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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니버스 하루살이 - 애인 있어요 18. 끝    2009/04/01 10:41 추천 0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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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_박진희_김민준[1].jpg

<가상 캐스팅: 김민준, 박진희>

 

18. 애인 있어요.

 

그리고 여러 날이 지났다. 은진은 모든 것을 잊으려는 듯 하루하루 일에만 매달리고 있다. 저녁이면 바닷가를 산책하고 또 목적도 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다가 밤이 되어서야 자취방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늘 힘없이 쓰러져 잠이 들어버린다.
퇴근시간이 거의 다 되어 갈 무렵.
'언니, 전화.'
'누군데?'
'황원장님 이시라는데.'
은진은 조금은 놀란다. 그리고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한간호사.'
'예. 안녕하셨어요?'
'내가 전화 안 한다고 정말 이럴 거야?'
'죄송해요. 원장님.'
'죄송은 그만두고. 잘 지내지?'
'예. 잘 지내요.'
'참 잘도 지내겠다? 무슨 궁상을 또 떨고 있는지 알게 뭐야.'
'아녜요. 저 괜찮아요.'
'그럼 내일 올라와.'
'예?'
'결혼식 안 갈 거야? 내일이잖아.'
은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한간호사, 깨끗하게 하자. 이왕 다 이렇게 된 거 깨끗하게.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축하해줘.'
'저는 아직......'
'아직 뭐? 이제 뭘 어쩔 건데? 아직도 미련이 있어?'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그럼 당당하게 가. 그리고 털어버려. 지워버려. 이제 그만 끝내. 어차피 다 끝났어. 인정해.'
그렇게 한참 은진은 통화를 한다. 갑자기 우울해 보이는 은진의 모습에 후배는 차마 말을 걸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원장이 나온다.
'한간호사, 내일 무슨 일 있다며?'
'예?'
'황원장이 그러던데, 내일 올라가야 한다고.'
'아뇨 그게......'
'진작 얘기하지. 내일 하루 쉬어. 올라갔다와.'
'아뇨 저는......'
'괜찮아. 어차피 토요일인데 뭘. 나 먼저 갈게. 그럼 한간호사는 월요일날 봐.'
원장은 병원을 나간다.
'언니, 갔다 와요. 무슨 일 있나본데.'
'글쎄......'

 

다음날 아침 은진은 유난히 일찍 눈을 떴다. 갈매기의 울음소리가 왠지 더 크게 들리는 것만 같다. 눈을 뜬 채 꼼짝도 하지 않고 그냥 누워있다. 그리고 파도소리가 유리창을 두드린다.
샤워를 하고 나서도 은진은 멍하니 방에 앉아 있다. 그렇게 얼마나 앉아있었을까, 은진은 화장을 하기 시작한다.
여느 때와는 달리 더 예쁘게 차려입은 그녀는 집을 나선다. 바닷바람이 더 세게 불어오고 은진은 택시를 잡는다.
'어서 오세요.'
'아저씨, 공항이요.'
택시는 제주공항으로 달린다. 은진은 눈을 감아본다.
그리고 은진은 강남의 어느 웨딩홀 앞에 도착했다.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 속의 그녀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
'너 은진이지?'
누군가 그녀를 건드린다. 두어 살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
'은진아! 나야. 유정이.'
'어머. 그래. 유정아.'
'어머! 얘 너 정말 오래간만이다. 몇 년 만이니.'
'응. 정말.'
은진은 아이를 쳐다본다. 저절로 미소가 나온다.
'우리 딸. 예쁘지?'
'그래. 너 많이 닮았다.'
아이는 제 엄마의 목을 더 꼭 껴안는다.
'너 결혼 아직 안했지?'
'응.'
'너도 빨리 해라. 오늘 영린이 보내니까 이제 다음은 너다.'
하지만 은진은 아이만 보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뭐해? 들어가자.'
얼떨결에 은진은 친구와 함께 웨딩홀로 들어간다.
유정은 말한다.
'영린이 대단해. 몇 년을 기다린 거니. 그 도훈선배 말이야.'
'그래.'
'너도 그 선배랑 친하잖아? 그렇지?'
'응.'
멀찍이 턱시도를 차려입은 도훈이 보인다. 그의 부모와 함께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어머. 역시 멋있다. 저 선배 참 멋있어. 그렇지?'
유정은 걸음을 서둘러 도훈에게로 가고 있다. 하는 수 없이 그 뒤를 쫓아 천천히 걷고 있는 은진.
'선배!'
유정을 쳐다보던 도훈의 시선이 은진에게로 오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유정은 도훈의 부모에게 인사를 하고서는 떠든다.
'선배 축하해요.'
'응. 그래. 고마워.'
그리고도 도훈의 시선은 다시 은진에게로 온다. 하지만 도훈의 엄마가 은진을 반긴다.
'은진이 왔구나!'
'안녕하세요?'
'그래. 아니 정말 너 제주도로 갔니?'
'예.'
'왜? 그렇게 멀리 왜 갔어?'
'그냥요. 거기가 좋아서요.'
'아휴. 너무 멀다. 얘.'
도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아버지가 은진에게 말한다.
'잘 왔어요. 못 오는 줄 알았는데. 영린이가 참 좋아하겠네.'
아버지는 은진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대어본다.
'신부대기실에 들어가 보지. 아 참! 사돈 분들에게도 먼저 인사를 드려야지.'
신부대기실, 영린은 너무나 화려한 웨딩드레스를 입고 한 가운데 앉아있다. 일찍 온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은진과 유정이 들어선다. 유정은 또 큰소리로 말하고.
'영린아! 축하해!'
영린은 은진을 보고 잠시 웃음을 멈춘다. 유정과 다른 친구들은 수다를 떨고 있다. 영린에게로 가까이 다가가는 은진은 아주 서서히 미소를 짓기 시작한다.
'축하해. 영린아.'
영린도 미소를 지으며 은진의 손을 잡는다.
'고마워.'
둘은 아무도 모르는 둘만의 눈빛을 주고받는다.
'어머! 너 은진이 정말 오래간만이다. 어디 파묻혀 지내니?'
한 친구가 은진의 팔을 흔들며 말한다.
'너 살아있었구나?'
'어쩌면 그대로니?'
모두들 은진을 보며 한마디씩 하고 있다. 하지만 은진과 영린은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다. 그리고 은진은 영린의 볼을 살짝 만져본다.

예식장 안, 친구들과 뒤섞여 앉아있는 은진이 보인다. 신랑입장, 도훈이 박수를 받으며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다. 은진은 그냥 똑바로 앞만 바라본 채 어설픈 박수를 친다.
그리고 신부입장, 은진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아버지와 팔짱을 끼고 들어오고 있는 영린을 바라본다. 은진의 눈에도 아름답기만 하다. 가늘게 한숨을 내쉬어본다.
웅성대는 소리가 은진의 귀에 들려오고 은진은 지난 시간들을 그려본다.
자취방에서 처음 도훈을 보았던 그 순간, 캠퍼스 안에서 몰래 도훈을 찾아 훔쳐보았던 일들 그리고 가슴조이며 바라보았던 도훈과 영린의 모습들 그리고 초라하기만 했던 자신의 그 모습들, 그 모든 것을 되새겨본다.
은진이 추억에 잠겨 있는 사이 예식은 벌써 끝나가고 있다.
신랑신부 행진, 하객들의 박수소리가 울린다. 은진도 이제 힘껏 박수를 쳐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눈물이 핑 돈다.
'어머! 은진아 네가 왜 우니?'
'응? 아니. 좋아서. 응.'
'얘! 너 빨리 시집가야지 안 되겠다.'
그리고 식장 안은 어수선해진다. 서둘러 나가는 사람들 그리고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사람들이 모인다.
식장 앞 멀리 도훈과 영린이 다시 보인다. 플래쉬는 터지고 사람들은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다.
'은진아, 우리도 찍자. 이제 친구들인가 보다.'
'그... 그래.'
앞으로 몰려가는 친구들 뒤에 망설이며 서있던 은진은 조용히 돌아서 나온다. 은진의 뒷모습을 영린이 보았다. 그리고 도훈도 슬쩍 한번 보았다. 하지만 둘은 다시 웃으며 하객들과 인사를 한다.

 

웨딩홀을 빠져나와 쓸쓸히 홀로 걷고 있는 은진,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자꾸만 한숨이 나온다.
건널목, 은진은 멍하니 선 채 신호등이 바뀌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얘!'
누군가 그녀를 붙잡는다. 친구 유정이다.
'너 왜 그냥 가니? 밥 먹고 가야지.'
'응. 그냥 좀......'
'같이 가자. 저기 식당이래. 애들 벌써 다 갔어. 가자! 우리 딸 기다린다.'
유정은 은진의 팔을 끌어당기려 하지만.
'아니 난 그냥 갈 게.'
'얘! 얼마 만에 만났는데 그냥 가니? 빨리 가!'
유정의 성화에 은진은 따라갈 수밖에 없다.

피로연을 마치고 친구들과 함께 막 식당을 나오려는 은진이 뒤를 돌아본다. 멀찍이 어느 테이블 앞에 서있는 도훈이 보인다.
도훈도 은진의 시선을 느꼈을까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보이며 미소를 짓는다. 은진도 미소로 답한다.
그때 영린이 도훈에게 다가오고 있다.
'오빠, 애들 어디 갔어?'
'응. 전부 갔어. 지금 막.'
'은진이......'
도훈은 말없이 손짓만 한다. 영린은 멀어져가는 은진의 뒷모습을 보고 쫓아가려하지만 도훈이 영린의 팔을 붙잡는다.
'우리 외가식구들한테 인사드려야지.'
'그... 그래. 오빠.'
이제 은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은진과 친구들은 호프집에서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은진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만 같다. 그저 반사적으로 웃어줄 뿐이다. 그리고 한 친구가 외친다.
'야! 우리 오백씩만 더 하자!'
'너 또 시작이니?'
'야! 안주도 없어. 하나 더 시켜.'
'안주는! 배부른데 서비스안주 달라고 하면 되지.'
'그래. 그냥 오백씩만 더 시켜.'
'아저씨!'
여자들은 서로 잘났다고 떠들어대고 있다. 은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가끔씩 친구의 어린 딸과 눈을 마주치는 것이 전부이다. 그리고 종업원이 커다란 그릇에 안주를 가져온다.
'뭐야? 겨우 뻥튀기?'
친구들은 또 떠들기 시작한다.
'그럼 뭐 서비스 안주에 소시지라도 줄 줄 알았어?'
'에이. 뻥튀기가 안주야? 먹으나 마나잖아.'
은진은 제일 먼저 뻥튀기 한입을 베어 먹는다.
'어머. 얘 뻥튀기 좋아하나봐?'
친구의 딸이 은진을 보고 웃는다. 그리고 은진은 갑자기 벌떡 일어난다.
'얘! 너 어디 가? 은진아.'
'응. 나 먼저 좀 갈게.'
'어머. 얘 좀 봐. 갑자기 왜 이래?'
'미안해. 갈 데가 있는데 깜빡했어.'
'얘! 좀 있다 같이 가.'
'아냐. 가야 돼. 미안. 나중에 또 보자.'
은진은 허겁지겁 자리를 벗어난다. 친구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소곤거린다.

 

어느새 해는 지고 어두워졌다. 은진은 뮤직하우스가 있는 길 건너편 건널목에 서있다. 길을 건너며 대로변에 서있는 작은 트럭을 본다. 뻥튀기를 파는 할아버지.
'할아버지 이거 얼마에요?'
은진은 아주 커다란 뻥튀기 봉지를 가리킨다.
'그거 오천 원.'
'하나 주세요.'
은진은 제 몸 반은 되어 보이는 큼직한 뻥튀기 봉지를 옆구리에 끼고 뮤직하우스로 걷는다.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 앞 은진은 발을 멈춘다. 그리고 카페 간판불이 꺼지고 잠시 후 계단을 뛰어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은진은 진성과 마주친다.
'어!'
진성은 귀신이라도 본 듯 깜짝 놀란다. 그리고 그녀가 들고 있는 뻥튀기를 보더니 씩 웃는다.
'언제 왔어요?'
'오늘 낮에... 친구 결혼식......'
'아......'
'이제 카페 닫은 건가보죠?'
'그래요. 이제 끝났어요. 아휴! 시원하다!'
'이거......'
은진은 뻥튀기 봉지를 내밀고 진성은 또 씩 웃으며 받아든다.
'이건 내가 혼자 다 먹어야겠네. 장사도 안 하니까.'
은진은 그냥 어색하게 미소만 짓고 서있다.
'저녁 먹었어요?'
'아뇨.'
'그럼... 우리 저기 잔치국수 먹을래요? 지난번 그 집.'
'그래요.'
진성은 고개를 돌려 잔치국수집을 바라본다.
'저기......'
은진이 뭔가 말하려 망설인다.
'왜요? 은진씨.'
그리고 또 은진은 망설이다가.
'런던 춥죠?'
'예?'
'나... 나 추운 거 싫은데......'
이제 진성에게서 정말 행복한 미소가 보인다. 그리고 은진의 팔을 살며시 붙잡으며 끌어당긴다.
'나도 추운 거 싫어요. 추우면 껴안고 있지 뭐. 하루 종일!'
'나 이제 애인 있어요. 그렇죠?'
진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그리고 둘은 바로 위 잔치국수집으로 걷는다.
'어! 뭐야?'
잔치국수집 주인부부가 나오고 있다. 문을 닫으려는 것 같아 보인다.
'사장님! 사장님!'
진성은 소리치며 뛰어가고 은진은 그 뒤를 걷는다.
'사장님! 우리 잔치국수 먹어야 돼요.'
'어? 우리 오늘은 일찍 닫을 건데.'
'안 돼요. 에이! 제발요! 국수만! 잔치국수 딱 두 그릇!'
진성이 조르며 주인부부의 등을 떠밀어 다시 식당 안으로 들어간다. 진성은 은진에게 빨리 오라 손짓을 하며 들어가고 은진도 웃으며 진성에게로 뛰어간다.
불빛사이로 그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아주 재미있고 행복한 웃음소리가.

 

-애인 있어요.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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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니버스 하루살이 - 애인 있어요 17. 친구    2009/03/31 11:23 추천 0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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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_박진희_최정원.jpg

<가상 캐스팅: 박진희, 최정원>

 

17.

 

'이영식 어린이.'
은진은 오늘도 오전부터 소아과에서 바삐 일하고 있다. 은진에게서 처방전을 받아드는 아이의 엄마. 은진이 말한다.
'영식이 이틀만 약 더 먹으면 다 낫겠네.'
은진은 얼굴이 까무잡잡한 사내아이를 보며 활짝 웃는다.
'너 또 말 안 들으면 간호원 누나가 주사 놓은데.'
아이의 엄마는 아이에게 엄포를 놓고서는 은진에게 눈을 찡긋거리며 소리 없이 웃는다.
'언니! 전화.'
'나?'
'응. 언니 찾는데.'
'누가?'
은진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언니!'
카랑카랑한 지희의 목소리.
'어머.'
'씨! 언니 죽을래?'
'너 어떻게 알았어?'
'죽는다!'
'까불지 말고.'
그래도 지희의 목소리를 들으니 은진은 반가움이 솟아난다.
'전화도 못하냐?'
'그래. 미안해. 그렇지 않아도.'
'됐어!'
'잘 지내지?'
'그럼 내가 뭐 언니 없으면 죽냐? 죽어?'
'미안하다니까. 연락 꼭 하려고 했어. 정말이야.'
'히야! 인간이 그러냐? 정말 언니 실망이다.'
'뭐? 내가 뭘?'
'남자한테는 슬쩍 가르쳐주고 나한테는 그러냐?'
'뭐? 남자?'
'어이구. 내숭?'
'무슨 말 하는 거니?'
'몰라서 물어? 그 아저씨가 가르쳐줬다. 디자인 아저씨!'
'아......'
'내가 혹시나 하고 친구하고 한번 가봤지. 제대로 걸렸지. 어쩌면 그러냐?'
'지희야, 그게 아니라.'
'아니긴! 히야! 한은진 무섭다. 무서워.'
'얘! 그게 아니라니까.'
'아니 그런데 왜 그래?'
'내가 또 뭘?'
'아니 기껏 제주도까지 가게 만들어놓고 왜 그러냐?'
'내가 뭘?'
'그 아저씨 눈치 보니까 언니가 찬 거 같던데? 벌써 이주일이나 됐다며?'
'아니야. 그게 아니야.'
'거기 이제 닫는데.'
'그래. 들었어.'
'토요일이 마지막이라던데. 일요일부터 새 주인이 인테리어 공사한데.'
'그래?'
'원래 더 있다가 인수하기로 했었는데 그냥 빨리 하기로 했데. 아저씨도 그게 차라리 잘 됐데.'
'그래. 그렇구나.'
환자들이 자꾸만 들어온다. 은진은 전화를 받고 있기가 부담스럽다.
'지희야. 지금 바쁘니까. 내가 전화할 게.'
'나도 바빠! 자기만 바쁜가!'
지희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하는 수 없이 은진도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그리고 후배간호사가 묻는다.
'언니 누구에요?'
'응. 전에 같이 있던 동생. 간호원.'
'말하는 게 좀 싸가지 없더라.'
'아니야. 화가 나서 그래.'
'왜?'
'응. 내가 말도 안하고 내려왔거든. 연락도 못했어.'
'저기... 언니.'
'응?'
'언니 그런데 무슨 일로 그렇게 갑자기 내려왔는데요?'
'아니 그냥......'
은진은 갑자기 허둥대며 일을 하기 시작한다.

 

수평선 위에 노을이 퍼지는 저녁, 은진은 바닷가에 홀로 앉아있다.
이따금씩 머리 위로 날아가는 갈매기를 올려다보며 긴 시간을 보낸다.
어둠이 내려앉을 때가 되어서야 은진은 그녀의 집으로 간다. 땅바닥만 내려다보며 아주 천천히 걷고 있다. 바닷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한 번씩 매만질 뿐이다.
'은진아.'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든다. 영린의 커다란 눈이 은진을 바라보고 있다.
'너......'
'왜 이제 오니?'
'너 어떻게?'
'원장님이 가르쳐주셨어. 나 한참 기다렸어. 어디 갔었어?'
그리고 둘은 은진의 방으로 들어왔다. 은진은 영린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서성거린다.
'여기 참 좋다.'
은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영린은 바다가 내다보이는 창가에 선다.
'참 좋다. 나도 이런데 살았으면 좋겠다.'
그때까지도 은진은 괜히 벽에 걸린 옷만 만지고 있다.
'은진아.'
그래도 대답하지 않는다.
'은진아.'
'왜?'
'우리 결혼해.'
돌아서있던 은진은 순간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오빠가 사과했어. 그래서... 그래서 우리 결혼해. 날짜도 앞당겼어.'
'그래.'
'결혼하고 바로 미국으로 갈 거야. 부모님도 그렇게 하라고 하시고 나도......'
'그래. 잘 됐다.'
'은진아, 나... 나 너 무서워.'
은진도 영린의 옆에 서서 바다를 바라본다.
'그래서 미국으로 가는 거야. 나 너 정말 무서워.'
'왜? 내가 왜 무서워?'
'내가 살 수 없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너 딱 하나야.'
은진은 체념한 듯 쓸쓸한 미소를 짓는다. 영린의 눈빛도 슬퍼진다.
'은진아, 나... 차라리 처음부터 사랑하지 말았어야했어. 차라리.'
'그게 마음대로 되니?'
'은진아.'
은진의 시선은 아주 먼 바다만 향하고 있다.
'은진아. 나 용서해줘. 제발.'
영린의 눈에 눈물이 글썽인다.
'나 용서해주면 안 되니? 응?'
은진은 미소를 지어 보이려 하지만 참을 수 없는지 결국 눈물을 흘린다.
'그건 안 돼. 힘들어. 나도 어쩔 수 없어.'
'은진아 제발, 제발 나 좀 용서해줘.'
영린은 은진의 팔을 붙잡고 애원한다. 은진은 살며시 영린의 손에 손을 얹는다.
'난... 난 그냥 잊을 게.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야.'
영린은 은진에게 안겨 서글피 운다. 은진도 울음을 참으려 입술을 꼭 깨문다.

그리고 밤, 은진과 영린은 나란히 누워있다. 파도소리가 들려온다.
'은진아, 옛날 생각난다. 그렇지?'
'그래.'
'우리 밤에 잠 안자고 얘기하다가 라면 끓여먹고 그랬잖아.'
'그래. 네가 항상 졸랐잖아.'
'맞아. 아침에 후회하면서 왜 그렇게 참을 수가 없었는지.'
'너 아침에 얼굴 부었다고 운적도 있잖아.'
영린이 피식 웃는다.
'여기서 계속 살거니? 제주도에서?'
'몰라. 지금은 여기가 좋아.'
'저기......'
'응?'
'황원장님이 전해주라는 말이 있는데.'
'원장님이?'
'응.'
'뭐라고 그러셨는데?'
'저기... 너 올라오지 말래. 뭍으로 오지 말래.'
'뭐?'
'너 애인 생기기 전에는 올라올 생각도 하지 말래. 꼴도 보기 싫다고 그러시던데... 난 그냥 그대로 전하는 거야.'
은진이 웃는다.
'그럼 나보러 제주도 남자랑 꼭 결혼하라는 건가?'
'그러게.'
은진과 영린이 마주본다. 그리고 둘 다 같이 웃음을 터뜨린다.
'은진아, 결혼식 올 거니?'
은진은 조용히 고개를 젓는다.
'오면 안 돼?'
'나 무섭다며? 너 웨딩드레스에 오줌 싸면 어쩌니?'
'뭐?'
둘은 또 깔깔거리며 웃는다.

 

다음날 아침 황소아과 앞 길가에 은진과 영린이 서있다. 영린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망설이고 있다. 하지만 은진이 말한다.
'너 여기서 택시 타고 가.'
'그래.'
'난 들어가 봐야 돼.'
'그래.'
영린은 우울해보이기만 하다.
'영린아, 빨리 택시 잡아.'
'은진아, 우리 또 만날 수 있는 거지?'
'넌 오빠랑 결혼하고 잘 살면 돼지.'
'나중에 우리 꼭 만나야 돼. 그렇지? 우리 친구잖아. 제일 친한 친구.'
'그래서 힘들잖아.'
'시간이 지나면 그래도......'
은진은 가슴이 답답해오는지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
'은진아.'
'그래. 혹시... 혹시 내가 사랑하게 되면. 결혼하게 되면. 아니, 정말 애인 있으면.'
은진은 택시를 세운다. 울먹이며 차에 타는 영린, 은진은 억지로 미소를 보이며 문을 닫아준다. 두 친구는 그렇게 헤어진다. 그리고 은진은 쓸쓸히 병원으로 들어간다. 공항으로 가는 택시 안의 영린은 얼굴을 가린 채 엉엉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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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니버스 하루살이 - 애인 있어요 16. 갈매기    2009/03/30 11:14 추천 0    스크랩 0
http://blog.chosun.com/marcelco/3828600

16_김민준_박진희.jpg

<가상 캐스팅: 김민준, 박진희>

 

16.

 

제주시의 또 다른 황소아과, 역시 또 다른 여의사 황원장이 퇴근하려 한다. 두 간호사에게 말한다.
'수고들 했어. 내일 봐.'
'예. 내일 뵙겠습니다.'
황원장이 은진을 쳐다보다가.
'아 참! 아까 황희경 원장한테서 전화 왔었는데.'
'예.'
'한간호사 잘 있냐고 물어보던데. 통화 안 했어?'
'예.'
'핸드폰 하나 하지 그래? 불편할 텐데.'
'아뇨. 별로......'
'나도 급한 일 있으면 연락해야하니까 하나 해.'
'예. 알겠습니다.'
'그럼 정리하고 가.'
황원장은 병원을 나간다. 그리고 옆에 있는 간호사가 은진에게 묻는다.
'언니, 집 괜찮죠? 어때요?'
'응. 좋아.'
'집이 좀 낡았지만 거기 참 좋아요. 바다도 보이고 얼마나 좋아.'
'그래. 고마워.'
'고맙긴. 어차피 세놓는 건데 이왕이면 같이 있는 언니가 살면 좋지 뭐..'
'그래. 친구 어머니가 참 잘해주셔.'
'응. 그 엄마 무지 정 많아요. 정말 좋아.'
'그래.'
'그런데 언니 왜 핸드폰 없어요? 싫어?'
'아냐. 그냥.'
'하나 하지. 그래야 노는 날 나도 전화하고 그러지. 응?'
'그래. 봐서 할게.'
후배 간호사는 생글생글 웃는다. 언니 은진이 좋은 모양이다.
그리고 병원 앞에서 은진과 후배간호사는 인사하며 헤어진다.
'언니 내일 봐. 안녕!'
'그래. 안녕.'
은진은 손을 흔들어주고는 천천히 돌아선다. 그리고 화들짝 놀란다.
'짠!'
'어머!'
진성이 바로 은진의 코앞에 서있다. 가방 하나 달랑 메고 있다.
'은진씨! 하하하하!'
'아니 어떻게......'
'어떻게는요. 간만에 비행기타고 왔지.'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지희도 모르는데.'
진성은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웃는다.
'은진씨 집이 어디에요?'
'그건 왜......'
'에이. 궁금하니까. 은진씨 집 가까운 데서 저녁 먹으려고 그러지.'
'한 이십분 걸어야 돼요. 저쪽 바다 쪽으로.'
'어휴! 좋지요. 내가 바다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은진은 얼이 빠진 모습이다.
'가요! 제주도 물회가 그렇게 맛있다는데. 먹어봐야지. 가요!'
그리고 진성은 은진의 등을 떠밀며 간다.

 

바닷가 횟집에 들어온 두 사람, 진성은 싱글벙글 웃으며 은진만 바라본다.
'바보처럼 왜 그렇게 웃어요?'
'내가 바보이지 그럼 뭐에요?'
'예?'
'남자 때문에 도망친 여자를 쫓아서 바다까지 건너온 나 같은 놈이 바보이지. 누가 바보야?'
'그만 해요.'
그때 커다란 유리그릇에 제주물회가 나온다.
'우와. 맛있겠다.'
진성은 눈을 크게 뜨고서는 물회를 한 국자 퍼서 은진에게 준다.
'은진씨 물회 먹어봤어요?'
'아뇨. 난 회는 별로......'
'제주도 살았었다면서? 먹어봐요. 빨리요.'
그리고 진성은 한입 가득 물회를 먹는다.
'와! 진짜 맛있다. 역시 제주도가 다르다. 달라!'
은진은 어쩔 수없이 웃는다.
'내일 아침에는 갈칫국 먹어봐야지. 히야. 신난다.'
'먹으러 왔어요?'
'음... 먹고 보고.'
'예?'
'음식은 맛있게 먹고 은진씨 예쁜 얼굴도 실컷 보고.'
'뭐든지 자기 맘대로야.'
'내일 아침 일찍 만나서 같이 아침 먹을래요? 갈치국 아니면 다른 거.'
'난 아침 안 먹어요.'
'에이. 그러면 안 되는데. 나중에 애기 낳을 때 힘들 텐데.'
'뭐요?'
진성은 씩 웃는다.
'아! 소주가 빠졌네. 한잔 해야지. 아줌마!'
그리고 진성은 아줌마에게서 소주 한 병을 받아든다.
'우와! 제주도는 소주도 다르네! 크! 한라산!'
진성은 은진에게 한 잔 따라준다.
'건배!'
단숨에 소주 한잔을 마셔버린 진성.
'크! 좋다! 내가 오길 정말 잘 했네. 응! 잘 했어.'
'진성씨.'
은진이 조용히 그를 부른다.
'왜요?'
'왜 그렇게 오버해요? 나 괜찮아요.'
진성의 웃음이 그친다. 그리고 그도 조용히 말한다.
'정말 괜찮아요? 괜찮은 여자가 여기까지 와서 숨어 있어요?'
'난 혼자 있는 게 좋아요. 그냥 다 생각하기 싫고.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말아요. 난 그냥 내가 있다는 걸 보여주러 온 거예요. 나, 김진성이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그러지 말아요. 난 아직......'
'나 유학 가려면 아직 일 년 남았어요. 그만하면 충분해요. 그럼.'
진성이 소주 한잔을 또 따르려하자 은진이 병을 잡는다.
'내가 한잔 따라줄게요. 여기까지 왔는데.'
'어휴! 황공하옵니다. 하하하하!'

 

진성과 은진은 밤바다가 보이는 공원을 걷는다. 아담한 제주의 공원, 파도소리를 따라 바닷바람이 불어온다.
'카페 나갔어요.'
'정말요?'
'뭐 그런대로 가격도 맞고 그래서 그냥 넘기기로 했어요.'
'그럼 언제 그만 둬요?'
'한 달.'
'그럼 이제 뭐 할 건데요?'
'선배회사일 좀 도와주고 공부해야죠. 내가 영어가 좀.'
진성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어! 은진씨 잠깐만.'
진성은 뛰어간다. 그리고 그는 또 뻥튀기 한 봉지를 사들고 온다.
'뻥튀기가 그렇게 좋아요?'
'심심하지 않잖아요. 배도 안 부르고 얼마나 좋아요? 절대 질리지 않는다니까.'
진성은 손바닥만 한 뻥튀기 하나를 은진의 입에 물려준다. 얼떨결에 은진은 그냥 씹는다.
'우리 저기 앉아서 커피 한 잔 해요. 저기 자판기 있네.'
진성은 은진의 팔을 끌고 간다.
진성이 뻥튀기 한 조각을 자판기 커피에 살짝 찍어 먹는다.
'그렇게 먹으면 맛있어요?'
은진은 신기하다는 듯이 진성을 바라본다.
'먹어볼래요? 재미있잖아. 맛있어요.'
진성은 커피를 찍은 뻥튀기 조각을 은진의 입에 넣어준다.
'맛있죠?'
은진은 뻥튀기를 씹으며 고개만 끄덕거린다.
'우리 나중에 한라산 한번 올라갈래요?'
'등산요?'
'그래요. 등산. 중간까지는 차타고 가면 된다던데.'
'난 등산 별로......'
'에이. 다 별로래? 내가 등산화 하나 사줄게요.'
'됐어요.'
'그럼 뭐 내가 업고 가지 뭐.'
'나 보기보다 무거워요.'
'응. 하긴 속에 숨겨놓은 게 많으니까 무겁겠지. 하하하하.'
은진은 정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진성을 쳐다본다.
'진성씨 이제 가요.'
은진이 일어선다.
'벌써? 이제 열시도 안 됐는데.'
'나 피곤해요. 아직 적응이 안 됐는지 좀.'
'그래요. 그럼. 에이. 나 늦게 자는데 혼자 뭐하라고.'
'우리 여기서 헤어져요. 난 이쪽 진성씨는 저쪽.'
'내가 바래다준다니까.'
'됐어요. 혼자 갈래요.'
'같이 가요!'
진성은 막무가내로 은진을 따라간다. 그리고 한참을 걷다가.
'이제 그만 가요. 저기 저 집이에요. 파란 철문.'
'아... 저기. 집 예쁘다.'
'잘 가요.'
은진은 그렇게 가버린다.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진성은 입을 꼭 다물고 서서 은진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멀리 바다 위 밤하늘에 달이 떠있다.

 

다음날 아침, 은진이 파란색 철문을 열고 나온다.
'잘 잤어요?'
진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왜......'
'은진씨 아침 사주려고 왔죠.'
'이러지 말아요.'
'가요. 내가 갈칫국 잘 하는데 알아놨어요. 가요.'
진성이 은진의 팔을 붙잡지만 은진은 힘껏 뿌리치고 만다.
'이러지 말라니까요!'
은진은 소리치고 만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있는 진성을 바라보고는 조용히 말한다.
'미안해요. 나 지금 진성씨하고. 하여튼 난 아직.'
'그렇게 사랑 때문에 고통스러웠으면서 사랑도 몰라요? 난 은진씨 당신 사랑해. 처음 볼 때부터.'
'난 아직......'
'내가 얼마나 잘 기다리는지 알게 될 거야. 내가 덜렁대도 은근히 끈기가 있거든. 당신! 한은진! 당신이 질 거야. 내가 이겨!'
'이러지 말아요.'
'내가 오늘은 배가 고파서 혼자 먹으러 가는데. 당신! 분명히 언젠가는 날 쫓아올 거야. 두고 봐! 당신 없이 나 런던 안가. 안 간다고! 죽어도 안 가!'
진성은 씩씩거리며 가버린다. 하얀 갈매기가 하늘을 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있는 은진, 진성은 멀찍이 가다가 돌아서서 손을 한번 흔든다. 그리고 다시 길을 간다. 점점 멀어져간다.
은진은 길게 아주 길게 한숨만 내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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