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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나단 (ye3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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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스크랩]    [모닝커피] 곤충도 돈이 된다… 정부 "법으로 지원"    2010/02/09 19:03 추천 0    스크랩 0
http://blog.chosun.com/ye3302/4507571
 원문출처 : [모닝커피] 곤충도 돈이 된다… 정부 "법으로 지원"
 원문링크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2/08/2010020801590.html
곤충도 이제 '돈'이 되는 시대가 됐다.

농림수산식품부는 곤충산업을 체계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곤충산업의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공포했다고 8일 밝혔다.

농식품부가 이렇게 나선 이유는 사슴벌레·장수풍뎅이 같은 곤충들이 최근 자연생태학습이나 애완용으로 각광을 받으며 사육농가의 새 소득원으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전남 함평군서울 롯데월드 자연생태체험관에 지난 2년간 나비 등을 팔아 총 11억7000여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함평군은 올해에도 3억6000여만원어치의 곤충을 납품하기로 했다. 농촌진흥청 관계자는 "소득작목으로 지정된 장수풍뎅이의 경우 농민 1인당 약 2000만원, 왕귀뚜라미는 한 농가당 5000만원의 소득 창출에 기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의 경우 왕사슴벌레 한 종류만 3000억원 시장을 형성하고 있고, 미국에서도 파충류 먹이용 귀뚜라미 시장이 2000억원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천적용·화분매개용 곤충시장 또한 급속히 성장하면서 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 경북 예천군은 화분을 옮겨 주는 호박벌을 산업화해 지난 2004년부터 농가에 대대적으로 보급,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것을 60% 정도 국산으로 대체했다. 호박벌의 먹이장치와 사육통에 대한 특허를 출원하고 여왕벌도 판매 중이다. 국산생산량이 늘면서 2004년 100마리에 30만원이던 호박벌 수입가격이 2009년 8만5000원으로 떨어졌다. 현재 전국 230여곳의 곤충 사육농가에서 곤충 50여종을 키우고 있으며, 연간 소득 110억원 규모를 올리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농식품부는 새로 제정된 법률을 통해 곤충산업의 기반을 조성하고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중장기 투자계획, 연구개발(R&D)사업 등이 포함된 종합계획을 5년마다 세우고 구체적인 시행계획을 매년 수립할 계획이다. 곤충 관련 전문인력을 키우고 기술개발, 사육시설 설치 같은 지원을 해 줄 예정이다. 이와 함께 곤충 사육농가에 기술을 보급하기 위해 지방자치단체장이 교육사업에 예산을 지원할 수 있도록 했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곤충에서 의약 물질을 발굴하는 등 생명산업에서도 유용한 가치를 창출할 것"이라며 "곤충산업 시장이 2015년 1700억원 규모로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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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스크랩]    [Why][문갑식의 하드보일드] 이상일 서강대 前 총장이 부르는 '귀향의 노래'    2010/01/31 09:34 추천 0    스크랩 0
http://blog.chosun.com/ye3302/4484403
 원문출처 : [Why][문갑식의 하드보일드] 이상일 서강대 前 총장이 부르는 '귀향의 노래'
 원문링크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1/29/2010012901264.html

"낙엽은 떨어지는 게 아니라 스스로 내려앉는 겁니다"
"준비된 은퇴보다, 만들어가는 은퇴가 더 좋지요"
美 체류 중 운명의 성지 순례… 사치스러운 삶 깨닫고 결심… 전북 장수서 자연의 언어 배워
"대학개혁 왜 밀어붙였냐고요? 학생들이 경쟁력 가지려면 공동체 구성원들부터 변해야죠"
"은퇴하면 특별한 체험을 하죠… 없을수록, 허술할수록 도와주는 편한 친구가 생겨요"

신부(神父)의 집은 언덕 위에 있었다. 대문(大門)도 울타리도 없는 2층 양옥 너머에 얼어붙은 저수지가 있고 그 뒤에 덕유산이 버티고 있다. 그걸 축(軸)으로 백운·백화·장안·영치·북·할미산 7개 봉우리가 집을 감싸고 있다.

이 그림 같은 땅에서 이상일 전 서강대 총장(63)은 2005년 10월부터 살고 있다. 가족은 영국산 린나와 멜렉, 진돗개 바름(Justice)과 사랑(Love)이다. 린나와 멜렉은 히브리어(語)로 기쁨의 환호성, 왕(王)이라는 뜻이다.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던 27일 오후 1시, 그는 애견(愛犬)들과의 산책을 마친 뒤였다. 얼마나 개들이 주인을 사랑해줬는지 신부는 온통 흙투성이였다. 잠시 씻고 오겠다며 사라진 적막한 공간을 테너의 음성이 메웠다.

순간 40평 남짓한 이 은퇴자의 공간이 새 모습으로 다가왔다. 영성(靈性) 강하게 내리쬐는 성소(聖所) 같은 느낌이 든 것이다. 누군가 옆에서 건드리면 누선(淚腺)이 터질 것 같은, 그러면서도 마음속은 정화되는 것이었다.

로마교황청 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聖書學)을 14년간이나 연구한 권위자이자 대학의 개혁가였던 그다. 그는 왜 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에 은둔해있을까. 이상일이 부르는 귀향(歸鄕) 노래에 맞춰 빗소리가 창(窓)을 두드렸다.

신부(神父)의 집 뒤, 얼어붙은 저수지에 겨울비가 내리고 있다. 7개 산봉우리가 집을 감싸고 있는 언덕 위에서 이상일 전 서강대 총장은 애견 네 마리와 함께 새로운 노년을 맞고 있다. 신부를 얼싸안은 린나의 고향은 머나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다. 린나에게 전북 장수는 어떤 의미일까.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순례자

서강대 총장에서 물러난 후 신부는 6년 동안 미국에 체류하면서 사목(司牧)활동을 했다. 코네티컷에서 3년, 시카고에서 3년째를 맞이했을 때 그는 고민하고 있었다. 시카고 교구(敎區) 신학대 교수직 수락 여부를 결정해야 했다.

미국은 사제의 연금제도가 완벽한 나라다. 그런데 그때부터 교수로 일하더라도 연금을 받기 위해 필요한 20년에 1~2년이 모자랐다. 그러던 차에 운명 같은 성지 순례(巡禮)의 기회가 왔다. 이집트~이스라엘~터키 코스였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2005년 2월 12박13일의 일정으로 순례를 갔습니다. 마지막 코스가 터키의 카파도키아였어요. 그곳에 사암이 마치 버섯 같은 모양으로 자라 있는데 윗부분에 동굴이 여러 군데 뚫려 있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압제를 피해 몰려와 살았다고 하더군요. 출구는 사다리로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게 했고요."

―전 못 가봤지만 멋져 보입니다.

"밖에서는 상상이 안 되는 규모였어요. 2만명에서 3만명이 한꺼번에 거주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성(聖) 바실리우스, 성 나지안제누스, 성 니세누스 같은 대(大) 신학자들이 그런 혹독한 환경에서 살았던 겁니다. 그걸 보고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왜요?

"제가 너무 가진 것이 많았고 사치스러웠고 너무 대접을 많이 받았다는 걸 그때 깨달았습니다. 반면 고마워할 줄 모르고 불평과 비판을 너무 쉽게 하기도 했고요."

―그때 낙향(落鄕)을 결심했다는 겁니까.

"순례를 마치고 서울에 한 달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때 제 고향 장수에 있던 육촌 동생을 만났습니다."

―육촌 동생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은퇴를 하고 싶다, 서울이 아닌 강원도 같은 데서 살고 싶다고 했지요. 22년 반을 외국에서 살았기 때문에 조금 빠른 느낌이 들더라도 시골에 가고 싶다고요. 동생이 어릴 때 저와 앞뒷집에서 살아 아주 친했는데 펄쩍 뛰더군요. 왜 고향을 놔두고 강원도로 가느냐고."

―넙죽 받으시진 않았겠죠.

"고향에 폐 끼치기 싫다고 사양했더니 제수씨와 함께 또 찾아왔어요."

―신부님들은 원래 재산이 없지요.

"동생이 이곳에서 양돈 사업을 크게 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사정을 이야기하니 '그런 문제는 우리에게 맡기라. 그렇지 않아도 평소 지나치면서 봐둔 땅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지금 이 위치였습니까.

"호숫가라는 말을 듣고 펄쩍 뛰었어요. 절대 비싼 땅 사지 말고 규모도 200~300평 정도로만 하라고. 그런데 미국으로 다시 갔다가 6개월 후에 다시 와보니 글쎄…."

―육촌 동생이 뜻을 어겼겠군요.

"동생이 그러더군요. '아무리 신부님의 뜻을 존중하려 해도 어쩔 수 없었다'며 2500평을 사놓은 겁니다. '있는 걸 없애는 건 쉽지만 없는 걸 있게 하는 건 어렵다'고도 설득했습니다. 나중에 쓸모가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는데 과히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땅값이 폭등했나요?

"그런 건 아니고요, 여기서 2~3분만 걸으면 논개 사당이 있습니다. 논개 사당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첩첩산중, 차도 안 다니던 곳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이곳에 온 뒤 매년 3500~4000명이 제 집에 들르고 있습니다. 자고 가는 분들도 있고요. 그분들을 위해선 잘된 일이라고 볼 수도 있지요."

―대문도 울타리도 없는데 겁이 나진 않나요.

"신부는 원래 겁이 없습니다."

귀향자

이상일의 집안은 조선시대 말 천주교 박해를 피해 장수 땅으로 숨어들었다고 한다. 이상일이 4대(代)째고 지금은 6대가 되고 있다. 신부는 1남4녀의 둘째인데 8살 아래 여동생이 부산에 사는 이(李)요아킴 수녀다.

신부는 장수 번암초·장계초등학교를 거쳐 장계중을 마친 뒤 전주상고에 진학했다. 그 뒤 그는 당시 전국에 2곳밖에 없었던 신학교 가운데 광주신학대에 진학했다. 서강대를 세운 예수회 신부들이 운영하던 학교였다.

―신학대에 진학할 때 고민은 하지 않았나요?

"고민은 없었는데 사실 신학대 진학은 한 목사님의 설교에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곡예사가 사람들 앞에서 '내가 외줄을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너려 하는데 믿을 수 있겠느냐'고 말했습니다. 단 한 사람만이 '믿는다'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그 곡예사가 또 말했대요. '내가 당신을 업고 건너갔다 돌아오려 하는데 따르겠느냐'고. 그는 한참 고민하다 수락했답니다. 곡예사는 진짜로 그를 업고 폭포를 건너갔다 왔다는군요."

―믿음의 힘입니까?

"그 얘기 다음이 더 충격적이었어요. '당신들은 2000년에 세상이 망할 텐데 어쩔 겁니까'라는 거예요. 전 놀라 '아! 그렇다면 빨리 사제(司祭)가 돼야겠구나'하고 생각했지요. 신학대에 온 지 한 학기도 안 돼 그 말이 엉터리라는 걸 알게 됐지만요."

―그럼 신학대에 온 동기가 사라진 게 아닙니까?

"동기가 바뀌었으면 신학대를 나가야 했는데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게 의미가 있겠다 싶어 학업을 계속했습니다. 가족들의 영향도 컸고요."

―1979년부터 로마교황청 성서대학원에서 수학했지요.

"신학대 다닐 때부터 성서학을 공부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시편(詩篇)'이 제 전공입니다. 그러려면 배워야 할 언어가 많아요. 라틴어, 히브리어부터 아시리아의 아카드어, 이집트 상형문자까지요."

―박사 학위 논문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들었습니다.

"로마교황청 성서대학원은 스승이 제자를 자식처럼 여깁니다. 요즘 말로 '빡'세게 닦달하는 대신 모든 편의를 봐주는 거지요. 그런데 첫 지도교수님께서 그만 62세에 뇌암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분은 25개국어를 했던 분입니다. 두 번째 지도교수님께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하고 한국에 왔는데 그분 역시 암으로 사망했어요. 57세에."

―억세게 운이 없군요.

"그래서 동료들이 제게 붙여준 별명이 '닥터 파터 킬러'였습니다. 닥터 파터는 독일어로 쓰는데 '논문 지도교수'라는 뜻입니다."

―전 성서를 여러 번 읽어보려 했는데 창세기(創世記)를 못 넘깁니다. 이런 사람을 위해 조언 한마디 해주신다면.

"딱딱한 얘기가 될 텐데, 성서는 인간의 출생근거입니다. 지금까지의 삶, 다가올 삶, 영원한 삶이 그 안에 담겨 있고요, 같은 구절이라도 살아 있는 존재라고나 할까요."

―같은 구절이 살아 있다니요?

"자기의 삶이 오르막이냐 내리막이냐에 따라 같은 구절도 달리 와 닿거든요. 똑같은 말을 해도 작년에 느끼는 것 다르고 올해 느끼는 것 다르지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도 다릅니다. 성서의 오류를 탐색하는 분, 의혹의 눈길로 보는 분과 믿음이 있는 분의 해독(解讀)에 차이가 나지요."

―그리고 서강대에서 총장까지 하셨고요. 2년여 만에 조기 퇴진한 것도 화제를 불러일으켰고요.

"1999년 3월 4일까지 했지요. 제가 서강대 총장이 됐을 때 낸 책이 '캐주얼하게 살고 싶다'였습니다. 총장에서 물러난 뒤 주위에서 '서문(序文)을 방정맞게 써 그렇게 된 것 아니냐'고 한 분이 있었어요. 캐주얼이 실제로 입기도 쉽지만 벗기도 쉽잖아요."

―당시 지나치게 강한 개혁 드라이브를 걸었다고 반발한 사람들도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전 당시 대학이 변해야 할 게 너무 많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학생들이 고품격 경쟁력을 가지려면 공동체 구성원들이 변해야지요. 전 대학 구성원이 아방가르드(전위·前衛)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상아탑의 꼭대기에 있을 게 아니라 상아탑을 움직이는 바퀴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

―대학이 원래 보수적이지 않습니까.

"그런 걸 낯설어하는 이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이상일 전 총장은 색깔있는 옷을 입어야 젊게 보인다고 하자“옷이 이것밖에 없는데”라며 흰 와이셔츠로 갈아입고 나왔다.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은퇴송(頌)

신부는 기자 일행에게 집 구경을 시켜줬다. 세탁기가 놓인 빨래하는 방, 손님방, 김치를 비롯한 음식물이 놓여 있는 주방, 1층에 있는 손님방이었다. 지하실은 세미나용으로 쓰인다.

2층에 연구실이 있었다. 연구실은 모두 유리로 할 계획이었지만 석양이 너무 강해 뜻을 바꿨다고 한다. 연구실 옆 신부의 침실은 손님방보다 훨씬 검소했다. 이 모든 것은 그의 후배 김제구 설계사가 무료로 해줬다고 한다.

―혼자 지내면 식사가 제일 힘들지 않습니까.

"음식은 거의 제가 다 해먹습니다. 김치는 주변 분들이 가져다주고요. 요리 자랑 좀 해볼까요?"

―해보시죠.

"식사 준비를 하다 보면 점점 겁이 없어집니다. 정 모르면 아는 분께 전화해서 물으면 되니까요. 한번은 우리 밭에서 나는 토마토에 올리브오일과 치즈를 넣은 뒤 야콘 잎을 가루로 만들어 얹은 적이 있어요. 손님들 반응이 너무 좋았어요. 나중엔 돼지갈비를 구우면서도 야콘 잎 가루를 넣어보니 돼지 특유의 냄새가 없어졌다고 하더군요. 사소한 것 같지만 자연은 그렇게 저를 가르쳐줍니다."

―손님 없는 날은 적적할 것 아니겠습니까.

"남들은 심심할 것 같다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제가 2월부터는 새벽 3시반, 12월부터는 새벽 4시반이나 5시 사이에 일어납니다. 하루 2시간 반 정도 묵상(默想) 기도하는 시간, 개들과 산책하는 시간을 제외하곤 일을 합니다. 여름에는 10~12시간 정도 야채도 가꾸고 청소도 합니다. 손님 주무시고 간 방 뒷정리도 하고요. 심심할 시간이 없어요."

―그 모든 걸 혼자 하기는 힘들 것 같은데.

"처음엔 바퀴 하나 달린 수레에 남들의 4분의 1도 안 되는 분량의 흙이나 자갈을 싣고 가다 덜덜 떨기도 했습니다. 손에 힘이 없어 쏟아버리기도 했고요. 1년 정도 발발 떨었지만 그후엔 익숙해졌습니다."

―그럼 그 막막한 1년은 어떻게 견뎠습니까.

"이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신부 중에 굶어 죽은 신부는 제가 과문(寡聞)한지 모르지만 한명도 없었잖아요. 하느님이 신부인 나를 절대 굶어 죽게 할 리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배운 15개 국어가 아깝지 않나요.

"일전에도 어떤 분이 그렇게 묻던데, 그런 생각은 없고요. 전 16번째 언어를 배운다고 생각합니다."

―16번째 언어라뇨?

"자갈의 언어, 잡초의 언어. 처음엔 진흙이나 바위를 여기저기 옮기기만 했지요. 나중에 보니 풀은 그대로 놔두면 꽃밭이 될 수도 있었어요. 제가 만일 자갈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해독할 수만 있다면, 그들의 문법을 안다면 자연을 못살게 굴지는 않았겠지요. 요즘 16번째 언어를 배우며 반성도 많이 합니다. 낙엽은 떨어지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스스로 내려앉기도 하는 겁니다."

―무슨 반성을.

"이런 걸 미리 깨달았다면 사람을 보는데도 달리 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시골에 은둔하면 사목에는 지장이 있지 않을까요.

"여기 온 다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 질문과 관련이 있습니다. 막스 베버가 예수님의 카리스마를 이야기했는데 그 카리스마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일상화됐지요. '제도 교회'가 되면서 예수님의 카리스마를 체험하기에 약한 구조가 된 겁니다. 하비콕스도 그렇게 비판했어요. 교회는 가난해지려 노력하지만 정작 빈자(貧者)들은 가난하게 사는 기성 교회 대신 신흥 종교에 빠진다고요. 라틴아메리카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럼 이곳에 온 게 초기 공동체 같은 생활을 해보려?

"보다 직접적이고 뜨겁게 예수님의 카리스마를 체험하려면 자연 안에서 묵상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전 이곳에 수도(修道)하러 온 겁니다. 지금 방바닥이 따뜻하지요? 2008년 9월 태양열 기구를 기증받기 전까지는 겨울에 5~8도였어요. 추위도 하느님이 주신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했던 거지요."

―승용차도 없는데 그러면 외출은 어떻게.

"손님들 차 얻어타기도 하고. 뭘 사려 해도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닙니다. 택시를 부르면 최소 2만원 이상 나오고. 누군가 승용차를 기증하겠다고 했는데 거절했습니다. 게을러질까 봐요."

가족들

신부는 귀향한 뒤 '린나'라는 책을 냈다. 린나를 통해본 세상이 그 안에 담겨 있다. 린나는 그가 은퇴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시카고에 살던 요세피나 가족이 선물한 것이다. 린나의 고향은 장수에서 멀리 떨어진 노스캐롤라이나다.

멜렉은 수컷으로 암컷 린나와 짝을 맞추기 위해 구해온 것이다. 진돗개 한 쌍은 국내에서 가장 많은 진돗개를 키우는 진돗개 전문가인 '수학의 정석'의 저자인 홍성대(洪性大) 전주 상산고 이사장이 준 것이라고 한다.

―진짜 애견들에게서 세상을 봅니까.

"영국산 개들과 진돗개의 성격이 다른 것도 느끼고, 그들 사이의 위계질서도 느끼고 그렇습니다. 진돗개들은 벌써 새끼들을 많이 낳았는데 영국산 개들은 그렇지 못한 것도 그런 이유가 있지요."

―왜 못 낳습니까.

"원래 저기 있는 축사(畜舍)가 린나를 위해 지어준 건데 멜렉과 바름이와 사랑이가 오면서 점점 줄어들었지요. 멜렉이 한때 뒤편으로 밀려났는데 그 때문에 애정 결핍을 느끼고 많이 불안해했어요. 지금은 나아지고 있어요. 제가 개 목걸이에서 힌트를 얻었거든요."

―개 목걸이는 또 왜?

"개들이 목걸이를 싫어할 것 같죠? 정반대입니다. 주인 곁에 바짝 붙어서 스킨십이 강화되니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갑자기 멜렉이 왕이 아니라 불쌍해 보입니다. 요즘 여자들에게 기 못펴는 남자들과 똑같은 신세군요.

"그건 다르지요. 여자들에게 잡힌 게 아니라 권력을 스스로 내줬겠지요."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시작됐다고 세상이 난리입니다.

"은퇴가 쉬운 일도 아니고 사람들이 처한 형편에 따라 다르겠지만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은퇴는 좀 빠르다고 할 때 시작하는 게 낫습니다. 은퇴한 뒤 그동안 해오던 일을 바라보거나 붙잡아도 안됩니다. 정작 은퇴를 못하고 놓았던 일이 잡아당기니까요."

―그래도 준비 없는 은퇴는 두렵지 않습니까.

"준비된 은퇴도 좋지만 만들어가는 은퇴가 더 좋지요. 생활비를 만들어놓으면 안전하긴 하지만 은퇴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특별한 체험을 하지 못합니다."

―특별한 체험이 뭔가요.

"없을수록 허술할수록 도와주는 편한 친구가 생기지요. 뭘 챙겨놓으면 까다로운 친구가 생기고요. 전 은퇴도 일종의 벤처라고 생각합니다. 아까 제가 말한 16번째 언어를 배우는 것도 그 중 하나고요. 자아(自我)를 리사이클링할 수도 있지요."

―자아를 리사이클링하다니요?

"제가 어렸을 때 운동을 못했어요. 체육 시간만 되면 '나는 안되는구나'하고 뒤로 빠졌습니다. 그런데 1979년 캐나다 몬트리올에 갔을 때 크로스컨트리를 처음 해볼 기회가 있었어요. 처음 스키를 탔는데 8명 중 2등을 했습니다. 그 이유를 몰랐지요. 이곳에 와 초등학교 동창들을 많이 만납니다. 지금 보니 저보다 5~6세 많은 동창들이 수두룩했습니다. 그걸 어렸을 때 모르다가 지금 알게 됐으니 자아의 리사이클링이 아니고 뭡니까."

―일전에 어느 글을 보니 이곳에 오려면 술을 들고 오라는 내용을 봤는데.

"전 이곳에 오는 분들은 자기 복(福)을 자기가 가져온다고 생각합니다. 뭘 가져오란 뜻이 아니고요, 제가 원래 술을 좋아하니까요."

―천주교에선 술을 금하지 않나요?

"금하지 않아요. 개신교 목사님들은 안 마시지만 전 한때 말술이었어요. 대학 총장 지낼 때 3시간 만에 선 채로 맥주컵에 500잔 이상을 마신 적도 있고요. 중국 하얼빈에 있는 대학과 자매결연을 할 때는 60도 이상 되는 고량주와 배갈을…. 그 양은 스캔들이 될 것 같아 밝히지 않겠습니다. 그러고도 다음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볼 일 다 봤어요."

―웬 술을 그리 드셨습니까.

"술을 마셔야 대학에 후원금이 들어오니까요. 외로워서 그런 건 아니고요, 다양한 사람들과 보다 친하게 지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봐주세요."

오후 4시반인데도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신부는 처음엔 '자고 가라'더니 나중엔 "부엌에 김치찌개를 끓여놓았으니 먹고 가라"며 여러 번 일행을 만류했다. 찾아온 손님에게 줄 게 없다고 미안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빈손으로 온 건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기자는 신부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들으며 그 어떤 성찬(盛饌)보다 값진 것을 만끽한 것 같았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졌다. 신부는 또 묵상하고 애견과 산책하고 농사를 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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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스크랩]    [Why] [유석재의 新역사속의 WHY] 발해 건국되기까지 30년 공백 가시밭길의 고구려 부흥운동 이어져    2010/01/17 07:28 추천 0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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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출처 : [Why] [유석재의 新역사속의 WHY] 발해 건국되기까지 30년 공백 가시밭길의 고구려 부흥운동 이어져
 원문링크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1/15/2010011501315.html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는 누가 세운 어느 나라일까?" 이건 초등학생도 대답할 수 있는 문제다. 대조영(大祚榮·?~719)이 세운 발해(渤海)다. 그런데 여기서 '서기 698년'이라는 발해의 건립 연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구려가 멸망한 게 668년이니 무려 30년이 지나서야 새 나라가 세워졌던 것이다. 당시 신라 임금인 효소왕은 고구려 멸망 당시 임금이었던 문무왕의 손자였다. 도대체 왜 이런 시차(時差)가 생겼을까?

평양성 함락 직후로 시곗바늘을 되돌려 보자. 멸망 뒤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운동은 거셌다. 669년 검모잠(劍牟岑)이 왕족 고안승(高安勝)을 왕으로 추대하고 한성(漢城·황해도 재령)을 기점으로 고구려 부흥의 깃발을 들었다.

고안승을 '고구려왕'으로 봉한 것은 다름 아닌 신라였다. 왜 그랬을까? 당나라의 침공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고구려 유민 세력을 당군(唐軍)의 1차 저지선, 즉 방패막이로 삼았던 것임을 알 수 있다.

670년 고구려 부흥군은 신라군과 요동 진공작전을 개시했다. 이걸 안시성(安市城)을 중심으로 일어나던 요동 지역의 부흥군과 연결하려는 시도로 보기도 한다. 고구려와 신라 모두를 적으로 돌린 당나라는 반격을 시작했다.

여기서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 발생한다. 고안승이 검모잠을 살해하고 신라로 망명한 것이다. 추대받은 자가 추대한 자를 죽이고 달아났다니? 아마도 당군의 공격을 앞두고 지도부 내에 분열이 생겼고 친(親)신라 세력인 고안승이 자립을 꿈꿨던 검모잠 세력을 공격했던 것으로 보인다.

671년 안시성이 함락됨으로써 요동의 고구려 부흥 세력은 타격을 입었다. 신라군과 연합한 부흥군 잔여 세력은 672년 백수산(白水山·백빙산)전투, 673년 호로하(瓠瀘河) 전투에서도 패하고 남은 병력은 신라로 철수했다.

이들은 다시 신라와 연합해 675년 매소성(매초성)전투에서 당군을 격퇴한 것으로 보이지만 고구려 부흥운동만큼은 일단 실패로 끝났다. 나당전쟁의 틈바구니에서 고구려 유민들이 이용만 당한 채 희생됐을 수도 있다.

망명한 고안승은 어떻게 됐을까. 문무왕은 고안승과 고구려 유민들을 전북 익산인 금마저(金馬渚)에서 살게 했다. 백제가 새 수도로 건설하려 했지만 천도 직전 멸망해 뜻을 이루지 못했던 곳이 고구려인들의 안식처가 된 셈이다.

고안승의 나라 이름은 보덕국(報德國)이었다. '(신라의) 은덕에 보답한다'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신라의 속국이었다. 그래도 한동안은 '태대형'이나 '소형' 같은 옛 고구려의 관등을 쓰면서 나름대로 자치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통일신라의 중앙집권체제 강화로 보덕국에도 종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683년 신문왕이 고안승을 서라벌로 불러 신라 관직과 김(金)씨 성을 내리자 684년 보덕국 왕족 대문(大文) 등이 신라에 '모반'하다 처형됐다. 이를 계기로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이 일어났다. 신라 장군 두 명이 전사할 정도의 격렬한 전투 끝에 보덕국은 해체됐다. 676년 당나라가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철수시키고 나서도 요동의 고구려 부흥 세력은 소멸하지 않았다.

지금의 티베트인 토번(吐蕃)의 침공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당나라는 요동에 유화책을 썼다. 677년 '요동주도독 조선왕'이라는 관직을 새로 만든 것이다. 이 '조선왕'은 당나라로 강제 이주한 유민들과 함께 요동에 부임했다.

누구였을까?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 보장왕(寶藏王)이었다. 그러나 일찍이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옹립됐던 허수아비 임금이자 폐주(廢主)라는 오명까지 썼던 그는 이때만큼은 호락호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보장왕은 몰래 유민들을 규합하고 말갈과도 연락을 취하며 고구려의 부흥을 도모했다. 이것이 발각돼 681년 보장왕은 다시 당나라로 소환됐다. 하지만 이 지역은 이후에도 동요를 멈추지 않아 당나라는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高德武)를 다시 안동도독으로 보내야 했다.

멸망 직후 들불처럼 일어났던 부흥운동이 불리한 국제 정세 속에서 좌절되고 상당수 유민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한 세대 정도의 기간 동안 나라를 복원할 구심점을 상실했던 것이다. 그러나 보장왕과 대문의 예에서 보듯 옛 나라를 재건하려는 의지만큼은 계속되고 있었고 이는 끝내 발해의 건국으로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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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핵무기 연구    2010/01/12 16:55 추천 0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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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核 봉투 2개 봉인해 최규하에 전달… 신군부가 美에 넘겼을 가능성”

한국전력이 총 건설비 200억달러에 달하는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원자력발전소 프로젝트를 수주하면서 원자력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정부가 원전 개발에 착수한 지 40여년 만에 프랑스 등 원전 선진국의 기술력을 따라잡은 것은 물론이고 세계에서 6번째 원전수출국이 되는 쾌거를 이뤘기 때문이다.

한국이 ‘원전 강국’으로 발돋움하게 된 출발점은 박정희 정권 시절에 마련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미국의 감시와 견제 속에 원전 기술 확보에 주력했다. 미국은 박정희 정권이 원전 기술을 확보해 핵무기를 개발하려 하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아직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 있지만 실제 박정희 정권이 핵무기 개발에 착수했다는 것이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과 관련 문서를 통해 드러난 바 있다. 한국의 핵무기 개발 노력은 박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중단됐다. 핵무기뿐 아니라 원전 개발 노력도 중단됐다. 한국이 다시 원전 개발에 뛰어든 것은 이후 10여년이 지난 노태우 정권 때였다.

‘원전 강국’ 한국의 초기 원전 개발사에는 상당한 우여곡절과 비밀스러운 사연들이 담겨있다. 박정희 정권 당시의 핵무기 개발이 실제 어느 정도까지 이뤄졌는지, 관련 성과물과 기록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박정희 정권 당시 원전 개발의 총괄 책임자는 오원철 전 청와대 제2경제수석이다. 오 전 수석이 당시 핵무기 개발 비사(秘史)에 대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주간조선과의 수차례 인터뷰에서 “우리는 당시 핵무기 기술과 관련해서 일본 정도의 기술력을 확보하라는 (박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임무를 수행했다”며 “그러나 국가기록원에 있어야 할 핵무기 관련 문서는 (박 대통령 서거  이후) 사라져 버렸다”고 주장했다. 오 전 수석과의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원전 초기 개발사와 핵무기 개발에 관련된 숨겨진 이야기들을 정리했다.

1972년 초 “핵무기 기술력 확보하라” 주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처음으로 핵무기와 관련된 구상을 한 것은 1970년 중반 무렵이었다. 미군 철수 문제가 최대 현안으로 부상하자 안보 차원의 대안을 모색하다 ‘결단’을 내렸다. 박 전 대통령은 1972년 초 김정렴 비서실장과 오원철 경제수석을 집무실로 부른 뒤 “평화를 지키기 위해 핵무기가 필요하다. 기술을 확보하라”고 주문했다. 당시 국내에서도 중수로형 원자로 건설이 가능한 수준의 기술력은 확보된 상태였다.

총괄 책임은 오원철 전 수석이 맡았다. 방위산업 분야 총괄 책임자였던 그는 박 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등 기존 연구기관을 동원해 핵무기 개발 기술력을 확보하기 위한 극비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국방과학연구소 등 전문 인력을 갖춘 7개 연구기관에 각각의 연구과제를 지시했다.

당시 연구진은 국내에서 우라늄 조달이 가능한지, 플루토늄 재처리 설비를 갖출 수 있는지도 검토해 기초 자료를 만들었다. 국방과학연구소를 비롯한 여러 연구 기관에 과제를 분산해 맡긴 것은 미국의 감시와 견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당시 미국은 ‘한국이 핵무기를 만들려고 한다’는 강한 의구심을 품고 ‘정보원’을 동원해 청와대와 유관 연구시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청와대의 가장 큰 고민은 보안 문제였다. 국방과학연구소에 연구를 통째로 맡길 경우 다수의 연구원들이 핵무기 개발을 인지하게 되고 결국 보안을 유지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청와대가 지시한 연구 과제가 핵무기 개발을 위한 용역이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도록 여러 곳으로 분산해 진행했다. 7개 프로젝트를 하나로 연결하는 청와대의 컨트롤 타워에서만 종합적인 판단이 가능하게끔 운영했다.

오 전 수석은 “미국은 1975년 우리가 핵연료 재처리시설을 확보하기 위해 프랑스와 교섭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국내로 들여오는 국방 관련 기자재를 일일이 검색했다. 하지만 여러 파트로 쪼개서 진행되는 연구개발 방식으로 인해 미국이 핵무기 개발의 확실한 물증을 잡아내는 데는 실패했다”고 말했다.

핵무기 관련 연구 과제가 진행되는 동안 각 연구소에서 올라오는 보고서는 모두 박 전 대통령에게 전달됐다. 보고서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됐는데 기술진들이 직접 올린 기술적 보고서와 오 전 수석이 작성한 추진 계획 및 진행 상황에 대한 보고서였다.

안보에 관심이 높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오른쪽에서 세 번째)은 방위 산업 현장을 수시로 시찰했다. / photo 조선일보 DB
“핵무기 거의 완성 단계까지 갔다”

1972년 9월 8일 오 전 수석이 작성한 보고서 중 일부는 국가기록원의 정보공개를 통해 일반에 공개된 바 있다. 2급 비밀문서로 분류된 이 문건에는 ‘핵무기의 종류 및 우리의 개발 방향’ ‘우라늄 탄두와 플루토늄 탄두에 대한 장·단점 비교’ 등 개괄적 내용과 함께 ‘우리나라의 기술 수준으로 보아 플루토늄탄을 개발한다’는 잠정적 결론이 담겨있다. 이 문건은 박정희 정권 당시 핵무기 개발이 추진됐던 결정적인 근거 자료 중 하나다. 그러나 연구 실무진들이 작성한  보고서는 현재 국가기록원에서도 찾을 수 없다. 보고서에는 핵무기 개발의 기술 관련 내용이 담겨있다. 이들 보고서는 일종의 ‘실종’ 상태라는 것이 오 전 수석의 주장이다. 박 대통령 서거 이후 청와대의 대통령 개인금고에 보관 중이던 핵심자료들이 어디론가 유출됐다는 것이다. 오 전 수석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박 대통령 서거 직후 수석비서관들이 청와대에 모였다. 대통령의 서재 뒤편에 있던 풍금 크기만한 금고를 열었다. 거기에는 여성 월간지 크기의 노란 봉투 2개가 들어 있었는데, 핵무기 관련 보안 문서가 담긴 봉투였다. 문서가 더 있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담당자였던 나는 해당 문서를 봉인해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넘겼다. 이 문서들은 나중에 신군부에 전달됐다고 들었다. 내가 작성했던 핵무기 관련 일부 문서가 보통 문서로 분류돼 (국가기록원을 통해) 일반에 공개된 것을 알고 다른 핵무기 관련 문서들을 영구 비밀문서로 바꾸기 위해 국가기록원에 갔을 때는 노란 봉투 속에 담겨 있던 문서들이 보이질 않았다. 외부로 유출된 것 같다. 그게 미심쩍은 대목이다.”

오 전 수석은 “당시 핵 관련 문서는 미국으로 넘어갔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도 폈다.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의 금고에 항상 일정 금액 이상의 현찰과 함께 핵 문서를 보관해 왔는데 박 대통령 서거 후 수석비서관들이 금고를 열었을 때는 금고 안에 단 한 장의 지폐도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 전 수석은 “노란 봉투 속 문서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질 않았다는 점에서 다른 누군가가 먼저 손을 댔다는 의구심을 품었지만 더 이상 금고에 대해서는 재론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우라늄 농축용 ‘옐로 케이크’ 박 대통령에 전달"


우라늄 농축에 사용되는 ‘옐로 케이크(정제우라늄)’.
당시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는 완성단계까지 진행됐다. 박 전 대통령은 10·26 사건이 발생하기 직전 우라늄농축용 분말로 노란색인 ‘옐로 케이크(yellow cake·정제우라늄)’를 선물받았다고 한다. 당시 정부는 핵연료 재처리를 금지한 미국과의 원자력 협정에도 불구하고 플루토늄 재처리 기술 개발도 이어갔다. 박 대통령이 서거하기 전 우리 기술진은 우라늄이든, 플루토늄이든 핵연료를 100% 확보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다.

오 전 수석은 “KIST 출신의 한 인사가 노무현 정부 시절 과거 우리 기술로 만든 ‘옐로 케이크’를 보관하고 있다가 미국에 들켜 큰 변을 치른 적이 있었다”며 “당시 정부가 떳떳하게 대응하기는커녕 그걸 (미국에) 설명하느라고 쩔쩔매 한심하게 느껴졌다”고 지적했다.

핵무기 기술 개발이 정점으로 치닫고 있던 1970년대 말 박 전 대통령은 핵을 무기화 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마지막 결정을 내리기 위해 김정렴 비서실장, 오원철 경제수석, 서종철 국방장관, 국방과학원(ADD) 책임자 등 4명을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당시 상황에 대한 오 전 수석의 설명이다.

“이날 (핵무기 관련) 결정은 아주 중요한 내용이었다. 핵에 대한 박 대통령의 의지가 담겼고 거기서 나눈 대화와 결정사항은 문서로 남겼는데 이 문서도 사라진 노란 봉투 속에 들어 있었다. (당시 대화) 내용은 기자분이 아무리 물어봐도 공개할 수는 없다. 다만 아주 긍정적인 내용이었다는 점만 알아 달라.” ‘긍정적인 내용’에 대해 오 전 수석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오 전 수석은  “박 대통령은 북한과 달리 평화를 지키기 위한 핵 이용을 줄곧 강조해 온 분”이라며 “핵무기만을 고집하는 지금의 북한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접근이었다. 박 대통령은 그런 의미를 강조하듯 상징적 차원에서도 핵무기 관련 문서에 일절 서명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원자력 기술 국산화 놓고도 미국과 신경전

오 전 수석은 이명박 정부가 나서 성사된 UAE 원전 수주와 관련 “이번 원전 수출은 박정희 대통령이 토대를 잡아 놓은 원전 기술이 진정한 ‘무궁화 꽃’을 피운 결과”라고 말했다. 오 전 수석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이 원전 기술을 확보하는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국내 원자력 역사는 이승만 대통령 당시인 1956년 2월 한·미 간 체결된 ‘원자력 비군사적 이용에 관한 쌍무협정’에서 출발한다. 이후 한국은 1957년 8월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가입했고 1958년 3월에는 원자력법을 공표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원자력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고 이러한 의지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어졌다. 박정희 정권은 1962년 3월 차관 도입을 통해 마련한 재원으로 국내 최초의 연구용 원자로를 확보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원전 개발과 관련된 미국과의 외교적 마찰은 수시로 발생했고 갈수록 농도도 짙어졌다.

1970년대는 국제사회에서 핵무기 등 대형 살상무기를 제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던 시기다. 1975년 인도에서 핵실험 성공 사실을 공표하자 미·소 열강의 핵무기 개발 확산을 막기 위한 압박은 한층 강화됐다. 당시 한국도 북한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핵무기 개발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이를 간파한 미국은 한국 원자력 기술개발 전 과정을 철저히 통제했다.

미국의 견제 속에서도 한국은 1970년 6월 국내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고리1호기’ 계약을 미국과 성사시켰고 1972년에는 프랑스와 플루토늄 재처리기술 및 시설도입에 관한 교섭도 추진했다. 하지만 미국은 한국의 재처리 시설 도입은 반대했다. 미국은 유사 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서전트(Sergeant) 미사일부대를 철수시키겠다며 압박을 가했다. 미국은 한국이 캐나다로부터 농축우라늄을 활용하는 원자로 수입을 추진할 때도 캐나다에 압력을 가해 무산시켰고, 고리 2호기 건설을 위한 차관 도입 승인조차 보류했다. 결국 박정희 정부는 1975년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서명, 인준함으로써 미국의 압력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원자로 개발을 둘러싼 대미 외교전은 1979년 지미 카터 대통령의 방한 때 절정으로 치달았다. 오 전 수석은 “경남 창원에 건설되는 대규모 원자로 생산 시설에 대해 미국이 강한 의구심을 품었고 카터 대통령까지 직접 현장을 방문하려 했었다”고 말했다. 카터 대통령의 창원 방문은 현실화되지 않았지만 수십 명의 백악관 의전비서관이 카터 방한에 앞서 창원 현지를 찾았다고 한다. 오 전 수석은 “카터는 박 대통령을 만나고 난 후 야당 총재를 만났다. 당시 우리 정치 상황에서 미국 대통령이 야당 총재를 만난다는 것은 ‘나는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과 같다”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카터의 방한 4개월 뒤 박 대통령은 핵심 측근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알에 사망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은 미국의 견제와 감시 속에서도 원자력 개발과 관련된 적지 않은 성과를 남겼다. 미국의 반대로 중도 폐기된 재처리시설을 제외하고 고리 1·2호기, 월성 1·2호기, 핵연료봉 공장 등의 원전시설은 모두 착공됐다. 원자로와 원자력 발전기기의 국산화 계획을 위한 연구소도 활성화됐고 창원기계공업기지 내에 원자로 가공공장도 건설됐다.

1972년 9월 8일 오원철 전 수석이 작성한 핵무기 개발 관련문서.
신군부 집권 후 원자력 기술개발 ‘올스톱’

박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국내 원자력 분야 기술개발은 사실상 중단됐다. 오 전 수석은 그 배경에 대해 “신군부가 정권 창출의 명분을 얻기 위해 미국의 눈치를 보며 각종 요구를 수용한 탓”이라고 분석했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원자력이라는 명칭조차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원자력연구소를 에너지연구소로 바꾸고 한국핵연료㈜도 나중에 한국원전연료로 변경했다. 국방산업의 핵심이던 ADD 소속 연구원은 800명(당시 ADD 연구원은 총 1000명 규모)이나 잘랐다. (미국과) 뭔가 딜(Deal)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신군부가 집권한 시기에 원자력 산업은 최소한의 동력마저 상실했다. 핵 관련 주요 문서는 사라졌고 당시 연구자들과 기획자는 대부분 일자리를 잃었다. 박정희 정부 때 청와대 핵심 인사들은 철저하게 격리됐고 보안당국의 감시 속에서 10년 이상의 세월을 보냈다. 당시 핵 관련 일부 담당자에 대해서는 ‘포살해야 한다’는 의견이 국무회의 석상에서 나왔을 정도였다. 원전 건설의 핵심 부품공장이던 창원 소재 현대양행㈜도 정권과 여론의 비판에 밀려 사실상 공중 분해됐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동생이 일군 현대양행은 전두환 정권 시절 현대가의 손에서 떠났고 이후 한국중공업을 거쳐 지금은 두산중공업으로 탈바꿈해 있다.

이후 ‘원자력’이라는 단어가 다시 부활하기까지는 13년의 세월이 걸렸다. 노태우 정권은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국내 에너지 수요가 급증하자 다시 원자력 발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순수 에너지 확보 차원의 접근이었을 뿐 ‘핵주권’과는 거리가 있었다.

특히 핵무기에 대해서는 이후 어느 정권에서도 언급되지 않았다. 일본이 플루토늄 재처리시설을 확보하고 기술개발에 나선 것과 달리 우리는 관련 시설을 도입하지 못한 채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와 관련 오 전 수석은 “원전수출국 반열에 오른 것을 계기로 우리도 ‘핵주권’을 확보할 때가 됐다”는 주장을 폈다. 미국과의 원자력협정 시한이 오는 2014년 완료되면 우선 재처리시설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재처리시설이 없는 탓에 현재 국내 원자로에서 나온 핵연료 수만 톤은 고스란히 저장고에 보관돼 있다. 저장고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 매년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야 하는 게 우리 원자력산업의 가장 큰 골칫거리다. 쓰고 남은 핵연료는 재처리를 통해 재사용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전문가들도 재처리시설 도입의 필요성에 입을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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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창포    2009/12/23 12:31 추천 0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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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jpg문방오우로 칭한 석창포를 아시나요?

 

석창포 화분을 볕이 잘 드는 곳에 두었다가 아침에 석창포 잎 끝에 맺힌 이슬로 눈을 씻으면 눈동자가 커져서 눈이 밝아진다하여 오래 씻으면 대낮에도 별을 볼 수 있다는 설도 있어 그 비밀을 알아보기 위해 두물머리에 위치한 석창원을 찾아가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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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방사우와 함께 전시되어 있는 석창포 

 

문방사우라 불리는 붓, 벼루, 먹, 종이와 함께 석창포는 문방오우라 불려진다. 옛 선조들은 가느로 짧게 키우려 애써서 벼루위에 키우는 것을 상품으로 쳤다.

 

방안에 키우더라도 새벽이면 구슬 같은 이슬이 잎 끝에 맺혀져 이 이슬을 눈에 바르면 눈이 좋아진다고 하여 등잔이나 촛불의 그을음을 없애준다고 해서 선비의 서가엔 더 없는 친구였다.

 

늘 푸른 기상, 부드러운 자태, 자정의 능력, 맑은 물가에서만 자라는 청빈의 생활 등 옛 선비들과 뜻이 맞는 이상적인 벗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외에도 석창포는 항암 효과가 강하여 중국이나 북한에서는암 치료제로 쓰이고 있다. 석창포를 달인 물이 암세포를 죽이는 것으로  밝혀졌는데 석창포의 정유 성분에 진정작용이 있어 마음이 불안한 암 환자에게 쓰면 더욱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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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슬이 맺힌 석창포

 

산이나 들판의 냇가에서 자라는 석창포는 잎의 길이가 30~50cm이며 줄 모양이고 잎맥이 없으며 끝이 뾰족하다. 바깥쪽 잎의 밑 부분이 안쪽 잎의 및 부부을 싸고 있어 엇갈려서 2줄로 배열한다.

 

뿌리줄기는 옆으로 뻗고 마디에서 수염뿌리가 나오며 땅속에서는 마디 사이가 길지만 땅 위에 나온 것은 마디 사이가 짧고 녹색이다.

 

열매는 삭과(각 칸 속에 많은 종자가 들어있는 과실을 말한다.)이고 달걀 모양이며 녹색이고 밑 부분에 화피 조각이 남아 있다. 종자는 긴 타원 모양이고 밑 부분에 털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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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창원 

 

경기도 양평 두물머리에 위치한 석창원은 문자 그대로 석창포 위주의 온실이다.

 

석창원 온실안에 크고 작은 수로를 만들어 석창포를 식재하여, 한겨울철에도 수생식물의 수질정화 능력과 농민들의 소득증대를 실험한다. 아울러 신라시대부터 내려오던 화랑들이 수류화개하는 자연공간에서 차를 마시던 우리 전통 다도를 복원하여 자연을 주제로 문학, 음악, 명상, 다도 등의 교육장이 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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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최초의 과학영농온실 재현

 

석창원 내 한켠에는 금속활자, 측우기, 훈민정음 등과 더불어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조선 세종임금시대 의관을 역임한 전순의 선생이 1450년 무렵 편찬한 산가요록에 기록되어 있는 온실의 건축방법을 토대로 재현한 '과학영농온실'을 볼 수 있다.

 

이 과학영농온실은 수증기를 안으로 보내 습도와 온도를 조절하는 현대의 첨단 시설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세계 최초의 온실 시설이다.

 

그 모습은 조금 변했어도 약 650년 전부터 사용해 오던 온실을 현재까지 실 생활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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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창원 내에 있는 '자연 사랑 도서관'

 

석창원을 방문하는 누구나 조용한 분위기와 맑은 공기를 마시며 그야말로 자연속에서 독서를 즐길 수 있다.

 

날씨가 영하로 떨어져 쌀쌀한 요즘 가족들과 함께 따뜻한 온실나라로 떠나 책도 읽고, 내 아이에게 자연 학습도 시켜주는 주말을 보내는 것도 좋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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