. 예수는 돌아올 것이고 모든 기독교인들과 유태인들은 그들이 죽기 전에 이 사실에 관하여 믿을 것이라고 의미하는 내용이 성 꾸란의 구절에 있다. 이것은 역시 선지자 무함마드(그 분께 하나님의 평화가)의 진정한 말씀에 의하여 입증된다.

하나님의 마지막 선지자이신 무함마드(그 분께 하나님의 평화가)께서는 서기 6세기에 아라비아에서 출생하셨다. 40세가 될 때까지 메카의 사람들은 그를 단지 훌륭한 성품과 수양을 쌓은 예절을 갖춘 사람으로 알았고, 그를 알-아민(AL-AMEEN : 신뢰할 수 있는 자)이라 불렀다. 그는 또한 자신이 곧 선지자와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자가 될 것임을 알지 못하였다. 하지만 계시를 받은 후 그는 메카의 우상 숭배자들에게 유일하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받아드릴 것을 촉구하였다. 그가 받은 계시는 그의 생전에 동료들의 기억 속에 보존되었고, 이것은 또한 대추야자 잎들, 가죽, 등등의 조각들에 완벽하게 기록되었다. 따라서 오늘날의 성 꾸란은 그에게 계시된 것과 동일한 것으로 전승되었고, 하나님께서 보전을 보장하셨듯이 한 마디도 변질되지 않았다. 이 성 꾸란은 모든 시대에 걸쳐 인류를 위한 지침서이고 무함마드가 하나님의 마지막 선지자임을 언급하고 있다.


8. 사후(死後) 의 삶(Life After Death)

학자는 단지 판단 자료의 분류와 분석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사후의 삶이 존재하는지 아닌지의 문제는 과학의 범주에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 한다. 더욱이 인간은 지난 수세기 동안 과학이라는 현대적인 관념으로 연구와 조사에 몰두해왔으나, 인간은 아득한 옛날부터 사후의 삶에 대하여 인지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모든 선지자들은 그들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숭배하고 사후의 삶을 믿도록 명하였다. 선지자들은 사후의 삶에 대한 믿음이 너무나 확고 했기 때문에 심지어 그것에 대한 약간의 의심조차도 하나님을 부정하고 모든 다른 믿음들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느님의 모든 선지자들이 그들 사이에 수천 년이란 기간의 간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후의 삶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그토록 확신을 같고 한결 같이 다루었다는 그 사실은 그들 모두에 의하여 공포되었듯이 사후의 삶에 대한 지식의 출처는 같았다는 것, 즉, 신의 계시였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큰 문제는 그들의 백성들이 이사실에 대하여 불신 하였기 대문에 그들로부터 많은 이의를 제기 받았다는 사실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들은 아주 많은 진실한 추종자들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면 무엇이 그 추종자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공통체로부터 완전히 소외되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 선조들이 갖고 있던 확고한 믿음, 전통 그리고 관습을 버리고 새로운 믿음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하였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그 대답은 간단하다: 그들은 그들의 심적 능력으로 진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지각 (知覺) 을 통하여 진실을 깨달았는가? 그렇지 않다, 사후의 삶에 대한 지각적인 경험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하느님은 지각 의식 이외에 이성적, 심미적 그리고 도덕적인 의식을 또한 사람에게 부여하셨다.

지각의 자료를 통하여 입증되어질 수 없는 사실들에 관하여 인간을 인도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식이다. 그것이야말로 하느님의 모든 선지자들이 사후의 삶이 인간의 심미적, 도덕적 그리고 이성적인 의식에 호소하는 이유이다. 예를 들면 메카(Makkah)의 우상 숭배자들이 사후의 삶의 대한 가능성조차도 부정했을 때 성 꾸란은 매우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논증을 펼쳐나감으로써 그들의 논리의 결점이 드러나게 하였다:

인간은 하나님과 유사한 것들을 지어내며 그가 창조된 것을 잊어 버리고 말하기를, “바짝 말라버리고 부패한 이 뼈에 누가 생명을 부여 하느냐? ” 라고 하더라. 말하라, 하나님께서 최초에 그들을 창조 하신 생명을 그들에게 주리라! 그분은 모든 창조에 관하여 알고 계시기 때문 이니라. 그분은 너희들을 위하여 푸른 나무로부터 불을 만드시니 너희들이 그것으로부터 불을 피우리라.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그분이 그와 흡사한 일을 할 수 없단 말이냐? ” 결코 아니니, 왜냐하면 그분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지고한 창조주 이시기 때문 이니라 ! (성 꾸란36장 78-81절)

또 다른 경우에서 성 꾸란은 불신자들이 사후의 삶에 대한 부정에 논리적으로 올바른 어떠한 근거를 갖고있지 않다는 것을 매우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그들의 사후의 삶에 대한 부정은 억측에 근거를 두고있다:

그리고 그들은 “현세의 삶 이외에 우리에게는 어떠한 것도 없으며, 우리는 죽고 우리는 살며 시간 외에는 어떠한 것도 우리를 멸하지 못하느니라 ” 라고 말하니 그들은 그것에 대하여 어떠한 것도 알지 못하며 단지 추측할 뿐이라.

하나님의 명확한 말씀이 그들에게 전해 졌을 때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그것을 믿는 사람들 이라면 우리의 선조들을 데려오라! ” 라고 주장하더라.(45장 24-25절)

확실히 하나님은 모든 죽은 자들을 부활시키며 모든 사태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계획을 갖고 계신다. 모든 우주가 파괴되고 다시금 죽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하여 부활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 날은 결코 끝나지 않을 삶의 시작이고, 그날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선행이나 악행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사후의 삶의 필요성에 관한 성 꾸란의 설명은 인간의 도덕적인 의식을 요구하는 것이다. 만약에 사후의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에 대한 그 믿음은 부적절한 것이 되거나, 또는 인간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그 하나님은 한때 인간을 창조하였으나 인간의 운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하나님이 될 것이다. 확실히 하나님은 공정하시다. 많은 사람을 죽이고, 사회에 커다란 물의를 일으키며, 그들의 일시적인 기분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노예로 만드는 일 따위의 셀 수 없이 많은 범죄들을 저지르는 폭군들에게 하나님은 벌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매우 짧은 수명을 갖고 있고 이러한 물질세계 역시 영원한 것이 아니어서, 인간들의 악행이나 훌륭한 행동에 동등한 처벌이나 보상이 이 세상에서는 충분하지 않다. 성 꾸란은 심판의 날은 반드시 오고 하느님은 인간 각자의 행위에 대한 기록에 따라 인간의 운명에 대하여 결정하실 것이라고 매우 단호하게 언급하고 있다 :

불신자들은 “그 시간은 결코 우리에게 오지않을 것이라 ”고 말하니:

말하라, “그렇지 않느니라! 주님을 두고 맹세하니 틀림없이 그것은 너희에게 다가올 것이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알고 계시는 그 분에 의하여 ……”(34장 3절)

부활의 날은 정의와 자비에 대한 하나님의 속성이 완전히 표명되는 날이 될 것이다. 영원한 천국의 기쁨이 그들을 기다려 왔다는 믿음으로 현세의 삶에서 그분을 위하여 고통 받았던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실 것이다. 그러나 다가올 삶을 전혀 개의치 않고 하나님의 축복을 악용한 사람들은 가장 비참한 상태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날은 인간들 행위에 대한 선악을 구분하며 이에 관하여 성 꾸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다:

(이들 둘이) 서로 같으냐? 하나는 우리가 훌륭한 약속을 하였고 그 약속의 이행에 다가가고 있는 자이니라,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주었으나 심판의 날 (벌받기 위해) 불려 세워질 자들 중에 있게 될 자이니라. (28장 61절)

또한 성 꾸란은 현세의 삶이 사후의 영원한 삶을 위한 준비임을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부인하는 자들은 그들의 열정과 욕구의 노예가 되어, 고결하며 하나님을 인식하는 사람들을 조롱한다. 그런 사람들은 단지 그들의 임종시간에 이르러서야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이 세상에서 더 이상의 기회가 부여되기를 간구하지만 결국 허사가 된다. 그들의 임종 시 비참한 상태, 최후의 심판 일의 공포 그리고 진실한 신자들에게 보장된 영원한 천국의 기쁨이 다음의 성 꾸란 구절에 매우 훌륭하게 언급되어 있다 :

죽음이 그들 중의 한 사람에게 이르렀을 때, “오! 나의 주님이시여, 제가 게을리 하였던 정의로운 일들을 행할 수 있도록 돌려보내 주소서, ” 라고 그가 말하니, “불가하노라 ! ” 진실로 그것은 그가 애원하는 말에 불과하니 그에게는 부활의 날까지 고통만이 있을 뿐이다. 성 꾸란 (23장 99-100절)

사후의 삶에 대한 믿음은 내세에서의 구원을 보장하여 줄 뿐만 아니라 각 개인들이 행동하는데 있어 가장 책임 있고 성실하게 행함으로써 이세상을 평화와 행복이 가득하게 만들어 준다.

그들이 사후의 삶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았던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Arabia) 사회는 도박, 술, 부족간의 불화, 약탈 그리고 살육이 그들의 주된 특성이었다. 그러나 유일신과 사후의 삶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이게 되자 곧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수양 된 민족이 되었다. 자신들의 악습을 버리고 필요 시 서로를 도왔으며 그들의 모든 논쟁들을 정의와 평등의 기초 아래에서 해결하였다.

마찬가지로 사후의 삶에 대한 부정은 내세에서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그것 자체의 중요성을 갖고 있다. 한 민족이 전체적으로 그것을 부정할 때 모든 종류의 해악과 부패가 그 사회에 만연하게 되고 종국에 가서 그 국민은 멸망한다. 성 꾸란은 아드 싸무드(Aad Thamud)와 파라오(the Pharaoh)의 끔찍한 종말을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싸무드와 아드의 민족들은 심판의 날을 부정하니, 싸무드 민족은 무시무시한 괴성에 의하여 멸망하였고 아드 민족은 사나운 폭풍에 의하여 멸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7일 밤 8일 낮 동안 계속해서 벌하시니, 너희들은 그들이 어떻게 멸망했는지 알게 되리라, 대추야자나무의 밑둥이 처참히 쓰러지듯, 너희들은 그들 중에 살아남은 누구를 볼 수 있겠느냐? …….성 꾸란(69장 4-8)

따라서 사후의 삶을 믿는 매우 설득력이 있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첫째, 모든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그들의 백성에게 사후의 삶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믿도록 촉구하였다.

둘째, 인간 사회가 이러한 믿음의 기초 위에 건설 될 때, 그것은 사회적이고 도덕적이며 해악이 없는 가장 이상적이고 평화로운 사회가 되었다.

셋째, 선지자의 반복적인 경고에도 불구하고 한 집단에 의하여 진리가 거부될 때 그 집단 전체가 현세에서도 하나님에 의하여 벌받았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넷째, 인간의 도덕적, 심미적 그리고 이성적인 능력은 내세의 가능성을 확인해 주고 있다.

다섯째, 정의와 자비의 하나님의 속성은 만일 사후에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9. 이슬람에서 인간의 권리(Human Rights In Islam)

하나님께서는 절대자이시고 우주의 유일한 주인이시기 때문에, 인류의 주님이시고, 보호자이시며 부양자이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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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바로보기   2009/05/17 17:21 추천 0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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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바로보기

1.이슬람이 칼에 의해서 널리 퍼졌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2.이슬람교 개관
3.알라(Allah)인가 알라신인가
4. 이슬람인가 마호메트교인가
5. 이슬람이 일부다처를 조장하였는가
6.이슬람은 왜 돼지고기를 금하는가


1.이슬람이 칼에 의해서 널리 퍼졌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아니다.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통된 오해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꾸란에서 이르기를:
“종교에는 강요가 없나니 진리는 암흑 속에서부터 구별 되니라” (꾸란 2:256)

이 꾸란의 절에서 하나님은 진실과 거짓을 서로 구별되게 하셨으므로, 사람들은 전자 혹은 후자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그 누구도 어떤 종교를 믿도록 강요당할 수는 없다. 믿음이라는 매우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꾸란을 따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꾸란을 믿도록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선지자 모하마드(평화가 그분에게 깃들기를)조차도 다른 사람에게 무슬림이 되라고 강요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다음의 말씀을 그에게 이르시기를:

“주님의 뜻이 있었다면 지상에 있는 그들 모두가 믿음을 가졌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대는 강요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믿게 하려 하느뇨.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는 믿지 않으며” (꾸란 10:99-100)

하나님으로부터의 이 가르침은 다른 사람들에게 믿음을 강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혹은 그녀가 실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원하셨다면, 그분은 모든 사람들을 믿는자로 만들 수도 있으시나,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선택하는 자유를 주신다. 그렇다면, 어느 누구도 힘으로 믿음을 강요당할 수 없다. 개인이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이다. 어디에 이것보다 더 아름다운 가르침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감히 어떻게 진실히 꾸란을 따르는 자가 뒤에 돌아서는 다른 사람에게 그의 믿음을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이와는 대조적으로, 꾸란은 꾸란을 따르는 자들에게 어떻게 사람들에게 진실한 신앙심을 불러일으킬 것인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지혜와 아름다운 설교로 모두를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되 가장 훌륭한 방법으로 그들을 맞으라” (꾸란 16:125)

꾸란의 어느 부분이 칼끝을 사람들에게 들이대라고 말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도(평화가 그분에게 깃들기를)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치시기를:

“백성들에게 일러가로되 이것이 나의 길이라 나와 그리고 나를 따르는 백성들은 예증으로서 하나님을 경배하나이다” (꾸란 12:108)

여기서 다시, 그러한 부름은 분명한 증거와 함께 확실한 앎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이러한 가르침들을 함께 제시하면서, 무슬림은 분명한 증거(즉 확실한 지식)로 이슬람을 보여주어야 함을 이해한다. 또한 지혜와 아름다운 설교를 사용해 믿음에 대한 증거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람들을 이성적으로 설득시켜야 한다. 어디에 감히 칼에 대한 언급이 나올 수 있는가?

캐나다의 Junior 백과사전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슬람은 세계적으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종교이다”(The Junior Encyclopedia of Canada, Hurtig Publishers, Canada, 1990, Vol. 2. p. 396)

이 현상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오늘날 누가 다른 사람을 무슬림이 되라고 강요할 수 있겠는가? 무슬림들은 눈에 뜨일 정도의 적극적인 설교에는 심지어 참여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이슬람의 품으로 들어오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이슬람은 이성적이라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Huston Simth씨는 그의 책 “세계의 종교” 256쪽에서, 선지자 무하마드(평화가 그분에게 깃들기를)가 무슬림의 지배 아래에 있는 유태인들과 기독교인들에게 어떻게 종교의 자유를 주었는지를 논의하고 있다. 선지자는 그가 직접 규정한 문서에서 “유태인들과 기독교인들은 온갖 모욕과 무례함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고 했다; 또한 유태인들과 기독교인들은 무슬림처럼 자유로이 그들의 종교를 일상생활에 실행에 옮길 수 있다”고 했다. (Huston Smith, Harper Collins의 The World's religion(세계의 종교, 1991), 256쪽에서 인용). Smith씨는 무슬림들은 이 문서를 인류의 역사에서 첫 번째 양심의 자유를 인정한 첫 번째 장이라고 여기고 있으며, 또한 계승되는 모든 무슬림 국가에서도 당국의 방식이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자, 이슬람이 칼에 의해서 전해졌는가? 이 대답을 비 무슬림인 Ira Zepp Jr의 책 “A Muslom Primer(무슬림 입문서)"에서 들어보자. ”이슬람이 `칼의 종교` 또는 '칼에 의해서 전해진 종교`로써 고정관념화 되어버렸다는 사실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역사의 진실은 이슬람의 확장이 군사적 무력이 아니라 설득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어떤 경우에라도, 이슬람은 어느 누구에게라도 강요될 수 없다; 만일 shahadah(즉 이슬람의 선서)가 누군가에게 강요되었다면, 그것은 진실한 이슬람이 될 수 없다.“ (Ira Zepp의 A Muslim Primer(무슬림 입문서),1992, Wakefield Editions, US, 134쪽)


2.이슬람교 개관

이슬람교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유일신 종교다.
서기 610년 예언자 무함마드(무하마드)가 천사 지브릴(차브리엘)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선교를 시작한 이래 아랍과 중앙아시아에서 광대한 세력을 구축했다.상대적으로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전세계 1백84개국 13억여명의 신도를 거느린 세계 최대의 종교로 성장한 이슬람교가 우리나라와 최초로 접촉한 것은 통일신라시대. 고려 · 조선시대를 통해 우리나라 문화와 과학기술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이슬람교는 15세기 중엽부터 한반도에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 후 1950년대 한국전에 참전한 터키 군인들에 의해 전파되기 시작, 현대 한국 이슬람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질적인 문화권에서 전래된 외래종교인 까닭에 잘못 전해진 부분도 많았지만 한국의 이슬람교는 한국 사회와 융화를 꾀하며 꾸준한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3.알라(Allah)인가 알라신인가

매스컴이나 책 등 각종 글에서 이슬람교에 관한 내용을 접할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 ‘알라신’이라는 명칭이다. 번역서의 경우에도 원문에는 알라(Allah)혹은 신(God)로 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말 번역본에는 ‘알라신’으로 되어 있다. 그만큼 ‘알라신’이라는 명칭은 관행적으로 널리 쓰이고 있고, 무슬림(이슬람교도)이 아닌 독자들은 그 호칭에 별다른 견해나 감흥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종교를 대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믿음(신앙)의 대상이기 때문에 이 대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는 그 종교를 올바르게 대하고 안다는, 혹은 더 나아가 공부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슬람에 대해 무지했던 옛 서구인들이 마호메트(무함맏)가 기독교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존재일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에 입각해 마호메트교, 혹은 마호메트교도라는 그릇된 명칭을 만들어냈듯이, 이슬람교가 겪어야했던 왜곡과 질곡, 그리고 매도의 시간만큼이나 그 신앙의 대상(Allah) 역시 적절치 못한 호칭으로 우리 사회에서 거론되고 있다.

어원적 의미로 본 아랍어 단어 알라(Allah)는 정관사 알(Al)과 일라(ilah)가 결합된 단어이다. 아랍어에서 일라(ilah)는 위대하고 능력이 있기 때문에 예배와 경배를 받으며 복종받는 존재하는 뜻이다.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들이 일라(ilah)라고 불리워졌으며, 무한한 능력 즉 다른 존재를 압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일라(ilah)는 보이지 않는 것, 신비한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영어의 ‘god’, 페르시아어의 ‘khuda’, 인도어의 ‘deva’, 라틴어의 ‘deus’, 한국어의 ‘하나님’ 혹은 ‘하느님’과 유사한 단어이다. 따라서 알라(Allah)라는 단어는 일견 영어의 the God와 유사한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실제로 영어로 번역된 책들 중 일부가 알라(Allah)를 the God 로 옮기고 있다. 그러나 무슬림들에게 있어 알라(Allah)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the God를 훨씬 초월한다.

무슬림들의 첫번째 신앙고백은 ‘라 일라하 일랄라(La ilaha illallah)’로 시작된다. 이 고백의 의미는 ‘오직 하나이신 위대하신 분 이외에는 일라(ilah)가 없다’이다. 모든 것을 초월하여 그 위에 홀로 영원히 존재하는 절대적인 존재, 따라서 모든 피조물들의 경배와 찬양이 되어 마땅한 지고하신 분이 바로 ‘알라(Allah)’에 담긴 의미이다.

말하라, 하나님은 단 한분이시고, 영원하시며, 낳지도 낳아지지도 않으셨으니, 그분과 대등한 것 세상에 없노라. (알 이클라스, 꾸란 112장)

그러므로 무슬림들은 God 나, Deus, khuda 등의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심오한 의미로 이 말을 사용한다.

알라(Allah)가 이처럼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임을 생각해볼 때, 그렇다면 ‘알라신’은 어떠한가.

알라(Allah)가 일견 the God 와 유사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알라신’이라는 표현은 동어반복의 오류를 범하는 명칭이다. 뿐만 아니라 무슨무슨신 이라는 명칭은 제우스신, 아폴론신, 시바신, 비슈누신 처럼 통상 다신교의 많은 신들을 지칭하는데 쓰인다. 비록 무슬림이 아니더라도 이 알라(Allah)라는 단어가 갖는 특수성과 의미를 고려한 서양의 저자들은 the God 대신 아랍어 단어 그대로 알라(Allah)를 사용했고 현재 많은 서양의 언어에서 알라(Allah)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후로 이슬람에 무지했던 우리의 많은 작가나 기자들은 알라(Allah)를 마치 특정부족이 섬기는 하나의 신의 이름인양 그것을 ‘알라신’으로 옮기는 우를 범했을 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관행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알라(Allah)’라는 말이 갖는 깊은 의미와 음악성을 고려해 볼 때 전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알라신’이라는 단어가 무슬림들의 반감을 일으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알라(Allah)’라는 단어가 무슬림들에게 찬미와 깊은 존경,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데 반해, ‘알라신’은 무슬림들을 ‘특정 부족의 원시적 혹은 다신교적 신앙’의 소유자로 전락시킨다. 그러므로 이 단어를 우리말로 옮길 때는 그대로 ‘알라’나 ‘하나님’으로 표기해야 하며, 그 외의 모든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더불어 이 홈페이지에 쓰인 ‘알라’와 ‘하나님’은 모두 동일한 개념으로 쓰이고 있음을 밝혀둔다.

(아스마 이은희)


4. 이슬람인가 마호메트교인가

기독교나, 혹은 페르시아의 옛 종교 조로아스터교등의 명칭은 각기 사람의 이름(기독교는 기독(Christ의 음차)에서, 조로아스터교는 그 창시자 조로아스터에서)에서 유래되었다. 과거 우리 사회에서는 ‘기독교’라는 명칭과 더불어 ‘예수교’라는 명칭이 통용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 예수교라는 명칭이 기독교를 격하하는 듯한 어감을 준다 하여 기독교도들에 의해 배척되어 왔다. 그렇다면 이슬람교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민중서림에서 출판된 한 국어사전을 보면 이슬람은 "이슬람교도가 자기네 종교를 부르는 말"이라고 풀이되어 있다.그렇다면 이슬람교도가 아닌 사람들은 이슬람을 뭐라고 부른다는 것인가.

이슬람의 어원적 의미는 복종과 순종, 그리고 평화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이슬람 교리의 핵심이자 어쩌면 전부라고도 할 수 있는 ‘유일신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 이 단어 안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이다. 또한 두번째 의미 ‘평화’란, 작게는 개인이나 가족, 공동체의 평화부터 크게는 전인류, 전 우주의 평화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무슬림(이슬람교도)들은 언제나 이 쌀람(‘샬롬’과 어원이 같다)으로 인사를 주고 받는다.

이슬람 교리에 입각해 살펴보면 유일신(Allah, the God, 하나님, etc.)은 모든 것을 초월한 절대적인 존재이다.(글 '알라인가 알라신인가' 참조). 따라서 무슬림이 하나님의 사도로서 동등하게 믿는 이브라힘(아브라함), 무사(모세), 이사(예수), 무함맏(마호메트) 등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그분의 뜻에 순종했던 사도이기에 깊은 존경을 드리는 것이지, 결고 그 사도들 자체가 신앙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성했던 이슬람세계와 오랜 역사에 걸쳐 대치해 온 서구 기독교 세계는 이슬람을 거친 사막 유목민들이 지닌 샤머니즘적인 종교인양 왜곡을 거듭해왔다. 이같은 왜곡과 매도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가는 다른 글들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이 글에서 우선 밝히고자 하는 것은, 이슬람은 ‘마호메트교’가 아니라 ‘이슬람’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마호메트(무함맏)는 하나님의 사도일 뿐, 그 분 자체가 신앙의 대상은 아니며, ‘유일한 신(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 이슬람의 근원이자 본질임을 생각할 때, 마호메트교라는 명칭은 이슬람을 격하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슬람의 근원을 왜곡하는 명칭인 것이다. 따라서 이슬람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는 그 첫작업은 ‘이슬람’이라는 올바른 명칭의 사용과 그 인식으로부터 시작될 수 밖에 없다.

(아스마 이은희)



5. 이슬람이 일부다처를 조장하였는가

이슬람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종교적인 문제에 관한 것을 제외하고 어떤 현상이나 제도, 사건에 대한 일반적인 사람들의 편견이나 선입관은 대부분 한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슬람과 그 사회제도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상당부분 이슬람과 아랍, 혹은 이슬람과 그 지역을 지나치게 동일시하는 데서 온다는 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슬람의 관습(혹은 제도)라고 생각하는 일부다처제는, 사실 이슬람의 일부사처가 아니라 인류의 오랜 역사에 걸쳐 거의 모든 곳에서 자행되어왔던 일부다처제이다.
이슬람에서 말하는 일부사처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1. 일부사처는 권장 사항도 아니고, 의무 사항은 더더욱 아니라는 사실. 꾸란에서는 일부일처를 최선으로 보고 있고 있으며 현재 무슬림 중 2%도 채 안되는 사람들만이 둘 이상의 부인과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무슬림이 일부다처를 할 수 있고 또 하려고 한다고 믿고 있으며 이것은 이슬람의 여성관을 왜곡하는데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2. 일부사처는 전쟁뿐 아니라 그 외에도 까다로운 제약조건을 두고 있어, 그 내용과 원칙 측면에서 볼 때 남성의 성적 충족(축첩)을 위한 장치가 아닌,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라는 점. (성욕을 위해 일부다처를 행하는 것은 이슬람에서는 죄악시한다는 점. )

3. 어느 종교든, 어떤 사회이든 항상 법이나 제도를 잘못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는 법이다.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차선책으로 제시하는 일부사처를 자신의 성적 욕구 충족을 위해 악용하는 일부 무슬림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특히 돈과 권력을 쥔 사람이 그런 경우가 많다. 그러나 종교를 가진 모든 사람이 그 가르침에 충실히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에 해당되는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이슬람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들이 과장되어 있고 잘못 알려져있으며 또한 부정적인 부분들만이 유난히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

일부사처를 행할 수 있는 조건은 다음과 같다.

전쟁이나 기타 재난 등으로 인해 남성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을 때 : 이슬람에서는 남녀 모두의 성욕을 합법적 절차를 통해 적절히 해소되어야할 것으로 본다. 따라서 사회 문란이나 사생아 출산 등을 초래할 수 있는 간음을 엄격히 금하고 있으므로 이같은 경우 일부일처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으므로 또다른 완충 장치가 필요하다.

첫번째 아내가 질병으로 인해 정상적인 부부관계 유지가 불가능한 경우.

첫번째 아내가 불임이나, 부부 중 어느 한 사람이라도 아이를 원하는 경우

다른 어떤 여성이나 고아들을 돌보아주어야할 필요에 의해 결혼을 하는 경우 : 예를 들어, 94년에 이집트에서 이런 경우가 있었다. 한 학자가 자신의 은사가 사망을 하고 난 뒤 그 사모님과 자녀들이 물질적으로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음을 알고 그들을 돕기 위해 그녀와 법적 결혼을 하여 자신이 돌보아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경우에 있어 이미 혼인 중에 있는 부인들의 동의가 없이는 다른 부인을 맞이할 수 없으며, 이슬람에서 보장하는 여성의 권리로 인해 부인은 자신의 권리가 침해되고 무시당했다고 여겨질 때 이혼을 요구할 수 있다. 부인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중혼은 위법이다.

또한 둘 이상의 여성과 중혼을 한 경우 남성은 부인들에게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완전히 동등한 대우와 처우를 해주어야한다. 그러나 이 동등한 대우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므로 꾸란에서는 한쪽에 치우친 여성들로 만들지 말라 는 말씀과 함께 일부일처가 최상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1부 4처는 엄격한 조건과 제한 설정으로 인해 사실상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행해지지 않는 하나의 완충장치에 불과한 것이나 일부 사람들은 이를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악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분명 이슬람에서 말하는 완충장치로서의 일부사처는 남성의 성욕 충족을 위한 축첩제가 아니며, 그같은 축첩제는 이슬람에서 엄금하고 있다.

이슬람의 모든 제도나 규정들은 서로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따라서 하나만을 따로 떼어놓고 볼때에는 이해하기 힘든 것들도 그 컨텍스트 안에서는 이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이 점을 이용해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의 여러가지 규정들을 분리하여 곡해하거나 왜곡시키고 있는데 이점은 충분히 경계를 하여야 한다.

또한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슬람의 1부4처는 제도화된 장치가 아니라 특수한 상황하에만 엄격한 제약하에 행할 수 있는 ‘완충장치’이므로 일번적으로 쓰이는 ‘일부다처제’라는 단어는 이 글에서 사용하지 않는다.

(싸나 박정순, 아스마 이은희)



6.이슬람은 왜 돼지고기를 금하는가

1. 머 리 말
이슬람교도가 아닌 사람들은 흔히 "이슬람교도(무슬림)는 왜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가?" 하는 질문을 한다. 이러한 질문이 나오게 되는 까닭은 현대인은 복합적인 문화사회와 종교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과 또한 대부분이 이슬람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은 또 현대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이슬람교도들이 이슬람을 그릇된 색채로 도장함으로써 빚어지는 심각한 오해 때문이기도 하다.

편견 없이 허심탄회하게 이슬람을 대하는 사람에게는 그 참뜻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슬람은 가장 과학적이고 이성적이며 실천적인 종교이다.

이슬람은 교리의 실천가능성을 강조하며 단순히 마음의 믿음에만 그치는 것은 하등 실천성이 없는 것으로 본다. 예언자 무함마드(P.B.U.H)은 말하기를 "다만 믿는 것으로 그치고 이를 실천하지 않는 자는 이슬람에는 있을 수 없다고"하였다.

무슬림이라면 자기의 신앙을 실천에 옮겨야하는 것이며 그것을 과학적으로 재현함으로써 이슬람교도가 아닌 사람들이 이슬람의 교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되는 것이다.

이슬람교에 대한 교인과 교인 아닌 사람들 사이의 무지와 완고의 암우를 걷우게 하기 위하여 과학적이고 이지적 증거를 제시함으로써 "무슬림은 왜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가?"라는 의문을 의학적, 도덕적 견지에서 다룬 중국 이슬람 지도자인 "하지 이브라힘 마천영"의(현 말레이지아에 살고 있음)글을 번역 출판하는 바이다.

2. 위생학과 순결성

이슬람교에서 돼지고기를 금식시키는 이유는 위생학적인 면과 인품의 순결을 지키도록 하기 위한 조처인 것이다.

우선 청결한 생활을 하도록 가르치고 있는 이슬람을 알아보기로 하자.

첫째―이슬람은 영혼의 순수성을 역설하고 있다. 이것을 양심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으나 "영혼의 순수성"은 양심과 구별된다.

둘째―이슬람은 과격하지 않은 운동을 가르치고 있다. "이슬람의 5주"의 하나인 예배는 가장 훌륭한 형태를 가춘 과격하지 않은 육체운동이다. (주:이슬람의 5주란―이슬람의 5대의무―즉 다섯가지 실천사항을 말한다. (1)"알라(하나님)외에 신은 없다.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이다."라는 유일신 신앙의 고백을 하고 (2)예배 (3)회사 (4)단식 (5)순례를 한다.

과학은 위생학에는 힘을 기울이고 있으나 도의심의 향상이 되는 인생수양의 중요성은 이를 등한시 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물질주의에만 주력하고 정신주의는 망각하고 있다. 물질주의와 인생수양의 향상―이 2가지 목적의 병행이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과학과 철학이 이를 등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임시적인 것이며 언젠가는 햇빛을 보게 되리라고 믿는다.

현재의 위생학은 피상적이고 물질주의적이다. ― 인간의 내재적 자질개발은 물질과 정신 양면에서 진행시켜야 한다.

3. 이슬람은 정서를 다듬어 준다.

어느 종교이든 다 그렇지만, 이슬람은 훌륭한 인격과 도덕에 많은 힘을 쓰고 있다. 이슬람은 성선설을 가르친다.

"사람의 선악은 생후 배워서, 죽 사회에 적응하면서 그 주의환경에 영향을 받아 선악이 가름 되며 태어날 그 당시만은 결코 선한 것이다."라는 맹자의 사상은 이슬람과 견해를 같이 한다.

과거 중국 초등교과서에서 중국 어린이들에게 무엇보다 먼저 가르친 것은 "인간은 결백하게 태어났으나 환경에 따라서 선하게 되기도 하고 악하게 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선악은 교육과 환경에 따라서 자라나는 것으로서 맹자의 가르침과 이슬람교에서의 이에 대한 차이점은 이슬람은 덕을 쌓는 방법과 선악을 행하지 않게 하는 방법을 가르치는데 있다.

인간에게는 식(食), 숙(宿), 성(性)의 3대욕망이 있다. 또한 행복, 노여움, 비애, 사랑, 공포, 증오, 허욕의 감정을 지닌 고등동물이기도 하다. 허욕은 소유욕의 본능에 의해서 생긴다.

욕구불만은 시기심을 자아내고 시기심은 질투로 발전한다.―인간에게 생명이 있는 한 감정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므로 이슬람은 이 일곱 가지 감정의 소멸을 주장하지 않고 그 통솔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은 마치 차량의 모―터와 같은 것이어서 이것을 잘 운전함으로써 목적지로 몰고가는 것은 운전사에 달려 있다. 교육, 특히 종교 교육은 그 운전자의 역할과 같다.

4. 음식물의 선택

이슬람에서 돼지고기를 금하는 것은 물질주의적 교육의 제일보라 하겠다. 이 제일보는 결백한 인간성의 수양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깊이 이해시켜주는 방향으로 인간을 선도한다.

육체의 피는 생명의 흐름이며 먹는 음식이 피가 되는 것이므로 음식과 음료를 잘 선택하여야 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문화수준이 높은 사람일수록 음식 선택에 세심하다. 과거의 아프리카 미개인들은 식인종이었다.

말레이시아 원주민과 북부 보르네오에도 음식 선택을 할 줄 모르는 인종이 있다. 그들은 뱀, 굼뱅이, 쥐 할 것 없이 손에 잡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먹는다. 소위 인도의 불가촉천민들도 음식을 선택하지 않고 아무것이나 먹는다.

그러나 그들이 문화수준에 도달하면 음식을 골라먹기 시작한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인간은 문화수준이 높을수록 음식물을 골라 먹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슬람은 자연사한 동물의 고기와 소, 양, 닭을 막론하고 싸우다 죽은 동물의 고기를 먹지 않도록 금한다. 과학자들이 싸우다 죽은 동물의 피나 고기에 대하여 연구해본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무슬림은 이런 고기를 먹지 말도록 교육 받아 왔다.

왜냐하면 생리학적인 면에서 독이란 악의 요소가 응결되어 있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슬림은 또한 사자, 호랑이, 표범, 뱀, 고양이, 개, 쥐, 따위의 고기를 먹지 않는다.

이런 고기를 먹지 않는다. 이런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인간의 성격의 정화에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 까닭은 음식물은 창자로 들어가서 배설물이 되기 전에 뇌를 포함한 신체 각 조직에 흡수되어 신진대사를 하는데 그것이 인간의 성격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은 깨끗한 고기를 먹도록 가르치며 채식주의를 방지하지도 않고 권장하지도 않는다. 다만 고기를 먹을땐 골라 먹으라는 것이다.

현대의 돼지는 깨끗한 먹이로 기르고 있으므로 돼지 고기를 먹어도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깨끗하고 영양분이 많은 먹이나 아무리 깨끗한 먹이로 길렀다 해도 돼지의 성질까지를 변경시킬 수는 없는 것이며 돼지는 역시 돼지일 뿐 나무처럼 접목을 해서 그 성질을 변경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5. 돼지의 습성

돼지는 성질이 게으르고, 햇빛을 싫어하고 투지가 없다. 돼지는 거의 무엇이든 닥치는데로 먹는다. 모든 육류 중에서 해로운 병균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돼지고기다.

돼지고기는 또한 질병의 매개체이다. 돼지고기가 식용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6. 돼지고기에 대한 고대 중국의 견해

중국의 유명한 생명학자인「탕야쇼」는 "돼지는 죽는 순간에 공포심이 심장으로 들어가며, 짐승은 죽을 때 마지막 숨(호흡)이 담으로 들어간다."고 여기 인용한 글은 공포심에 관한 것으로서 동물은 죽을 때 마지막 숨이 심장과 담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지적한 것인데 과학자들이 이것을 긍정하지 않을는지 모르겠으나 이 학자는 보통의 학자가 아니었다. 거기에는 무슨 이유가 있음에 틀림이 없다.

당나라 때의 "마오 순시"는 위대한 의학자였다. 재상벼슬을 마다하고 받지 않았으며 그의 사후 천년동안 그를 따를만한 사람이 없었던 위대한 의학자이자 위생학자로서 100세까지 살았다. "건강의 기록"이라는 저서에서 그는 "돼지고기는 묵은 병을 재발케 하고 류마치즘(신경통)과 해소병을 기른다"고 했다.

이분의 학설은 현대 과학자들도 시인하고 있다. 여기에 예를 든 것 외에도 돼지고기는 인체에 해롭다는 논증이 많이 있다.

7. 돼지고기에 대한 현대의 견해

돼지고기를 먹으면 기억력이 쇠퇴하고 머리 카락이 빠진다. 돼지고기는 대머리의 원인이 되고 기억력의 쇠퇴를 초래한다는 것은 현대과학이 규명한 바이다.

돼지고기를 파는 푸주간 사람들은 대개가 비대한 것을 볼 수 있는데 비대하다고 반드시 건강하다는 증거는 아니다.

이것은 항상 돼지고기를 만짐으로서 돼지고기가 전해오는 병의 결과일 수도 있다.

"그렌 쉐퍼드"(Dr. Glen Shepherd)는 1952년 5 월 31일자 "워싱톤 포스트지"에 실린 글에서 돼지고기를 먹는데서 오는 위험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미국과 캐나다의 6명중의 1명이 선모충병균을 보유하고 있는 돼지고기를 먹음으로서 근육에 병균을 보유하고 있다.

이 병균 보유자들은 증세가 눈에 띄지는 않는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짧은 시일 내에 치료가 되지 않으며 때로는 생명을 잃는 수가 있고 병신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조심하지 않고 돼지고기를 먹는데서 오는 것이다. 이 병은 면역이 되지 않으며 치료법이 없다. 이 아주 조그마한 무서운 병균을 예방하는 항생제도 약도 주사도 없다. 오로지 예방만이 유일한 치료방법인 것이다.

성장한 선모충병균은 길이 1/8인치, 폭 1/400인치이다. 수명 40년으로 근육세포 사이에서 번식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병균이다. 이병에 감염된 돼지고기를 먹으면 그 병균도 함께 소화되어 세균으로 자  1마리가 1,500마리의 새끼를 낳아 2 ∼ 3주 후에 혈액으로 들어간다. 돼지고기를 소금에 절인다던가 불에 굽거나 해도 병균은 죽지 않는다.

도살장에서 잡아서 포장하면 깨끗하다고 생각하기 쉽겠으나 아무리 관이 검사를 잘한다 해도 병균을 보유한 돼지고기를 가려낼 수가 없는 것이다.

위의 전문가의 보고서에서 알 수 있듯이 선모충병균이 보유여부를 보증할 방법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돼지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일종의 도박행위이며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노릇이라 하겠다. 1967년 1월 "이슬람 리뷰지"(Islamic Review)에서 "모함맏 쟈퍼"(Dr. Mohd. Jaffer) 박사는 현대적 연구방법에 의해서 발견한 돼지고기가 보유하는 16가지의 해로운 병균을 열거한바 있었다.

그가 1936년 "카이로"대학 의과대학을 방문했을 때 실험관 속에 담은 10피드나 되는 조충을 의과 과장이 내보이며 "이것은 중국산이오"하므로 "쟈퍼"박사는 당혹 하면서 "왜 하필이면 중국산을 특정참고로 하는

것이오"하고 반문하니 그 대답은 이러했다.

― "중국은 세계에서 돼지고기를 가장 많이 먹는 나라이며 조충 환자가 세계에서 돼지고기를 가장 많이 먹는 나라이며 조충 환자가 세계에서 제일 많으오. 돼지가 감병의 매개체인 선모충과 장균이 가장 많은 곳도 중국이오. 그래서 딴나라에서는 회충표본을 중국에서 사오는 것입니다."

8. 유럽인과 돼지고기

독일 사람은 그렇지도 않지만 구라파인, 미국인, 호주인은 돼지고기를 잘 먹지 않고 쇠고기를 많이 먹는다. 이태리는 "로마 카톨릭 국가"라 할 수 있는데 냉장시설이 생기기전의 현대에는 5월∼8월 사이의 돼지고기 판매를 금했었다.

다른 구라파 국가에서도 그랬던 일이 있었고, 불란서는 이 기간동안 굴을 먹지 못하게 하고있다. 영국도 돼지고기에 대해서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다.

사람들은 「R」자가 끼지 않은 달에는 돼지고기를 사고 팔지 못하게 제도를 만든 모양이어서, 5월(May), 6월(June), 7월(July), 8월(August)달에는 돼지고기를 사고 팔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것은 돼지고기가 해롭다는 주의를 환기시키는 증거라 하겠으나, 그 이유에 대한 깊은 지식 없이 그렇게 정했을 뿐이었다. 구라파 여러 나라들이 이달 중의 육류 매매를 장려하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돼지고기를 많이 먹지 않는 것은 구라파인들만이 아니라 한국 사람들도 그렇고 이웃 일본에서도 돼지고기를 비교적 적게 먹는 사람이 많다.

-고기의 실험

나이가 같은 돼지, 양, 소의 고기를 각각 햇빛에 놓고 볼 때 돼지고기가 먼저 썩고 다음이 양고기고 쇠고기가 맨 나중에 썩는다. 그 시간 차이는 약 1시간 씩이다. 쇠고기는 썩지 않고 말라버리는 수도 있다. 그리고 후라이판에 이 3가지 고기를 넣고 요리를 만들면 돼지고기가 제일 나중에 익는다.

뿐만 아니라 익은 돼지고기에 해로운 병균이 있는지 보증할 수가 없다. 의학적 연구 결과에 의하면 양고기와 쇠고기는 사람의 뱃속에서 소화되는 시간이 3시간이 걸리고 돼지고기는 4시간이 걸린다.

사람이 음식을 입에 넣기 전에 음식물을 구별하는 방법을 여러모로 가르치고 있다. 모든 동물 중에서 인간만이 본능적으로 음식을 구별할 줄 모른다. 그래서 영양학의 수준이 가장 낮다.

일반 동물은 취각을 이용할 줄 안다. 인간을 취각이 매우 발달해 있으므로 이를 활용해야 마땅하다.

식물 중에는 먹을 수 있는 것이 많다. 약초도 있고 독초도 있다. 고기도 사람에게 해로운 고기가 있는 것이다. 돼지고기도 말하자면 사람을 즉사시킬 정도로 독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독소가 잠재해 있다는 것은 고령의 과학자들이 증명한 바 있다.

돼지고기는 다른 고기만큼 자양분이 많지 않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병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리라. ―"중국 사람은 먼 옛날부터 오랜 세대 동안 돼지고기를 먹어왔다. 돼지고기는 국민의 양식이며 돼지고기를 먹고 살아 왔어도 세계에서 인구가 제일 많다"고 그러나 중국 국민은 부득이 채식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중국 총인구의 80%를 차지하는 농민은 돼지고기를 1년에 한 3번 정도밖에 먹지 못한다. 그 세 번이란 설날, 단오절, 추석이다. 그러니까 과거의 중국 농민은 1년에 돼지고기 3근 밖엔 먹지를 못했었다. 그것도 현재의 공산치하에서는 1년에 1근을 넘지 못하고 있다.

중국 사람이 주식물의 하나가 두부다. 파, 마늘은 북부 중국인의 건강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돼지고기가 중국 사람들의 주식물의 하나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나 매일 먹는 음식은 아니다. 중국 사람은 돼지와 돼지고기에서 전염되는 질병에 걸려있다고 말하는 의사들의 보고는 진실이다.

그러나 이제 시대는 바뀌어졌다. 중국인은 무지해서 돼지고기를 먹어 왔었으나 현대과학은 돼지고

기가 비위생적이라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 음식물을 바꿔야 할 일이다.

중국 무슬림가 비무슬림(비교도), 중국인을 비교해 보면 무슬림이 귀가 2인치 크고 훨씬 건강하다.

비교도 중국인들이 일찍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딴 고기를 먹어 왔더라면 오늘날의 그들 육체적 조건이 타민족 보다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며 수신재가치국평천하의 가르침을 성취하였을 것이다.

독자들이 "이슬람은 왜 돼지고기를 금하는가?"에 대한 여러 가지 실예를 읽고도 아직도 속이 후련하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더 말할 길이 없겠으나 다음의 쿠란 구절을 읽어달라고 부탁하는 수밖에 없다.

야담이지만 한국 동란 때 우리나라에 주둔했던 토이기 군인들(이슬람 교도였다)은 유엔군에서 받은 보급품 속에서 돼지고기 통조림은 땅을 파고 묻어 버렸다고 한다.

9 . 무슬림은 교리에 복종한다

무슬림이 자신을 무슬림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무슬림은 쿠란과 "무함마드의 어록을 성실하게 믿기 때문이다. 쿠란에 신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

"오! 인간이어, 땅위에 있는 것 중에서 먹어도 되는 깨끗한 것을 먹도록 하라. 그리고 사탄의 발자취를 밟지 말도록 하라. 진실로 사탄은 너희의 공공연한 적이니라."(쿠란 2:68)

"알라께서 너희에게 먹지 말도록 금하는 것은 사육(죽은 짐승의 고기), 피, 돼지고기와 잡을 때 알라의 이름으로 잡지 않고 다른 이름을 부르고 잡은 것뿐이니라.

그러나 먹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 먹은 게 아니라던가 알라(하나님)에게 죄지을 생각으로 먹은 게 아니라, 할 수 없어서 먹었을 경우에는 죄가 되지 않느니라."(쿠―란 2:173)

이 쿠―란 구절은 조물주(알라)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모든 무슬림은 이에 무조건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무슬림이 교리에 복종함은 군인이 군에 무조건 복종하여 국법에 순종함과 같은 것이다.

이 쿠―란 구절에 "할 수 없이 먹었을 경우에는"이라는 말씀이 있다. 즉 다시 말해서 기아상태에 있을 때 돼지고기이외의 다른 음식물이 없을 시 이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돼지고기를 먹도록 총칼로 위협을 한다면 불가피 이를 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슬림이 우상숭배를 강요당했을 경우 무슬림은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

무슬림이 자존심을 버리고 돼지고기를 먹는다면 그는 주의주장의 신념이 없는 가치 없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한 무슬림은 파렴치하고 죄 많은 무슬림이 되는 것이다.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도 일반적으로 돼지고기를 먹는 무슬림을 경멸하다.)

무슬림이 할 수 없이 강제에 못 이겨 돼지고기를 먹었을 때는 죄가 되지 않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 돼지고기를 먹으면서도 무슬림이라 자처하는 사람은 큰 죄를 짓고 있음을 명심하기 바란다.

힌두교도들이 쇠고기를 먹지 않는 것과 무슬림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그 성질이 다른 것이다. 힌두교도는 소를 신성시 하지만 무슬림은 돼지를 멸시한다.

내가 1943년 12월과 1967년 10월 가족과 함께 "칼캇타"에가 있을 때 "벵갈" 지방에서 수 천명의 피난민들이 기아에 허덕이는 것을 내 눈으로 본 일이 있는데 수많은 피난민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 한편에는 임자 없는 성우(聖牛)들이 거리와 언덕을 메우고 있었다. 성우들도 아사지경이었다.

(1967년도 인도에는 늙은 소의 수효가 9,400만 마리였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소에 손을 댈 생각을 하는 사람도 없고, 소를 잡아서 인명을 살리거나 최소한 소를 팔아서 쌀이나 밀을 사들이자고 제창하는 사람이라곤 없었다. 전 세계 소의 ¼이 인도에 있다 한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이슬람교만이 아니라 유태교에서도 먹지 않는다.

쿠란 구절의 "땅 위에 있는 것 중에서 먹어도 되는 깨끗한 것을 먹도록 하라"외 "사탄의 발자취를 밟지 않도록 하라"는 두 구절은 전연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느껴지리라. 그러나 이 두 구절을 심사숙고하면 두 구절의 깊은 뜻을 알 수 있다. 이 구절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자연이 연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 취하는 것을 마시지 말라. 하는 쿠란 구절은 내적 표현인 동시에 외적 표현인 것이다. 이 양면표현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것을 이해하느냐 못하느냐는 각자 읽는 이에 달렸다.

회의에 대하여 예언자 무함마드(P.B.U.H)은 이렇게 말했다.

:"합법성 여부에 대하여 회의를 품게 될 땐 너의 내부의 소리에 물어보라.
"이것은 인간의 양심이 합법적인 것과 불법적인 것을 구별한다는 뜻이다.

무슬림은 쿠란이 조물주의 말씀임을 공언한다.

출처:http://www.koreaislam.org/data/d7.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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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해서 잘 사는 것이 최고의 길입니다.   2009/04/27 22:17 추천 0    스크랩 0
http://blog.chosun.com/malaykorea/3895663
 
이주해서 잘 사는 것이 최고의 길입니다.

그러나 해외로 떠난 분들이 성공하는 경우도 있지만 실패하여 재산을 처분하여 가져간 돈을 다 까먹고 돌아오는 사례도 부지기수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주를 잘못 하면 패가망신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입니다. 이주의 성패는 한국을 떠나기 전에 준비를 얼마만큼 잘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주를 준비하는 분들에게 해외에서 살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합니다. 정확한 정보없이 준비를 안하고 떠나게 되면 재산 모두를 까먹게 됩니다. 이주시의 가장 중요한 것이 어떻게 하면 돈을 적게 잃고 현지에 정착하는 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항상 하는 이야기가 말레이시아 이주시의 가장 많은 비용이 지출되는 것이 "주거비용"과 "아이들 학비"와 "차량비용"입니다. 위의 3가지만을 잘 통제한다면 해외 이주의 반은 성공하게 되는 겁니다.

여유가 있다면

첫번째, 저렴한 콘도를 사서 입주를 하면 주거비용을 해결하게 됩니다. 몇년전만해도 많은 이주자들이 말레이시아에 집을 구입하지를 않았습니다. 보편적으로 집가격이 오르지를 않았고 내리는 경우가 많아 집을 사면 팔때의 문제가 생겨 구입을 안했으나 지금은 조금만 여유가 있다면 대출을 껴서라도 집을 삽니다. 대부분의 집가격이 오르기 때문입니다. 여유가 많아서 KLCC중심가에 투자는 못한다해도 저렴한 콘도는 꼭 구입하시기 바랍니다.

두번째, 아이들 학비 문제에 심사 숙고 하시기 바랍니다. 말레이시아는 저렴한 학비로 다닐 수 있는 곳과 비싼 학비를 내는 곳이 정해져 있으나 말레이시아 이주를 해서 처음 1~2년은 학비가 적은 곳을 심사숙고하셔서 정하시기 바랍니다. 추후, 본인이 잘 정착된 후에 아이의 학교를 옮겨도 늦지 않습니다.

세번째, 한국사람들이 좋아하는 고급차량, 처음부터 욕심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말레이시아에 와서 할부차보다는 자신의 상태에 맞게 현찰차를 구매하도록 해야 합니다.

위의 3가지만을 잘 콘트롤한다면 이주해서 잘 사는 길로 접어 드는 겁니다.

새로 이주하는 분들의 말중에, 말레이시아 교민들 잘 사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고? 합니다. 해외에서 잘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든 줄 모르시기에 하시는 말들입니다. 역설적으로 오래 사는 분들은 잘살지는 못해도 한국에서 오시는 분들처럼, 빚은 없습니다. 준조세 성격의 돈이 안나갑니다. 그래서 없는 듯해도 다들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어려웠던 분들은 빚이 없다면 살아가는게 얼마나 수월한지를 알 겁니다. 조금만 벌어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새로 이주하시는 분들은 사는 방법을 줄여서라도 빚없이 사시기 바랍니다.

해외 이주 잘 사는 것은, 많이 버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얼마나 적게 쓰는가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말레이코리아 닷컴]
Daum 블로거뉴스로 보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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