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새벽엔 이곳에도 눈이 내렸어요. 딱히 첫눈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쑥스러울 정도로
흩날리다 멈췄지만 그래도 세상 모든 것에 자기 이름이 있듯이 첫눈은 첫눈인 것이지요.
눈이 내리는 날은 세상이 유난스러울 정도로 고요해지고 순결해지는 느낌, 당신 아나요.
그것은 마치 자신이 가진 순백의 날개로 혼탁하고 무질서한 세상을 비록 잠시동안이나마
모두 뒤덮어 정화해버리겠다는 세상을 향한 선전포고와도 같은 거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눈이 내리는 날은 더 애틋한 자기연민으로 스스로 경건해지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달이 바뀐 지 한참이 지났지만 요즈음 나는 연못 속에서 사는 늙은 잉어와도 같습니다.
연못 위에 내리는 겨울빛도, 옅어지는 저녁노을도, 쥐꼬리만큼 남은 태양도 모두 시들해
져서 새삼 모든 것이 시들어간다고 느낍니다. 나뭇잎이 이따금씩 떨어질 뿐인 이 고요한
연못 속에서 이 세상이 마치 나와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가끔씩 지느러미를 흔들며 유영
하는 일밖에 달리 할 일이 없는 늙은 잉어 말입니다. 그렇다고 늙은 잉어처럼 지혜롭다는
말은 아니랍니다. 거침없던 열정과 참담했던 패배감은 나란히 각자의 레일 포인트 위로
달아나버렸고 밝아오지 않은 아침을 기다리는 심정은 자꾸만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지요.
이렇게 된 것이 운명이라면 나는 그것을 향해 있는 힘껏 한 방의 펀치를 날려버리고도
싶답니다. 그러나 그건 아니지요. 이런 운명이 나를 찾아오게 된 까닭은 늙은 잉어보다도
현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란 걸 모르지 않답니다. 그러니 운명이란 말은 가당치가 않아요.
오늘은 자꾸만 깊은 연못 그 심연 속으로 자꾸만 자꾸만 헤엄쳐 들어갑니다. 눈을 감고서
조용조용 날갯짓을 하고 있으면 당신이 나를 깨워줄까요. 기다리겠습니다. 오실 때까지.
Nov 19, 2009. (사진출처;포토갤러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