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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 개자식들 - 독일군 - 을 도륙하자"란 구호로 "Old Blood and Guts"란 타이틀을 얻었던 패튼이었지만 전후 군정책임자 재임시에는 패망한 독일인들에 대한 배려로 자주 워싱턴 정부와 충돌했다.
GEORGE S. PATTON
“모든 독일인을 상대로 모겐소와 바룩이 퍼뜨리는 유대적 복수의 바이러스가 아직까지 맹위를 떨치고 있다. 해리슨(국무성 관료)과 그 일당은 DP(Displaced Person, 수용소에서 풀려난 유태인)들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독일사람들을 그들의 집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엔 두 가지 오류가 있다. 첫 번째로, 독일인 개인을 집에서 내쫓는 것은 한 개인에 대한 처벌로 이것은 우리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아무런 합당한 법적 절차도 없이 집주인에게서 집을 빼앗는다는 것은 나의 앵글로색슨 양심에 위배된다. 두 번째로, 해리슨과 그 일당은 DP가 무슨 인간쯤이나 되는 줄로 알고 있는데, 사실 놈들은 인간도 아니다. 특히 짐승만도 못한 것들인 유태인은 더욱 그러하다.”
미국의 원조 주류 출신인 패튼의 유태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변하지 않았다. 아이젠하워의 재촉으로 그와 함께 유태교 회당 예배에 참석한 그는 1945년 9월 17일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그 날은 무슨 욤키푸르인가 하는 날이었다. 그래서 유태인들은 그들이 시나고그라고 부르는 큰 목조 건물에 모여 있었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그들에게 연설하는 것이 무슨 대단한 영광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시나고그에 들어섰을 때 그 곳에는 내가 이 전에 본 적이 없는 고린내 나는 인간들이 모여 있었다. 설교단 쪽으로 반쯤 걸어갔을 때 옛날 영국의 헨리 8세가 썼던 것과 비슷한 털모자를 쓰고 잔뜩 자수가 놓여진, 아주 더러운 서플리스(surplice)를 입은 수석랍비가 내려와 우리를 맞았다. 그 자에게서 풍겨 나오는 심한 악취 때문에 나는 거의 기절할 뻔 했는데, 세 시간이 지난 뒤에도 그 냄새가 떠올라 점심을 먹을 수가 없었다.”

북아프리카 전선의 패튼
뉘른베르크 재판에 대하여 부인에게 보낸 1945년 9월14일자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난 솔직히 이 무슨 전범재판이니 하는 것들에 반대하오. 이것은 우리가 아니라 유태인들이 벌이는 일이오. 나는 또 독일군 포로들을 외국에 노예로 보내는 것에 반대하오. 그 곳에서 그들은 혹사당하다가 굶어죽을게 분명한데 말이오.”
마음속으로는 모겐소플랜으로 대표되는 전후 독일에 대한 워싱턴의 가혹한 정책에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패튼은 본국에서 하달되는 지시사항들을 충실히 이행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독일인을 최대한 배려하려 애쓰는 태도 때문에 그는 아이젠하워와 같이 정치적인 야심을 지닌 장성들과 자주 충돌하게 되었다. 부인에게 보낸 또 다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민간정부회의 때문에 프랑크푸르트에 다녀왔소. 만약 지금 우리가 독일인들에게 하고 있는 짓이 ‘자유’라면 차라리 나는 죽음을 택할 것이오. 어떻게 미국인들이 이렇게 낮은 곳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모를 일이오. 나는 이 모든 일이 유태인들 때문이라 확신하오.”

전후 연합국 군정은 독일군 포로를 프랑스와 소련에 강제노동 인력으로 제공했다. 특히 소련에 넘겨진 60만명 중 살아서 독일에 귀환한 포로는 약 10만명에 불과했다.
그는 또한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오늘 유태인들을 위해 특별 거처를 마련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만약 유태인을 그렇게 대접해야 한다면 카톨릭이나 몰몬교도는?... 우리는 지금 강제노역에 동원될 독일포로들을 프랑스에 보내려고 한다. 인권을 지키기 위해 독립전쟁을 치렀고 노예제도를 폐지하기 위해 남북전쟁을 치렀던 우리가 어떻게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두 가지 원칙을 다 져버렸다.”
폐허가 된 베를린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 그는 1945년 7월 21일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베를린을 돌아보니 우울한 기분이 들었소. 우리는 괜찮은 한 민족을 몰살하고 그들을 소련의 공산주의 야만인들로 대체하려 하고 있소. 이제 유럽은 전부 공산주의자들의 차지가 될 것이오. 듣자하니 베를린을 점령하고 1주일 동안 소련놈들은 도망치는 여자들은 쏴죽이고 도망치지 않은 여자들은 모조리 겁탈했다고 하오. 만약 정부가 허락했다면 소련군 대신 내가 베를린을 점령했을 수도 있었는데 말이오.”

1945년 베를린
애초부터 이 전쟁이 잘못된 것이었다는 생각은 그 후로 그의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8월의 어느 날, 프랑스의 Alphonse Juin 장군과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패튼은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가 자신 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8월 18일 일기에 그는 다음과 같은 주인 장군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Alphonse Juin
“각하, 미국과 영국이 유럽에서 제대로 된 유일한 국가를 잿더미로 만들어 놓은 것은 진정 불행한 일입니다. 물론 나는 프랑스를 얘기하는게 아닙니다. 이제 소련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 후 그가 쓴 편지와 일기들에는 같은 시각이 드러나 있다. 8월 31일, 일기에 그는, “사실, 유럽에 남은 제대로 된 사람들은 독일인이 유일하다. 소련과 독일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면 나는 독일을 택했을 것이다”, 9월 2일에는 이렇게 썼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짓은 독일을 파괴하여 소련이 집어 삼킬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한편 미국에서는 전후 동구권의 공산화와 관련하여 소련에 대한 트루먼 행정부의 지나친 유화정책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워싱턴과 언론의 유태인 유력인사들은 패튼을 다루기 힘든 인물로 인식하고 그의 대중적 위상을 깎아내려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 후 미국의 주요언론은 온갖 구실을 들어 패튼을 집중 공격했다. 그가 나치 동조자이며 유태인 병사를 모욕한 전력이 있다는 근거 없는 기사들이 매일같이 주요 일간지들의 머리기사를 장식했다. 본국 언론의 독기서린 공격에 대해 그는 일기장에 이렇게 쓰고 있다:

유태인 용공언론인 월터 리프먼; 그는 패튼을 비롯하여 워싱턴의 對소련 유화정책에 동조하지 않았던 미군장성들에 대한 공격을 주도했다.
“지금 언론에 유태인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는게 분명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미국의 좌경화이고, 두 번째는 독일계 등 비유태계 미국인을 사회에서 몰아내는 것이다. 그들은 정의에 대한 앵글로색슨적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누군가가 누구를 나치라고 손가락질하면 그 사람을 집에서 내쫓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정당한 사유와 법적절차 없이는 누구도 쫓아낼 수 없다는 내 말에 그들은 경악했다... 언론이 또한 집요하게 따지고 드는 것은 내가 독일인을 배려하기 위해 유태인이 대부분인 DP들을 홀대 한다는 것이다.”
10월 22일, James G. Harbord 소장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에 그는 이렇게 썼다: “정부와 언론에 있는 유태인과 공산주의자들이 나를 비롯한 거의 모든 장성들에 대해 늘어놓는 거짓말들에 분통이 터지는 것은 나 역시 장군과 마찬가지입니다. 내 생각에 그 자들이 원하는 것은 병사들과 그들의 지휘관을 이간질 시키는 것입니다. 병사들이 공산주의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들은 1100만명의 미국 군인들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 George S. Patton Papers
패튼은 1945년 12월 21일 군용트럭과의 충돌사고로 사망했다.


DOUGLAS MACARTHUR
전후 미국정부와 언론의 시온주의 세력이 두려워 했던 또 한 명의 전쟁영웅은 맥아더 장군이었다. 패튼과 더불어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누렸던 그는 일본 군정사령관 재임시 소위 '인터내셔널리스트'나 '리버럴'로 스스로를 위장했던 유태인 용공좌파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는 조국의 안녕에 대해 걱정을 금할 수가 없다. 미국은 외부로부터의 위협은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끊임없이 미국을 전복시키려는 내부의 적이다." 한국동란 중 워싱턴과의 마찰로 유엔군 사령관에서 해임된 뒤 그는 한동안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되기 위한 선거전을 전개했으나 자금부족과 주류언론의 외면으로 그의 대권도전은 초라하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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