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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 캐스팅: 손현주, 김명민, 한고은>

46. 사랑
병원복도 끝 의자에 앉아 옹녀는 훌쩍이고 있다. 아씨가 옹녀를 살며시 껴안으며 위로한다. ‘언니, 울지 마. 방장님이 의사선생님 모셔오면 금방 나을 거야. 여긴 만두님 치료할 전문의가 없다잖아. 하긴 뭐 이 구석지에......’ ‘어차피 방법이 없다잖아. 수술도 위험하고.’ ‘그래도 희망을 가져야지. 아직 희망이 있어.’ 아씨가 눈을 살짝 찌푸리더니 옹녀에게 묻는다. ‘언니, 돌쇠가 왜 저러는 거지? 그냥 만두님 걱정돼서 그러는 거 같지가 않은데? 왜 그러지? 언니는 알지? 응?’ 옹녀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찬찬히 말한다. ‘내가 말했잖아. 돌쇠하고 만두에 관한 일은 얘기 하지 말라고.’ ‘언니가 언제 그랬어? 소보로님 얘기하지 말랬지.’ ‘응? 그... 그랬나?’ 아씨는 뭔가 생각해 내려는 듯 심각하게 생각에 잠기고 있다.
상진은 흥분이 좀 가라앉았는지 입을 꼭 다물고 필만을 쳐다본다. 주머니에서 그림을 꺼내어 보여주며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이거... 이 그림 네가 그려준 거 맞지? 만두 주필만.’ 하지만 인공호흡기를 통해 내쉬는 필만의 가녀린 숨소리만 답한다. ‘내가 멍청했지. 이걸 보고도 널 생각하지 못했으니... 그래, 솔직히 네 그림을 모른 거지. 제대로 본적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림을 들여다보다가 미소를 띤다. ‘흐흐. 잘 그렸다. 정말 윤희 같구나. 윤희 학생 때 이랬겠지?’ 그리고 뒷면을 보더니. ‘윤희가 종이를 붙여 놨다. 네가 사인한 걸 가렸나봐. 흐흐.’ 상진은 필만의 손에 아주 조심스럽게 그림을 쥐어준다. ‘임마, 이건 너 가져. 어차피 네가 그린 거니까. 자식......’ 그리고 다리에 통증이 느껴지는지 잠시 이를 악물고 있다가 다시 필만을 쳐다본다. 그리고 목걸이를 목에서 빼어낸다. ‘대신, 이건 내 거야. 이거 원래 우리 집사람, 윤희가 나 주려고 산 거야. 그때, 그날 아침에 내가 좀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어가지고... 하여튼 이건 내 거야. 알았어? 엉뚱한 놈이 왜 가져?’ 꼼짝도 하지 않는 필만, 상진은 필만의 머리 위에 있는 모니터를 올려다본다. 파장을 그리며 연둣빛으로 그어지는 선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 ‘자식, 그 와중에 이거 거기다가 켜 놀 생각은 어떻게 했냐? 이 형 살리려고? 너 살려고? 아님 둘 다?’ 상진의 귓가에도 꿈처럼 윤희의 맑디맑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 소중한 사람을 지켜준대. 정말이야. 상진은 보랏빛 유리알을 눌러본다. ‘어? 이거 왜 안 켜져?’ 상진은 이리저리 다시 만져보지만 유리목걸이는 반짝이지 않는다. ‘배터리가 나갔나? 비에 너무 젖은 건가? 물 들어갔나?’ 상진은 목걸이를 필만에게 보여주며 또 말한다. ‘야, 이거 안 된다. 어떻게 키는 거냐? 고장 난 거야? 배터리 갈아야 돼? 그래?’ 상진은 또 혼자 바보처럼 피식 웃는다. ‘자식이 치사하게 무슨 비밀이라고... 저 혼자만 알려고......’ 그때 아씨가 병실 문 뒤에 살짝 머리를 내밀고 몰래 엿보고 있다. 옹녀가 아씨를 확 끌어당기고는 작은 목소리로 야단치듯 말한다. ‘너 뭐하니?’ ‘언니. 이상해. 돌쇠가 만두랑 무슨 얘기를 해. 한번 봐봐.’ 옹녀도 한번 몰래 들여다보지만 이내 옹녀를 끌고 복도 끝으로 간다. ‘언니. 돌쇠 이상하지 않아? 제 정신이 아닌가봐.’ ‘시끄러!’
상진이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 맥이 다 빠진 목소리로 말한다. 아주 천천히 말한다. ‘필만아, 나 눈치 챘었다. 그날 말이야. 윤희 죽은 날 그날. 날 보더니 깜짝 놀라더라. 뜨끔한 거지. 처형 집으로 들어오는 걸 봤는데... 그래. 난 직감했어. 난 알거든. 마누라를 모르겠냐? 아... 남자가 생겼구나. 보통사이가 아니구나. 어떻게 알았냐고? 흐흐흐흐.’ 상진은 또 바보처럼 혼자 웃는다. ‘그 사람은 말이야. 흐흐흐흐. 이젠 넌 알아도 되겠지? 그 사람... 윤희는 사랑을 나누고 나면 말이지. 남자랑 아주 진하게 사랑을 나누고 나면 꼭 머릿속이 텅 빈 여자처럼 되거든. 그리고 향기가 같은 게 나. 향기. 내가 그래도 남편인데 모르겠냐? 흐흐흐흐.’ 그리고 또 필만을 바라본다. ‘그게 너였어. 상상도 못했지. 난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제 이걸 어쩌나? 이년동안 잠자리 한번 같이 안했는데 이제 와서 어쩌나? 이혼해야 하는 건가? 아니지! 안 돼. 이혼은 안 돼. 그럼 어떻게 해야 되지? 흐흐흐. 혼자 머릿속이 정말 복잡했었다.’ 상진은 눈을 감는다. ‘그래. 내가 느낄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보통사이가 아니었겠지.’ 다시 필만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사랑했냐? 사랑했어? 윤희를? 형수를? 대답 좀 해봐.’ 상진은 필만의 손등을 살짝 건드려본다. ‘야! 내가 너 죽도록 패주고 싶은데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 형한테 좀 맞아야지. 안 그래? 자식아. 치사하게 아프다고 엄살피우냐?’ 상진은 다시 필만의 손등을 두들겨본다. ‘야, 너 정말 윤희 사랑했냐? 그럼 우리 삼각관계야? 뭐야? 이거 불륜 아니야? 불륜. 응? 임마! 정신 좀 차려 봐.’ 상진은 필만의 손을 흔든다. ‘자식아! 맞기 싫으면 싹싹 빌어! 진심으로 사과해. 알았어? 집사람한테는 내가 나중에 가서 사과를 받던지 아니면 아주 작살을 낼 테니까. 미안하지? 형한테 잘 못했지? 하긴... 내가 남편인 줄 꿈에도 몰랐겠지. 그래... 그랬겠지. 이게 도대체 뭐냐?’ 필만의 손가락이 꼼지락 거린다. ‘어?’ 그리고 필만이 가늘게 눈을 뜬다. 희미한 눈빛, 그의 눈동자가 상진을 향해 움직인다. ‘야! 정신이 든 거야?’ 필만의 눈빛이 너무 슬퍼 보인다. 그리고 아주 가늘게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다. 상진은 필만 얼굴 가까이 다가가며 저도 울먹인다. ‘임마... 왜 울어? 형이 때리지도 않았는데.’ 필만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아주 슬픈 눈빛으로 눈을 깜빡인다. ‘뭐? 잘못했다고? 지금 잘못했다고 그러는 거야? 맞아?’ 필만이 손을 움직이려 하지만 바르르 떨리고만 있다. 상진이 그의 손을 잡아준다. ‘그래. 일단 살고보자. 그러고 나서 또 나한테 죽도록 맞던지. 하여간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하자. 임마.’ 필만은 필사적으로 눈을 뜨고 있으려 애를 쓰고 있는 것 같다. ‘너 이렇게 가면 안 돼. 죽으면 절대 안 돼. 그러면 윤희가 너 먼저 데려가는 거 잖아? 그럼 난 뭐야? 안 돼. 죽지 마.’ 필만의 눈이 다시 조금씩 감기고 있다. ‘눈 떠! 임마!’ 필만이 갑자기 눈을 부릅뜬다. 상진이 놀란다. 그리고 필만의 숨소리가 마치 목구멍에 커다란 돌덩이에라도 막힌 듯 거칠어진다. 그리고 고개를 젖히며 괴로워한다. ‘왜? 왜 그래? 잠깐 기다려. 내가 의사 불러올 게.’ 상진이 이를 악물고 일어서려 할 때, 필만의 몸이 마구 떨려온다. 그리고 심하게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하고 경고음이 마구 울려댄다. ‘여기요! 간호원!’ 상진이 황급히 침대 옆을 빠져나가려다가 바닥에 넘어지고 만다. 유리 목걸이는 바닥에 떨어지며 문 쪽 벽까지 미끄러져 가버린다. 간호원이 뛰어오고 옹녀와 아씨도 달려 들어오고 상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헐떡이고 있다. ‘돌쇠! 괜찮아?’ 아씨가 묻지만 상진은 그녀를 뿌리치며 흐느낀다. 의사가 뛰어 들어오고 모두들 필만의 주위를 둘러싼다. 상진은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한다.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유리목걸이를 보고는 그곳으로 기어간다. 유리목걸이를 두 손에 꼭 쥐고 문 옆에 앉아 눈물을 흘린다. 그 순간 경고음소리가 삐소리를 내며 길어진다. 마치 필만의 마지막 인사처럼 들린다. 옹녀는 필만의 몸 위에 엎드려 울고 아씨는 옹녀를 달래며 함께 울고 있다. 유리창 밖 하늘에 엷게 드리워진 회색구름이 햇빛을 가리고 있다. 상진은 몸을 떨며 처절하게 울고 있다. ‘왜 가는 거야? 왜!’ 그의 손에 쥔 보랏빛 유리목걸이가 흔들린다. ‘사랑하면서 사랑하지도 못했는데... 사랑해주지도 못했는데... 내 잘 못이지. 내가 불륜이야. 내가......’ 상진은 가슴속에서 나오는 슬픔과 고통을 억누르지 못하고 제 가슴을 쥐어뜯고 있다. 그의 손의 유리목걸이는 흔들리고만 있다.
어느 어두컴컴한 작은 방, 작은 책상 위에 하얀 노트북이 놓여있다. 갑자기 밝게 빛나며 켜지는 모니터의 불빛. - 소보로: 만두님! - 만두: 예. - 소보로: 화났어요? - 만두: 왜요? - 소보로: 그럼 왜 이제 왔어요? - 만두: 미안해요. 꼭 만나고 올 사람이 있었어요. - 소보로: 정말? - 만두: 예. - 소보로: 누구? - 만두: 잘 아는 사람. - 소보로: 음... 그렇구나. 지금 뭐해요? - 만두: 그냥 있어요. - 소보로: 난 빵 먹는데. 소보로. ^_^ - 만두: 맛있겠다. - 소보로: 우리 만날래요? - 만두: 언제요? - 소보로: 지금. 지금 당장. - 만두: 기다려요. 내가 거기로 갈게요. - 소보로: 빨리 와요. 빨리요! - 만두: 알았어요. 날아갈 게요. - 소보로: 그래요. 날아와요. 얼른. ^_^ 소리 없이 노트북의 불빛은 꺼져간다.
옴니버스 ‘하루살이’ 시리즈 불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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