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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피멍
장반장의 하마 같은 몸에 깔려버린 정순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쳐보지만 노동판 험한 일에 평생 다져진 그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다. ‘놔!’ ‘아이고! 그것 참! 요사스럽게.’ 장반장의 우둘투둘한 시커먼 손이 정순의 옷을 벗기기 시작한다. 반짇고리는 벌써 멀리 나둥그러져 버렸고, 정순은 바닥에 떨어진 바늘을 찾는다. 바늘에 꿰어 있던 실이 손가락에 닿는다. 그리고 정순은 장반장의 옆구리를 바늘로 힘껏 찌른다. ‘아!’ 장반장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자빠진다. ‘아니! 이년이!’ 장반장은 정순의 몸 위로 다시 올라타며 그녀의 얼굴을 세게 내리친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려는 그녀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내리친다. ‘이런! 잡부년이 곱게 남자 맛이나 좀 볼 것이지!’ 정순의 코와 입술에서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하고 더 이상 움직이지도 못한다. ‘이년아! 곱게 있어. 내가 힘 좀 써 줄 테니까.’ 장반장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시 정순의 몸을 덮친다. ‘제발......’ 정순은 더 저항할 힘도 말할 힘조차 없다. 이제 정순의 가슴까지 하얗게 드러나고 있다. 음흉한 장반장의 눈빛이 색욕에 야수처럼 이글거리고 있다. ‘뭐야!’ 숙소 밖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문을 세차게 걷어차는 소리와 함께 남자들이 몰려 들어온다. ‘야! 이 새끼!’ 이대리가 몸을 날려 장반장의 옆구리를 걷어차 버린다. 그리고 바닥에 뒹구는 그의 배를 마구 짓밟는다. ‘이 개만도 못한 새끼!’ 직원들은 장반장의 두 팔 그리고 두 다리를 꼭 붙잡고 이대리는 그의 배에 올라타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으스러지도록 때리고 있다. 인부 중 제일 나이 많은 한씨가 정순의 가슴을 가리어주며 입술에 흐르는 피를 닦아주고 있다.
멍투성이가 된 얼굴로 정순은 멍하니 맥없이 그렇게 마루에 앉아있다. 천두는 설희를 업고 엄마 뒤에 서서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다본다. 밤하늘에는 아랑곳없이 별이 쏟아지고 있다. ‘천두엄마!’ 장경사와 이대리가 집으로 들어온다. ‘장반장 그 놈은 서로 데려갔네. 자네 괜찮은가? 병원에 가야지?’ 정순은 넋을 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대리는 미안한 마음에 그녀의 얼굴을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발로 땅바닥만 긁고 서있다. ‘주강이한테 연락할까?’ ‘아뇨! 안돼요.’ 그제야 정순은 입을 연다. ‘자네 어쩌려고 그러나? 오늘도 이대리 이 사람이 눈치 채지 못했으면 큰일 날 뻔 하지 않았는가? 서울로 가지 그러나?’ ‘아주머니. 저희가 회사트럭으로 이사를 해드릴 테니 가시죠?’ ‘아뇨. 벌써 이사할 곳을 정해두었어요. 차도 있고......’ ‘자네 어디로 가려고 그러는가?’ 장경사는 자꾸 한숨만 나온다. ‘전주요.’ ‘전주? 거기 아는 사람이 있는가?’ ‘예. 살 곳이 있어요.’ 장경사와 이대리는 조용히 정순의 집을 나온다.
며칠 후, 조씨가 그의 삼륜차에 짐을 싣고 있다. 그저 옷가지와 작은 경대 그리고 임원장의 자전거, 별다른 이삿짐도 보이지 않는다. ‘천두엄마! 다 됐네.’ 조씨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정순을 부른다. ‘예.’ 조씨는 잔뜩 멍든 정순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딴청을 부린다. ‘비라도 오면 난리니 어서 가세.’ ‘예.’ ‘아주머니!’ 이대리가 허겁지겁 달려온다. ‘이제 가시는 겁니까?’ ‘예.’ ‘저기... 이거.’ 이대리는 봉투 하나를 그녀에게 내민다. ‘이게 뭐예요? 이대리님.’ ‘죄송합니다. 저희 회사에서 사죄의 뜻으로 좀 준비했습니다.’ ‘아뇨! 싫어요.’ ‘아주머니. 장반장 그 놈은 철장에 갇히면 돼지만 저희가 아주머니한테 끼친 폐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제발 받아주십시오. 제가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대리님이 무슨 잘못이 있어요? 전 이제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요.’ 정순은 설희를 안고 삼륜차에 타버린다. 천두는 짐칸 옷 보따리에 기대어 앉아있다. 어린 녀석의 표정이 정말 우울하다. ‘아주머니! 받으셔야 합니다.’ 이대리는 돈 봉투를 정순의 무릎 위에 던져버린다. ‘왜 이러세요?’ ‘아주머니! 제 명함 꼭 갖고 계세요. 제가 언젠가는 꼭 신세를 갚겠습니다.’ 그리고 이대리는 돌아가 버린다. ‘천두엄마. 그냥 받게. 돈도 필요하지 않는가.’ 조씨의 삼륜차가 천천히 움직인다.
마을을 지나 이제 읍내로 가는 길. 덜컹거리는 삼륜차 안의 정순은 눈물을 글썽인다. 조씨는 모르는 척 앞만 보고 삼륜차를 몰고 있다.
9년 전 그날, 커다란 가방 하나를 들고 앞서 걸어가는 임원장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의 뒤를 불룩한 배를 잡고 따라가던 그 옛날 정순의 모습. 처음 그길로 정순은 임원장을 따라 걸어왔었다. ‘좀 쉬었다 가겠는가?’ 뒤를 돌아보며 그녀에게 말을 했던 임원장의 그 모습. 희끗한 머리카락.
길 따라 일어나는 뿌연 흙먼지에 정순의 추억이 다 뿌려지고 있는 것 같다. 임원장도 떠나고 이제 정순도 그 길 그 마을을 떠나고 있다. 천두는 짐칸에 앉아 혼자서 노래를 부른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세월 한잔 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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