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철교수의 문명과 바다. 작물의 교류-옥수수의 사례
우리 일상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물론 먹을거리다. 대개 문명마다 대표적인 작물 한두 가지가 있어서 그것들을 중심으로 농업 체계와 음식 체계가 형성된다. 벼·밀·옥수수 등은 각각 아시아·유럽·아메리카를 대표하는 ‘문명작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대항해시대 이후 어느 한 지역에서만 사람들이 재배하고 즐겨 먹던 작물들이 세계 각 지역으로 퍼져가게 되었고, 그 결과 세계의 음식 체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아메리카 원산 식물들만 일별해 보아도 그 영향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감자가 전해지지 않았다면 오늘날 독일 사람들은 뭘 먹고 살아갈까? 토마토가 없는 이탈리아 음식은 어떤 맛이 되었을까? 고추가 인도에 보급되지 않았다면 입이 부서지게 매운 현재의 인도 음식은 어떻게 되었을까? 카사바가 아프리카에 전해지지 않았다면 이곳의 기근 사태가 훨씬 더 심해지지 않았을까?
<표>에 정리된 각종 작물의 전파 상황을 보면 ‘세계 각지에서 세계 각지로’ 다양한 길을 따라 작물들이 퍼져나간 것을 알 수 있다.
대륙별 ‘문명작물’들이 대항해시대 이후 세계로 퍼져갔다. 그중에서도 고수확 작물의 확산은 근대의 인구 증가에도 기여했다. 작물은 단순히 종자만 전파돼서 되는 게 아니라 나라의 문화와 기술이 함께 작용하여 수용되는 것이다.
작물의 전파는 어떻게 일어났을까?
우리는 언뜻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누군가가 먼 곳에 여행을 갔다가 그곳에서 아주 훌륭한 작물을 발견하고 고향에 씨앗을 들여온다. 마침 토양과 기후가 맞으면 이 식물이 잘 정착하게 되고 곧 사람들이 그 효용성을 알게 됨에 따라 급격하게 보급된다. … 그러나 작물의 전파 과정이 그렇게 단순치는 않다. 예컨대 심각한 기근에 시달리던 유럽에 재배도 쉽고 수확량도 많은 감자가 전해지면 곧바로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야말로 아사 직전까지 가지 않는 한 사람들은 감자를 쳐다보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농학자들과 계몽주의 철학자의 노력, 각국 정부의 강압적 정책, 심지어는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으면서 300년의 시간이 지나서야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했다.
식물의 전파와 수용은 생물학적·농학적 요인만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요인과 합쳐져야만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이 점을 필리핀에 옥수수가 전파되는 과정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작물의 주요 전파 지점
현재 필리핀에서 벼 다음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옥수수는 아메리카가 원산지로서, 콜럼버스 시대 이후에 해상 교류를 통해 이 나라에 들어왔을 것이다. 현재 구할 수 있는 자료로 볼 때 1560년대 후반부터 1570년대 중반 사이에 에스파냐인이 필리핀 중부 지역을 자주 드나들면서 옥수수가 전파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필리핀에서도 옥수수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에는 별로 환영받지 못한 존재였다.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은 옥수수를 조리하는 특수한 기술(닉스타말화, nixtamalization)이 함께 전달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메리카에서 사용되던 이 조리법은 올멕 족(기원전 1400년부터 기원전 400년까지 중남부 멕시코 지역에서 번영했던 민족)이 처음 개발했다고 하는데 백회, 숯, 또는 구운 달팽이 껍질을 넣어 옥수수를 삶고 하룻밤 동안 식힌 다음 아침에 곡물 알갱이를 싸고 있는 투명한 껍데기를 물로 씻어 골라내는 방식이다. 이 과정을 거치면 옥수수를 훨씬 쉽게 갈 수 있으며 반죽이 부드럽게 된다. 이 반죽을 아스텍 족의 언어인 나우아틀어로는 닉스타말리(nixtamalli)라 하고, 에스파냐어로는 마사(masa)라 한다.
이 방법은 주부들에게 편리하다는 이점만이 아니라 영양학적으로 아주 큰 장점이 있었다. 단백질에 대한 알칼리 작용으로 아미노산이 증가함으로써 옥수수의 영양가가 극적으로 높아지기 때문이다. 유럽에도 옥수수만 전해졌지 이 방법이 함께 알려지지는 않았다. 유럽에서는 굳이 이런 식으로 처리하지 않아도 강력한 제분기로 가루를 낼 수 있었기 때문에 옥수수를 먹는 데에 당장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되면 영양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장점을 버린 결과가 되고 만다. 그래서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는 지역에서는 펠라그라 같은 결핍성 질병이 창궐하였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코에 특이한 나비무늬가 생기는 것으로 시작해서 몸이 가렵거나 쑤시는 신경장애와 위장장애 증상을 나타내고 급기야는 심한 발열과 설사, 그리고 서서히 미쳐가는 증세 끝에 죽어갔다. 다른 음식 없이 옥수수에만 의존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영양소 결핍으로 이 병에 걸린 것인데, 아메리카의 조리법만 함께 전해졌어도 이런 사태는 크게 경감되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필리핀에도 닉스타말화 방법이 전해지지 못했다. 이 조리법은 여성들에 의해 전달될 수밖에 없었는데 필리핀에는 소수의 백인 여성들이 있었으나 멕시코 기술을 직접 전할 멕시코 여인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닉스타말화 기술이 없다면 최소한 유럽처럼 옥수수 알을 갈아서 가루로 만드는 기술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필리핀에는 제분 기술마저 발달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옥수수가 본격적으로 확산되자면 이 문제가 선결되어야 했다. 필리핀에서 이 문제를 푼 것은 중국과 접촉이 늘면서 중국의 제분 기술이 도입된 이후이다.
옥수수의 전파는 결코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다. 이는 18~19세기에 세계 여러 지역에서 전개된 인구 급증과 관련이 있다. 중국만 해도 1700년 추정 인구가 약 1억8천만명이었는데 1820년에 3억4천만명으로 늘어났고, 서유럽은 같은 기간에 8100만명에서 1억3300만명으로 늘어났다. 사상 유례없는 이런 인구 증가 원인을 한두 가지 요소로 환원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최소한 옥수수나 고구마 같은 고수확 신작물의 도입 없이는 불가능했으리라는 것이 여러 학자들의 결론이다.
이처럼 어느 작물이 널리 전파되는 것은 단순히 그것이 지닌 장점만으로 되는 문제가 아니라 여러 나라의 문화와 기술이 함께 작용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서울대 교수·서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