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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_박진희_김민준[1].jpg](http://blog.chosun.com/web_file/blog/273/34273/2/9_%B9%DA%C1%F8%C8%F1_%B1%E8%B9%CE%C1%D8%5B1%5D.jpg)
<가상 캐스팅: 김민준, 박진희>
18. 애인 있어요.
그리고 여러 날이 지났다. 은진은 모든 것을 잊으려는 듯 하루하루 일에만 매달리고 있다. 저녁이면 바닷가를 산책하고 또 목적도 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다가 밤이 되어서야 자취방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늘 힘없이 쓰러져 잠이 들어버린다. 퇴근시간이 거의 다 되어 갈 무렵. '언니, 전화.' '누군데?' '황원장님 이시라는데.' 은진은 조금은 놀란다. 그리고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한간호사.' '예. 안녕하셨어요?' '내가 전화 안 한다고 정말 이럴 거야?' '죄송해요. 원장님.' '죄송은 그만두고. 잘 지내지?' '예. 잘 지내요.' '참 잘도 지내겠다? 무슨 궁상을 또 떨고 있는지 알게 뭐야.' '아녜요. 저 괜찮아요.' '그럼 내일 올라와.' '예?' '결혼식 안 갈 거야? 내일이잖아.' 은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한간호사, 깨끗하게 하자. 이왕 다 이렇게 된 거 깨끗하게.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축하해줘.' '저는 아직......' '아직 뭐? 이제 뭘 어쩔 건데? 아직도 미련이 있어?'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그럼 당당하게 가. 그리고 털어버려. 지워버려. 이제 그만 끝내. 어차피 다 끝났어. 인정해.' 그렇게 한참 은진은 통화를 한다. 갑자기 우울해 보이는 은진의 모습에 후배는 차마 말을 걸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원장이 나온다. '한간호사, 내일 무슨 일 있다며?' '예?' '황원장이 그러던데, 내일 올라가야 한다고.' '아뇨 그게......' '진작 얘기하지. 내일 하루 쉬어. 올라갔다와.' '아뇨 저는......' '괜찮아. 어차피 토요일인데 뭘. 나 먼저 갈게. 그럼 한간호사는 월요일날 봐.' 원장은 병원을 나간다. '언니, 갔다 와요. 무슨 일 있나본데.' '글쎄......'
다음날 아침 은진은 유난히 일찍 눈을 떴다. 갈매기의 울음소리가 왠지 더 크게 들리는 것만 같다. 눈을 뜬 채 꼼짝도 하지 않고 그냥 누워있다. 그리고 파도소리가 유리창을 두드린다. 샤워를 하고 나서도 은진은 멍하니 방에 앉아 있다. 그렇게 얼마나 앉아있었을까, 은진은 화장을 하기 시작한다. 여느 때와는 달리 더 예쁘게 차려입은 그녀는 집을 나선다. 바닷바람이 더 세게 불어오고 은진은 택시를 잡는다. '어서 오세요.' '아저씨, 공항이요.' 택시는 제주공항으로 달린다. 은진은 눈을 감아본다. 그리고 은진은 강남의 어느 웨딩홀 앞에 도착했다.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 속의 그녀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 '너 은진이지?' 누군가 그녀를 건드린다. 두어 살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 '은진아! 나야. 유정이.' '어머. 그래. 유정아.' '어머! 얘 너 정말 오래간만이다. 몇 년 만이니.' '응. 정말.' 은진은 아이를 쳐다본다. 저절로 미소가 나온다. '우리 딸. 예쁘지?' '그래. 너 많이 닮았다.' 아이는 제 엄마의 목을 더 꼭 껴안는다. '너 결혼 아직 안했지?' '응.' '너도 빨리 해라. 오늘 영린이 보내니까 이제 다음은 너다.' 하지만 은진은 아이만 보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뭐해? 들어가자.' 얼떨결에 은진은 친구와 함께 웨딩홀로 들어간다. 유정은 말한다. '영린이 대단해. 몇 년을 기다린 거니. 그 도훈선배 말이야.' '그래.' '너도 그 선배랑 친하잖아? 그렇지?' '응.' 멀찍이 턱시도를 차려입은 도훈이 보인다. 그의 부모와 함께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어머. 역시 멋있다. 저 선배 참 멋있어. 그렇지?' 유정은 걸음을 서둘러 도훈에게로 가고 있다. 하는 수 없이 그 뒤를 쫓아 천천히 걷고 있는 은진. '선배!' 유정을 쳐다보던 도훈의 시선이 은진에게로 오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유정은 도훈의 부모에게 인사를 하고서는 떠든다. '선배 축하해요.' '응. 그래. 고마워.' 그리고도 도훈의 시선은 다시 은진에게로 온다. 하지만 도훈의 엄마가 은진을 반긴다. '은진이 왔구나!' '안녕하세요?' '그래. 아니 정말 너 제주도로 갔니?' '예.' '왜? 그렇게 멀리 왜 갔어?' '그냥요. 거기가 좋아서요.' '아휴. 너무 멀다. 얘.' 도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아버지가 은진에게 말한다. '잘 왔어요. 못 오는 줄 알았는데. 영린이가 참 좋아하겠네.' 아버지는 은진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대어본다. '신부대기실에 들어가 보지. 아 참! 사돈 분들에게도 먼저 인사를 드려야지.' 신부대기실, 영린은 너무나 화려한 웨딩드레스를 입고 한 가운데 앉아있다. 일찍 온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은진과 유정이 들어선다. 유정은 또 큰소리로 말하고. '영린아! 축하해!' 영린은 은진을 보고 잠시 웃음을 멈춘다. 유정과 다른 친구들은 수다를 떨고 있다. 영린에게로 가까이 다가가는 은진은 아주 서서히 미소를 짓기 시작한다. '축하해. 영린아.' 영린도 미소를 지으며 은진의 손을 잡는다. '고마워.' 둘은 아무도 모르는 둘만의 눈빛을 주고받는다. '어머! 너 은진이 정말 오래간만이다. 어디 파묻혀 지내니?' 한 친구가 은진의 팔을 흔들며 말한다. '너 살아있었구나?' '어쩌면 그대로니?' 모두들 은진을 보며 한마디씩 하고 있다. 하지만 은진과 영린은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다. 그리고 은진은 영린의 볼을 살짝 만져본다.
예식장 안, 친구들과 뒤섞여 앉아있는 은진이 보인다. 신랑입장, 도훈이 박수를 받으며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다. 은진은 그냥 똑바로 앞만 바라본 채 어설픈 박수를 친다. 그리고 신부입장, 은진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아버지와 팔짱을 끼고 들어오고 있는 영린을 바라본다. 은진의 눈에도 아름답기만 하다. 가늘게 한숨을 내쉬어본다. 웅성대는 소리가 은진의 귀에 들려오고 은진은 지난 시간들을 그려본다. 자취방에서 처음 도훈을 보았던 그 순간, 캠퍼스 안에서 몰래 도훈을 찾아 훔쳐보았던 일들 그리고 가슴조이며 바라보았던 도훈과 영린의 모습들 그리고 초라하기만 했던 자신의 그 모습들, 그 모든 것을 되새겨본다. 은진이 추억에 잠겨 있는 사이 예식은 벌써 끝나가고 있다. 신랑신부 행진, 하객들의 박수소리가 울린다. 은진도 이제 힘껏 박수를 쳐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눈물이 핑 돈다. '어머! 은진아 네가 왜 우니?' '응? 아니. 좋아서. 응.' '얘! 너 빨리 시집가야지 안 되겠다.' 그리고 식장 안은 어수선해진다. 서둘러 나가는 사람들 그리고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사람들이 모인다. 식장 앞 멀리 도훈과 영린이 다시 보인다. 플래쉬는 터지고 사람들은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다. '은진아, 우리도 찍자. 이제 친구들인가 보다.' '그... 그래.' 앞으로 몰려가는 친구들 뒤에 망설이며 서있던 은진은 조용히 돌아서 나온다. 은진의 뒷모습을 영린이 보았다. 그리고 도훈도 슬쩍 한번 보았다. 하지만 둘은 다시 웃으며 하객들과 인사를 한다.
웨딩홀을 빠져나와 쓸쓸히 홀로 걷고 있는 은진,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자꾸만 한숨이 나온다. 건널목, 은진은 멍하니 선 채 신호등이 바뀌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얘!' 누군가 그녀를 붙잡는다. 친구 유정이다. '너 왜 그냥 가니? 밥 먹고 가야지.' '응. 그냥 좀......' '같이 가자. 저기 식당이래. 애들 벌써 다 갔어. 가자! 우리 딸 기다린다.' 유정은 은진의 팔을 끌어당기려 하지만. '아니 난 그냥 갈 게.' '얘! 얼마 만에 만났는데 그냥 가니? 빨리 가!' 유정의 성화에 은진은 따라갈 수밖에 없다.
피로연을 마치고 친구들과 함께 막 식당을 나오려는 은진이 뒤를 돌아본다. 멀찍이 어느 테이블 앞에 서있는 도훈이 보인다. 도훈도 은진의 시선을 느꼈을까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보이며 미소를 짓는다. 은진도 미소로 답한다. 그때 영린이 도훈에게 다가오고 있다. '오빠, 애들 어디 갔어?' '응. 전부 갔어. 지금 막.' '은진이......' 도훈은 말없이 손짓만 한다. 영린은 멀어져가는 은진의 뒷모습을 보고 쫓아가려하지만 도훈이 영린의 팔을 붙잡는다. '우리 외가식구들한테 인사드려야지.' '그... 그래. 오빠.' 이제 은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은진과 친구들은 호프집에서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은진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만 같다. 그저 반사적으로 웃어줄 뿐이다. 그리고 한 친구가 외친다. '야! 우리 오백씩만 더 하자!' '너 또 시작이니?' '야! 안주도 없어. 하나 더 시켜.' '안주는! 배부른데 서비스안주 달라고 하면 되지.' '그래. 그냥 오백씩만 더 시켜.' '아저씨!' 여자들은 서로 잘났다고 떠들어대고 있다. 은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가끔씩 친구의 어린 딸과 눈을 마주치는 것이 전부이다. 그리고 종업원이 커다란 그릇에 안주를 가져온다. '뭐야? 겨우 뻥튀기?' 친구들은 또 떠들기 시작한다. '그럼 뭐 서비스 안주에 소시지라도 줄 줄 알았어?' '에이. 뻥튀기가 안주야? 먹으나 마나잖아.' 은진은 제일 먼저 뻥튀기 한입을 베어 먹는다. '어머. 얘 뻥튀기 좋아하나봐?' 친구의 딸이 은진을 보고 웃는다. 그리고 은진은 갑자기 벌떡 일어난다. '얘! 너 어디 가? 은진아.' '응. 나 먼저 좀 갈게.' '어머. 얘 좀 봐. 갑자기 왜 이래?' '미안해. 갈 데가 있는데 깜빡했어.' '얘! 좀 있다 같이 가.' '아냐. 가야 돼. 미안. 나중에 또 보자.' 은진은 허겁지겁 자리를 벗어난다. 친구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소곤거린다.
어느새 해는 지고 어두워졌다. 은진은 뮤직하우스가 있는 길 건너편 건널목에 서있다. 길을 건너며 대로변에 서있는 작은 트럭을 본다. 뻥튀기를 파는 할아버지. '할아버지 이거 얼마에요?' 은진은 아주 커다란 뻥튀기 봉지를 가리킨다. '그거 오천 원.' '하나 주세요.' 은진은 제 몸 반은 되어 보이는 큼직한 뻥튀기 봉지를 옆구리에 끼고 뮤직하우스로 걷는다.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 앞 은진은 발을 멈춘다. 그리고 카페 간판불이 꺼지고 잠시 후 계단을 뛰어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은진은 진성과 마주친다. '어!' 진성은 귀신이라도 본 듯 깜짝 놀란다. 그리고 그녀가 들고 있는 뻥튀기를 보더니 씩 웃는다. '언제 왔어요?' '오늘 낮에... 친구 결혼식......' '아......' '이제 카페 닫은 건가보죠?' '그래요. 이제 끝났어요. 아휴! 시원하다!' '이거......' 은진은 뻥튀기 봉지를 내밀고 진성은 또 씩 웃으며 받아든다. '이건 내가 혼자 다 먹어야겠네. 장사도 안 하니까.' 은진은 그냥 어색하게 미소만 짓고 서있다. '저녁 먹었어요?' '아뇨.' '그럼... 우리 저기 잔치국수 먹을래요? 지난번 그 집.' '그래요.' 진성은 고개를 돌려 잔치국수집을 바라본다. '저기......' 은진이 뭔가 말하려 망설인다. '왜요? 은진씨.' 그리고 또 은진은 망설이다가. '런던 춥죠?' '예?' '나... 나 추운 거 싫은데......' 이제 진성에게서 정말 행복한 미소가 보인다. 그리고 은진의 팔을 살며시 붙잡으며 끌어당긴다. '나도 추운 거 싫어요. 추우면 껴안고 있지 뭐. 하루 종일!' '나 이제 애인 있어요. 그렇죠?' 진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그리고 둘은 바로 위 잔치국수집으로 걷는다. '어! 뭐야?' 잔치국수집 주인부부가 나오고 있다. 문을 닫으려는 것 같아 보인다. '사장님! 사장님!' 진성은 소리치며 뛰어가고 은진은 그 뒤를 걷는다. '사장님! 우리 잔치국수 먹어야 돼요.' '어? 우리 오늘은 일찍 닫을 건데.' '안 돼요. 에이! 제발요! 국수만! 잔치국수 딱 두 그릇!' 진성이 조르며 주인부부의 등을 떠밀어 다시 식당 안으로 들어간다. 진성은 은진에게 빨리 오라 손짓을 하며 들어가고 은진도 웃으며 진성에게로 뛰어간다. 불빛사이로 그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아주 재미있고 행복한 웃음소리가.
-애인 있어요.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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