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가 작은 편인 국내 대기업의 정모 사장은 우연히 KBS 2TV가 방영한 '미녀들의 수다'를 보다가 충격을 받았다.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한 여대생이 "180㎝ 이하의 키 작은 사람은 싫어요. 키 작은 사람은 루저(패배자)"라고 말하자, 정 사장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는 자신처럼 키가 작은 아내와 자식과 함께 TV를 보고 있었다. 이들은 방송을 보다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루저'라고 불렀다. 정 사장은 "어떻게 키 작은 사람을 비하하는 발언을 여과 없이 방송하고, 심지어 루저(패배자)라는 방송 자막까지 표시할 수 있느냐. 도대체 KBS에는 부적절한 발언을 걸러내는 최소한의 장치도 없느냐"고 흥분했다.
비단 이 프로그램만의 문제가 아니다. 케이블 방송에서 소위 공영방송이라는 KBS나 MBC TV 채널을 틀면 하루종일 비슷비슷한 예능 프로그램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런 예능 프로그램 출연자들은 누가 더 자극적인 발언을 하는가를 놓고 경쟁을 벌인다. 때로는 연예인들에게 인간이 먹기 힘든 음식을 먹이고, 그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웃고 즐거워한다. 강제로 물에 빠트리거나, 추위에 몸부림치는 장면은 덤이다.
속칭 공영방송이 내놓은 각종 드라마는 이제 재론하기도 민망하다.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방에 가둔 채 다른 남자와 옆방에서 불륜을 벌이는 장면부터, 유산을 독차지할 욕심에 아버지를 식물인간으로 만들고, 동생을 청부살인 하는 장면도 나온다. 도대체 청소년들이 '외도를 한 남편에 항의하는 아내를 강제로 성폭행하는 장면과 여동생이 오빠에게 키스하는' 장면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오죽하면 일본 방송전문가가 한국 드라마의 코드가 패륜, 불륜, 납치, 강간이라고 말했겠는가.
지금 공영방송은 사회의 품격을 망가뜨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가정을 파괴하고, 패륜과 범죄를 조장하고, 사회적 혼란을 부추기는 결과에 아무 거리낌이 없다. 이런 방송이 때로 자신들의 발언과 행동을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모습을 보면 말문이 막힌다. 특히 자신들의 기득권이 침해당할 상황이 되면 으레 '방송의 공공성'이라는 표현을 꺼내 든다. 방송 시장에 새로운 경쟁자들이 들어올 조짐이 보이면, '재벌과 족벌이 방송의 공공성을 해친다'면서 머리띠를 매고 농성을 벌인다.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약간이라도 어긋나면 '반민주·친재벌 세력'으로 몰아붙인다.
우리나라의 앞선 IT 기술을 활용해 만든 위성방송이 나왔을 때도 공영방송은 초기에 온갖 이유를 들어 프로그램을 위성방송에서 방송하는 문제에 반대했다. 때문에 당시 새로운 기술이라던 스카이라이프 위성방송은 아직도 수천억원의 누적 적자에 신음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최초로 우리나라에서 상용화시킨 위성 DMB 방송도 지상파 방송의 재전송 방해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공영방송은 SBS와 공동으로 인터넷으로 방송을 볼 수 있는 IPTV에 콘텐츠 사용료라는 명목으로 수백억원을 요구하고 있다. 지금은 일부 케이블 TV 방송에도 콘텐츠 사용료를 내라고 소송을 제기하고 있다. 이것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명백한 방송사 간 담합 행위인데도 공정거래위원회는 모른 척하고 있다.
다른 국내 대기업들은 요즘 '상생과 나눔의 경영,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놓고 고민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주고 있다. 공영방송들은 영리 추구 면에서 재벌 기업보다 훨씬 독한 것 같다. 공영방송이라면 문자 그대로 국민들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국민이 주인인 방송을 말할 것이다. 당연히 그 콘텐츠의 주인도 국민이다. 새로운 미디어가 나오면 국민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편리하게 볼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맞다. 그러기 싫다면 공영방송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 게 옳다.
-김영수·산업부장
여성이 밥값을 내는 그날까지" 계속하겠다는 한 코미디가 요즘 인기다. KBS 2TV 개그콘서트의 한 코너 이름은 '남성인권보장위원회'(남보원). 제목 그대로 남성들의 '처참한' 인권을 낱낱이 고발한다. 돈 낼 때만 되면 사라지는 여자친구에게 던지는 말은, "영화표는 내가 샀다! 팝콘 값은 니가 내라!", 남자의 신체조건을 비웃는 여성들을 향해 외치는 말은 "A컵도 인정한다! 백육십도 인정해라!" 등이다.
좀 우스꽝스럽지만, 어찌 보면 이 일은 한국 여성사에서도 작지 않은 의미를 가질 수 있겠다. '역차별당한다'는 남성들의 불만이 드디어 방송을 통해 표출되고, 그게 또 대중의 호응을 끌어내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은 "여성을 모독한다"는 반응보다는 "그래 요즘 남자들 불쌍하다"며 박수를 친다.
군가산점제도와 호주제, 두 제도의 혁명적 폐지로 '일'은 시작됐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차별 없이 키운 딸들의 공직 진출은 눈부시고, 여학생들의 기세에 눌린 남학생이 공학을 기피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아내가 남편 월급봉투에 전권을 행사하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는 볼멘 얘기도, 고급식당의 점심 장사는 여성들이 다 해준다는 뒷얘기도 있다. 여자를 존중해서가 아니라 "돈 만지는 천한 일은 대장부가 할 일이 아니다"라는 유교적 전통에서 나오긴 했지만, 경제권은 작지 않은 권력이다. "쥐꼬리만한 월급 갖고 사는 게 얼마나 힘든데, 그건 노동"이라 우기지는 말자. 국회의원이나 고위공직자가 "국민을 위해 희생하고 있다"고 우기는 것과 비슷하게 들린다.
여성 입장에서는 "아직 멀었다"고 할 수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이 주로 여성의 정치적 지위, 경제적 참여 등을 근거로 산출한 '세계 성(性) 격차 보고서'에서 한국은 134개국 중 115위다. 반면 유엔개발계획(UNDP)이 발표한 성·제도·개발지수(GID index)의 경우는 세계 4위(2006년)다. 이 지수엔 사회참여는 물론 피임, 외출, 이혼의 자유, 평등한 상속 등 실생활 지수까지 포함됐다.
두 지표를 종합하면 이런 추론이 가능하다. 안방에서는 장군님이요, 밖에서는 여전히 '찌질이'인 여성들의 나라라는 얘기다. 문제는 바로 여기 있다. 일상의 권력자인 여성들이 권리확대를 외치는 데 대해 남성들은 피로감을 호소하고, 여성들은 '권력 없는 권력'이 무슨 대수냐고 주장한다.
이런 부조화를 조정하는 데 여성부와 여성계가 작동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여성부는 남성들의 미움과 일부 여성계의 채근에 엉거주춤한 모양새다. 그러나 '여성적 리더십'이라는 게 있다면, 이제 여성부와 여성주의자의 지향점은 좀 달라져야 한다. 일단 가장 가까운 문제에서 더 관대해지고, 구조의 문제에 대해 더 엄격해져야 한다.
요즘 군대가 옛날 같지 않다는 얘기가 쏟아져 나오지만 남자들은 "그렇게 좋으면 댁이 가라"는 반응이다. 새로운 방식의 군가산점제 논의가 일고 있지만, 여성부는 "기존 입장과 달라진 바가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장애인 등 군면제자와 여성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도 제대로 보상해 줄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내 이 논의에서만큼은 주도권을 쥘 필요가 있다. 남성들은 '여자들'이 자기들 인생에 '딴지'를 걸어왔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늘진 곳의 여성의 삶은 더욱 어두워지고 있고, TV에서는 섹스어필이 넘치고 이에 집단적 '성폭력적 언어' 역시 나날이 강도가 세지고 있다. 이런 '사소한' 일도 신경 써야 한다. 이런 문화적 행위는 여성 법관 늘어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여성부가 되지 않으려면, 가까운 문제부터 주도권을 잡아가야 한다. 그것도 못하면 정말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박은주 엔터테인먼트부장
- 고석태 스포츠부 차장대우
-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tjoh@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