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유가 시대 맞아 에너지 확보도 중요하지만
신·재생 에너지 혁명 대비한 연구·개발에도 눈 돌려야
"1973년엔 원유의 24%, 1990년엔 42%, 지금은 70%를 수입한다. 여기에 연간 이라크 전비(戰費)의 네 배에 달하는 7000억 달러를 쓴다. 미국경제 엔진의 70%가 다른 나라의 에너지, 그들의 선의(善意)에 달려 있다는 건 비상한 상황이다. 해외석유 중독에서 벗어나야 한다. 행동할 때다."
누구의 말일까. 환경운동가? 반(反)부시 단체? 아니다. 평생 석유사업가로 살아온 여든 살의 티 분 피켄스(T. Boone Pickens). 비피 캐피털(BP Capital)의 최고 경영자다. 그는 이달 초 '탈(脫) 석유' 캠페인을 위한 웹사이트를 가동하면서 언론에 잇달아 의견광고를 내고 있다. 그의 대안은 미국 중서부 대평원의 바람을 에너지원으로 활용하자는 것이고, 자신의 구상대로면 해외석유 의존도를 10년 내 30%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앨 고어 전 부통령은 훨씬 더 통 큰 제안을 지난 주말 내놓았다. 10년 내 '무(無)탄소 재생에너지'로의 100% 대전환. 현재 신·재생에너지의 비중이 4.5%에 불과한 미국에서 과연 이게 가능한 일일까. 고어는 "케네디 전대통령이 10년 내 인간을 달에 보내겠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품었지만, 그로부터 8년2개월 뒤 암스트롱이 달을 밟았다"고 말한다.
아직도 탄소배출을 제한하는 교토의정서에 서명을 미루고 있는 미국에서 한 노(老)사업가의 탈 석유 캠페인이 반향을 낳고 '환경 정치인'의 목소리가 날로 커지는 배경엔 물론 치솟는 기름값이 자리잡고 있다.
고유가는 반대쪽 목소리도 키우고 있다. 부시 대통령을 포함한 이른바 '현실주의자'들은 동·서해안의 대륙붕을 시추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민주당 주도의 의회를 향해 두달째 시위하고 있다.(미국은 1969년 캘리포니아 앞바다 오염 사고 이후 연안 시추를 금지해 왔다)
"다른 나라는 유전을 찾으면 국가적 영웅이 되는데 왜 미국만 엄청난 석유가 매장돼 있는 연안을 두고도 파지 못하게 하는가? 공급을 늘려야 기름 값을 잡을 것 아닌가?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러시아의 푸틴은 석유를 무기로 국제정치를 주무르는데 우린 왜 손을 놓고 있나?"
지난주 CNN 조사에서 미국민의 73%가 연안 시추에 찬성했다. 한 달여 전 대략 반반이던 여론이 급속히 찬성 쪽으로 기운 걸 보면 미국민에게 휘발유 값 폭등의 충격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앨 고어가 무대에 오른 건 바로 이런 시점이다. 그는 "휘발유 값이 올랐다고 당장 석유를 더 파자는 단기 처방론이야말로 미국의 고장난 정치시스템을 보여주는 것"이라면서 연안 시추로 흐르는 여론의 흐름을 재생에너지 쪽으로 돌리려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후 '자원 외교'에 힘을 쏟고 있다. 고유가 시대를 맞아 밖에서 에너지를 많이 모으고 안에서 아껴 쓰는 건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우리에겐 절실한 일이다. 부시의 수요공급론은 눈앞의 현실이고 고어의 제안은 미래일 뿐이다.
문제는 고어가 말하는 그 미래가 그다지 멀지 않을 경우이다. 새로운 기술이 헌 기술을, 신 산업이 구 산업을 밀어내는 창조적 파괴를 통해 성장하는 게 자본주의이다. 신기술을 바탕으로 에너지산업의 구조조정이 시작되면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진행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측한다. 이에 대비하는 일은 지금까지의 자원외교처럼 수요 공급을 따지는 양(量)의 발상만으론 불가능하다.
정부와 한나라당은 얼마 전 총 10조4930억원의 고유가 대책 예산을 추가 편성했다. 유류비 오른 부분 중 일부를 서민에게 돌려준다는 명목(8조4350억원)이 대부분이고 신·재생에너지 지원금은 3540억원에 불과했다. 지난 5년간의 이 분야 투자 총액도 1조9000억원에 지나지 않았다. 정치인들은 말로는 요란하게 떠들지만 막상 예산을 따질 땐 재생에너지 같은 분야는 맨 뒤로 미뤄 놓는다. 민주당 원혜영 원내대표가 '저(低)탄소 에너지 혁명위원회' 구성을 제안했다는데 초당적으로 논의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조선일보 워싱턴 지국장-홍준호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