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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 캐스팅: 김상중, 최정원, 고은미>
50. 불
묵묵히 길을 걷는 송형사의 모습을 허반장이 쳐다본다. '송형사.' '예.' '아까 한박사지?' 송형사는 허반장을 쳐다보지 않는다. 시무룩하기만 하다. '너 잤지? 한박사하고.' '아......' '릴리코스, 그 향수 냄새가 너한테 날 일이 없잖아.' '릴리코스요?' '우리 집사람이 신혼 때부터 오래 쓰던 거라 내가 알지. 한박사는 그 향수를 쓰거든. 그래, 그래서 나도 우리 애 엄마 생각이 났었다. 그 냄새 맡으면.' '참! 좀 어떠세요? 병원에?' '잘 모르겠다. 나도.' 허반장도 역시 침울한 표정으로 길을 걷는다.
낚시터 홍사장은 그의 처가 만든 음식을 열심히 식탁으로 옮기고 있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단골손님 낚시꾼들. '빨리해! 손님들 오겠어.' '어휴! 다 했어요. 매운탕만 조금 더 끓이면 돼요. 웬 난리야?' '아! 지금 우리가 밥 굶게 생겼는데 단골손님들마저 놓치면 어쩌라는 거야!' '저녁밥상 몇 분 늦는다고 뭐가 어떻게 되요?' 그리고 그의 아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들어온다. '좌대 청소 다 했냐?' '다 했어요.' 아들은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아버지.' '왜?' '손님들 자꾸 귀신 본다는데 그거 정말 아니에요?' '시끄러! 귀신은 무슨 얼어 죽을!' '아니, 이젠 애 귀신도 아니고 여자귀신이라잖아요. 여자!' '야! 입 다물어. 그나마 있는 손님도 끊으려고 그러냐?'
초저녁 홍사장의 낚시터 외진 자리에 낚시꾼 세 사람. '슬슬 밥이나 먹으로 가지. 시간 다 됐어.' '그래. 가자구. 어이! 가자니까!' '잠깐만!' 한 낚시꾼은 이상하게 움직이는 찌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해가 져야지! 여긴 날 밝으면 안 된다니까.' '가만......' 그리고 그는 힘껏 낚싯대를 잡아당긴다. '어! 어!' '뭐야!' 낚싯대는 부러질 것 같이 휘어지고 있다. 있는 힘을 다해 끌어당기고 있는 낚시꾼. 서서히 끌려나오는 그 무엇이 수면위에 물결을 만들고 있다. '뭐야?' 그리고 한 사람이 낚싯줄을 당기며 가까이 다가가 가본다. '이거 뭐야?' 그리고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을 보았다. '으악!' 세 낚시꾼은 모두 뒤로 자빠지듯 몸을 피한다. 하얗게 부풀어 오른 여인의 시체. 퉁퉁 불어터진 그 얼굴에는 물고기에 헝겊처럼 뜯긴 자국들이 처절하게 드러나 보이고 있다.
사무실로 들어오고 있는 허반장과 송형사. '반장님!' 이형사가 그에게로 뛰어온다. '왜?' '지금 막 신고 들어왔는데요.' '무슨 신고?' '윤예미 찾았습니다.' '뭐? 정말?' '예. 저수지에서 시체로 발견됐습니다. 방금 전에요.' '확인했어?' '낚시터 부부가 확인했답니다.' 허반장은 고개를 젖히며 한숨을 내쉬기만 한다.
상하이 푸동 샹그리라 호텔, 장민수는 화장대 위의 작은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다. 슬며시 미소 짓는다. 그리고 혼자 아주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이만하면 잘 됐지? 안 그래? 마이클.' '그래, 그 애니라는 계집애가 허튼 짓만 안했으면 더 좋았을 걸.' '흐흐흐흐. 할 수 없지. 원래 그런 계집이니까.' '이제 다 된 거지? 기준아. 그렇지?' 갑자기 장민수의 표정이 어린아이처럼 부드러워 진다. '아직......' 그리고 그는 옆에 세워져있는 기다란 전신거울을 바라본다. '아버지.' '기준아, 아직 한 놈 남았지 않냐.' '운전기사 아저씨요?' '그래. 그 놈. 네 엄마 고향 친척. 장민수.' '그 아저씨가 우릴 배신한 거죠?' '그래. 그놈이 내 유서를 없앴어. 돈도 보석도 다 훔쳐가고 네 외삼촌한테 유서를 몰래 갖다 주었다. 그리고 넌 고아가 된 거야.' '난 어떻게 살아난 거죠? 누가 불을 질렀어요? 아버지.' '기억나지 않냐? 기준아. 누가 불을 질렀냐?' '그 아저씨가 불을 질렀나요?' '넌 그때 자고 있었다. 내가 수면제를 먹였거든. 영식이 그놈은 알고 있었어. 영식이가 너를 구했을 거다.' '기억나지 않아요. 난 기차역에 혼자 서있었어요.' '기준아! 불쌍한 내 아들......' 그리고 초인종소리가 들린다. 눈을 찡그리며 정신을 차리는 장민수. 천천히 문 쪽으로 향한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문을 연다. 한 여인이 서있다. 장민수의 눈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반짝인다. '왔군. 한박사.' 그녀는 대답 없이 안으로 들어오며 그에게 안긴다. '내가 기억 못 할 줄 알았어요? 다 기억해요. 당신 냄새까지.' 그녀는 장민수에게 입을 맞춘다. 그리고 잠시 혼을 빼앗긴 듯 힘을 잃어버렸던 한수희가 다시 그를 똑바로 바라본다. '찾았어요.' '찾았어?' '여기 상하이 변두리 아파트에 숨어있어요. 장진수.' 장민수는 눈썹을 씰룩이며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다시 입을 맞춘다.
며칠 후 오전 무렵, 송형사는 입을 꼭 다문 채 허반장의 승용차를 몰고 있다. 허반장 역시 아무 말 없이 조수석에 앉아있다. 한참동안의 침묵이 어색했는지 송형사가 허반장을 힐끔 쳐다본다. '반장님, 한박사 지금 뭐 할까요? 어디 있을까요?' '왜 궁금하냐?' '아뇨 그냥......' '가고 싶은 데로 갔겠지. 그리고 하고 싶은 거 하겠지.' '하긴 그렇겠네요.' '빨리 가자! 부검 했다잖아.' '예! 반장님.' 그리고 차는 다시 속도를 높인다. 갑자기 허반장이 얼굴을 찌푸리며 작게 신음소리를 낸다. '왜 그러세요? 어디 아프세요?' '아...... 아랫배가 또 아프네. 신경성이라던데.' '많이 아프세요?' '야! 안되겠다. 저기 주유소에 좀 세워라.' 국도변 주유소 앞에 차는 멈춘다. 그리고 서둘러 차에서 내린 허반장이 다시 돌아선다. '거기 휴지 좀 꺼내줘라. 화장실에 없으면 골치 아프다.' '예.' 송형사는 조수석 앞 글러브 박스를 열어 그에게 휴지를 건네준다. 그리고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는 허반장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는다. 그런데 박스 안에 있는 검은 비닐봉지가 그의 눈에 잡힌다. '뭐지?' 검은 비닐봉지에 돌돌 말려있는 알 수 없는 기다란 물건. 송형사는 그것을 풀어본다. '어!' 피 묻은 칼, 그 핏덩어리는 이미 손잡이까지 다 말라붙어 있다. 송형사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멀리 걸어가는 허반장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주유소 옆 공터, 허반장은 갑자기 현기증을 느낀다. 눈을 감고 머리를 마구 흔든다. 그리고 눈을 뜬 허반장, 주위를 둘러본다. '여기가 어디지? 내가 지금 어디 있는 거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당황한 그의 숨이 가빠지고 있다.
상하이 외곽, 작고 낡은 어느 아파트 일층, 금이 간 유리창으로 불길이 번져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현관문이 열린다. 여인의 검은 구두 그리고 검은 핸드백, 검은색 장갑. 여인은 핸드백을 연다. 그리고 현관 앞에 슬며시 내려놓는다. 신문지로 접은 고깔모자. 여인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건너편 도로 멀찍이 검은색 승용차를 세우고 기다리고 서있는 남자, 장민수.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한수희도 역시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그녀는 그를 보며 미소 짓는다. 그리고 둘은 그 차에 탄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라져간다. 그 불길은 점점 더 거세지고......
고깔모자 끝.


<허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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