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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책가방
오사카 간사이공항, 나실장이 입국수속을 마치고 작은 여행가방 하나만 달랑 맨 채 걸어 나오고 있다. 어딘가 모르게 긴장한 모습이 엿보인다. 발을 멈추고 그는 주변을 둘러본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리자 바로 앞에 한 여인이 방긋 웃으며 서있다. 바로 그녀 이진경. '오래간만이야. 나선국.' '허허허허.' 둘은 웃으며 악수를 하지만 두 사람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맴돌고 있다. '히야! 하나도 안 늙었네. 이진경!' '그래! 자기도 그대로인데 뭘.' '와! 그냥 비싼 명품으로 쫙 빼입었네. 죽이는데.' 잠시 머뭇거리던 나선국은 이진경을 와락 안아버린다. 그리고 나선국은 아주 작게 속삭인다. '딱 한번만 안아보자. 괜찮지?' '그래.' 이진경의 눈에서 조용히 눈물이 흘러내린다.
소희의 표정이 많이 밝아졌다. 멀리 떨어져있는 두희를 한번 보고는 정미에게 말한다. '원장님, 우리 실장님 지금쯤 그분 만나셨겠죠?' '그렇겠지. 두 사람 기분이 지금 어떨까?' '얼마나 설렜을까요? 그렇게 오랫동안......' '아마 둘 다 울었을 거야. 말은 못해도. 바보처럼 왜 그렇게 사랑을 했는지 둘 다.' '치!' '응?' '원장님은 더 하잖아요?' 살롱으로 누군가 조용히 들어오고 있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 하나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는 입을 꼭 다문 채 서있다. 소희가 미소 지으며 아이에게 다가간다. '머리 하러 왔니? 혼자? 벌써 학교 끝났어?' 아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그럼?' 아이는 천천히 손을 들어 정미를 가리킨다. '저기 저 아줌마가 여기 원장님이에요?' '응? 맞는데. 왜?' 정미는 한참동안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가 뭔가 느껴지는 것이 있는지 아이에게로 온다. '나 만나러 왔니?' 아이는 슬픈 눈동자로 정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정미와 아이는 소파에 앉는다. '너... 태훈이 오빠... 맞지?' 아이는 또 고개만 끄덕인다. 정미는 미소를 지어 보인다. '이름이 뭐니?' '진희요. 김진희.' '나한테 할 말이 있어서 왔구나?' 정미는 아이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얹는다. '우리 엄마 아빠 매일 싸워요. 이혼한데요. 아빠가.' '다 들은 모양이구나. 저기 내가......' '아빠가 이제 안 참아요. 우리 엄마... 우리 엄마는 아빠 많이 피곤하게 해요. 나도 알아요. 엄마가 나빠요.' '그러니?' '그런데 아줌마, 원장님 보고나서부터 달라졌어요. 아빠가 이제 막 화만 내요. 매일 술 마시고 들어와서 싸워요. 다 꼴 보기 싫다고.' '그래. 미안하구나.' 정미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지난번부터 엄마가 잘못했다고 비는데도 아빠가 화만 내요. 집을 나간 데요. 아빠가요. 이젠 엄마도 매일 울어요. 방에 누워서 맨날 울기만 해요. 밥도 안 먹어요. 그래서 우리 강아지 밍키도 굶어요.' 정미는 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엄마가 막 소리쳤어요. 아빠가 한 번도 아줌마만큼 사랑해준 적도 없다고 막 그랬어요. 그래서 다 너무 밉데요. 아줌마도 아빠도.' '그랬어? 진희야 나는......' '아줌마! 나 아빠랑 그냥 살고 싶어요. 엄마가 나랑 헤어지지 않을 거래요. 그럼 아빠랑 헤어져야 하잖아요.' 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바르르 떨고 있다. '그래, 진희 아빠랑 헤어지면 안 되지.' 정미는 아이의 눈물을 살며시 닦아준다. '우리 엄마 나쁘지만 아빠 무지 좋아해요. 아줌마, 다른 사람하고 결혼하면 안 돼요? 예?' 정미의 눈동자에도 슬픔이 가득하다. '그래. 아빠는 진희하고 살아야지. 그래. 그래야지.' 정미는 아이를 꼭 껴안아준다. 살롱식구들은 그 모습을 측은하게 바라보고만 있다.
오사카에도 또 하루가 지났다. 늦은 오후 간사이공항, 나선국이 티케팅을 마치고 돌아선다. 얼굴에는 표정이 하나도 없는 것만 같다. 이진경이 뛰어오고 있다. '응? 벌써 왔어?' 나선국이 어색하게 씩 웃어 보인다. '아니, 왜 벌써 간다는 거야? 겨우 하룻밤?' '응. 살롱일도 바쁘고 뭐......' '오늘 좀 돌아다니려고 그랬는데. 왜? 나 더 보기 싫어?' '그래. 더는 보기 싫다. 어쩔래?' '여전히 바보 같구나.' '뭐 남의 마누라 한번 봤으면 됐지. 어쨌든 어제 저녁 정말 잘 먹었다. 일본이 비싸긴 무지하게 비싸두만. 허허허허.' '괜히 딴소리 하지 말고.' 그리고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고 이제 나선국은 출국수속장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둘은 어색하게 마주서있다. 그래도 나선국이 먼저 말을 꺼낸다. '저기... 다음에 또 보자구.' '언... 언제?' '뭐... 환갑 때쯤?' '뭐?' '시간 금방 지나가. 금방 간다니까. 우리도 이제 쉰이 넘었잖아.' '그래.' 나선국은 진경의 얼굴을 한번 만져보려다가 손을 멈추고 만다. '나 갈게!' 그리고 그는 돌아선다. 그리고 입을 꼭 다물고 걸어간다. '나선국!' 진경이 소리쳐 부른다. 나선국이 돌아본다. '결혼하면 행복하게 살아야 돼! 그 여자 행복하게 해주고! 알았어! 안 그러면 죽어!' '허허허허. 그래! 너도 예쁘게 늙어야 돼! 환갑 때 봐서 쪼글쪼글하면 혼날 줄 알아!' '그래! 잘 가! 안녕!' 진경은 손을 높이 쳐들며 흔든다. '안녕! 잘 있어!' 웃으며 돌아서는 나선국 그리고 이진경, 둘은 이미 울고 있다.

저녁이 지나고 밤이 되어 가고 있는 마르셀 살롱, 스텝들 모두가 퇴근도 하지 않고 모여 있다. 유빈이가 앙증맞게 미소 지으며 정미에게 묻는다. '원장님, 실장님 정말 벌써 오시는 거예요? 겨우 하루?' '그러게 말이다. 지금 온다고 꼼짝 말고 전부 기다리라고 그러시잖아. 도대체 뭐가 그렇게 급하신 거야?' 하지만 두희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져있다. 소희가 그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웃는다. '어머! 언니 좀 봐. 실장님 오신다니까 그냥 얼굴에 꽃이 피네.' '얘는! 내가 언제.......' 유빈이가 갑자기 손뼉을 친다. '아! 맞다! 실장님이 두희 언니랑 결혼하는 거 공식발표하시려나 보다. 그렇죠? 원장님.' '그러게.' '맞아요! 실장님이 우리들한테 한번 쏘시려고 그러는 거예요.' '얘는 무슨... 공식발표까지... 호호호호.' 두희는 부끄럽지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다. 그리고 나실장이 활짝 웃으며 들어온다. 커다란 쇼핑백을 한가득 들고서는. '헬로우! 에브리 바디! 곤이찌와!' 두희는 너무 반가워 벌떡 일어선다. '실장님!' 유빈이도 소리치며 반긴다. '허허허허! 내가 돌아왔도다! 컴백! 베이비!' 그리고 나실장은 넉살좋게 춤까지 춰가며 스텝 모두에게 선물을 나누어준다. 모두가 신이 나서 선물을 열어보는데. 두희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 '난 왜 없어요?' '에이......' 나실장은 씩 웃더니 호주머니에서 보랏빛 작은 상자를 꺼내어 보여준다. '어머! 반... 반지?' '우와! 두희 언니 좋겠다!' 유빈이는 제가 좋아 마구 떠든다. '진원장! 우리 오늘 파티하자!' '파티?' '내가 쏜다. 우리 노두희하고 나하고 결혼발표 기념! 오케이?' '예! 오케이!' 스텝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한다. '어? 그런데 우진창, 이 인간 어디 갔어?' 나실장이 두리번거린다. '어? 아까 공항에서 통화했는데 아직 안 왔어?' 때마침 우진창이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들어온다. '실장님! 축하합니다!' '허허허허. 넌 양반되긴 틀렸다.' 그리고 진창은 꽃다발을 두희에게 준다. '형수님! 축하합니다. 흐흐흐흐.' '고마워요. 우대리님. 호호호호.' '야! 넌 꽃 주면서도 그렇게 웃냐? 에이!' '흐흐흐흐. 실장님 괜히? 좋아 죽겠으면서?' '허허허허.' 어린 유빈이가 또 나선다. '실장님 우리 어디 가요? 예?' '유빈아, 우리 오래간만에 몸 좀 풀까?' '클럽?' '오케이!' '우와!' 스텝들은 또 좋아 난리가 났다. 정미도 환하게 미소를 짓고 있다. 우진창은 자꾸만 그 모습을 쳐다본다.
그리고는 살롱식구들 모두가 밖으로 나와 길가에 서있다. '우대리는 진원장이랑 같이 오고, 우리는 나눠서 택시 타고.' 나실장이 말한다. '어? 경차라도 두엇 더 탈수 있는데.' '에이. 우대리는 진원장하고 오붓하게 와. 허허허허.' '예!' '자! 우린 택시 잡으러 가자! 출동!' '예! 실장님!' 나실장을 따라 스텝들은 몰려가고 두희는 은근슬쩍 나실장의 팔짱을 끼며 그에게 매달린다. 둘만 남은 우진창과 진정미, 스텝들의 모습을 쳐다보고 있다가. '진원장, 우리도 갑시다.' '그래요.' 그리고 막 돌아서 걸으려는데 태훈과 그의 딸 진희가 손을 잡고는 바로 건너편에 서있다. 놀라는 정미의 모습을 보고 진창은 어쩔까 망설이고 있다. 태훈은 조용히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리고 진희가 살짝 손을 들어 흔든다. 정미도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든다. 아이가 예쁘게 웃는다. '우리 가요! 진창씨.' 정미가 우진창의 팔을 잡는다. '그럽시다.' 진창도 입술을 꼭 다물며 미소 짓는다. 자기 팔을 붙잡은 정미의 손을 살며시 잡아본다. 그리고 진창의 작은 차에 탄 정미가 백미러로 태훈과 진희의 모습을 보고 있다. '정미씨, 보기 좋죠? 아빠와 딸.' '그래요. 보기 좋아요.' 아빠와 딸은 점점 멀어져만 간다. '자! 정미씨! 이젠 우리도 갑시다!' '이제 정미라고 하지 마요. 난 장화예요. 진장화.' '흐흐흐흐. 알았어요. 장화씨.' 진창이 시동을 건다.
진창의 차가 스텝들과 약속한 클럽 가까이 거의 다 왔을 때. '진창씨, 잠깐만 세워 봐요.' '왜요?' 진창이 길가에 차를 세운다. '나... 나 나쁘죠?' '뭐가? 흐흐흐흐.' '우리... 수녀님께 갈래요?' '예? 우리 마리아엄마?' 장화는 고개를 끄덕인다. '가서... 가서 우리 결혼하겠다고 말씀드릴래요?' '정말? 지... 지금?' 우진창은 너무 놀라 말을 더듬는다. '지금. 지금 빨리 가요. 우리.' '아니 왜 갑자기?' '응. 가만 생각해보니까 그 책가방 다른 여자 주기 싫어서.' '으하하하하!' 우진창이 처음으로 크게 너털웃음을 웃는다. 그리고 그는 차를 돌린다. '히야! 우리 세실리아 이모가 말이죠. 소머리국밥 분점을 근처에 냈는데 거긴 24시간 영업이래요. 가서 한판 먹고 갑시다. 이젠 진짜 공짜다! 공짜! 하하하하!' '그래요. 갑자기 배고파져요. 빨리 먹고 싶다. 빨리 가요.' '그럽시다! 달려라! 고!' 그리고 우진창의 핸드폰이 울린다. 나실장이다. '야! 우대리 왜 안 와? 어디야?' '실장님! 우린 안 갑니다. 흐흐흐흐.' '뭐? 왜 안와? 내가 쏜다니까.' '실장님! 우리도 결혼 발표하러 우리 엄마한테 갑니다.' '뭐? 지금?' '예! 지금 달리고 있습니다. 하하하하.' '정말이야? 허허허허.' '에이. 그래도 제가 더 젊은 데 제가 먼저 결혼해야 되지 않겠어요? 흐흐흐흐.' '야!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가 먼저 발표했는데!' '그럼 우리 같이 할까요?' '뭐? 같이? 허허허허.' '하하하하!' 밤이 내린 국도를 달리는 진창의 작은 차에는 이제 기쁨과 행복만이 가득하다. 너무나 아픈 시간을 살아온 두 사람이었기에.
-옴니버스 하루살이 시리즈 '뷰티살롱' 끝-

<가상 캐스팅: 조형기,손현주,이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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