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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기자 마누라    블로그형  게시판형  리스트형
마음에 와닿는 노년의 풍경    2006/08/02 09:56 추천 8    스크랩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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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051[1].jpg 

 

 

 사진도 못 찍으면서 크게 올렸다고 남편에게 타박을 들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핀이 잘 맞춰지지 않은 듯 하네요. 제가 느꼈던 이미지를 완벽히 표현하는데

 부족한 사진이지만  그 의미만은 다른 분들과 나누고 싶어 올립니다.

 

 며칠 전 장대비가 오는 날,  이진아기념도서관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비 탓에 사람들이 적어선지 아름다운 도서관은 고즈넉 했습니다.

 아이가 특강을 듣는 동안 책을 읽으려는데 어떤 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사진_047[1].jpg

 

 

 문득 제가 바라는 노년의 한 풍경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도 거의 없어 저의 느낌을 담을 수 있을 것같았습니다.

 마침 가지고 있던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도 될까요하고 양해를 구했더니 빙그레 웃으시더군요.

 거의 매일 도서관을 찾으신다고 합니다.

 도서관에 책을 기증하기도 하셨고 도서관 모니터 요원도 하셨답니다.

 도서관 직원들이 아주 친절하게 대해주신다고 하시더군요.

 거리낄 무엇도 없이 하루종일 마음껏 책을 보실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실까 하면서도 

 

 

 사진_050[1].jpg

 

 사진_049.jpg

 

 

  한편으론 높은 아파트와 대비된 노년의 고독한 책읽기가 외롭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진_045[1].jpg  

 

 

 그래도 세월을 의미있게 이기는데 독서만한 것이 있을까요. 

 

 

 

사진_057[1].jpg

 

 

  개인의 초상권과 제 느낌을 전하려고 일부러  더 어둡게 나온 사진을 골랐습니다. 

  도서관이라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고 , 책읽으시는데 방해하는 것같아 짧은 대화에 그쳤지만

  제게 어떤 글귀를 새롭게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지난해 조선일보 문화비전 칼럼에 나왔던 것입니다.

 

 "책을 읽어라. 

  책에서 살아갈 용기를 얻어라.

  살아갈 힘을 길러라.

  책을 통해 인생을 발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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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마한 그녀들이 해낸 일    2006/05/29 10:24 추천 4    스크랩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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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에 스크랩 해두었던 글이 있습니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남편이 가져온 회사 사보에 실렸던 것으로

플리처상을 받은 릭 브래그 기자의 글을 번역한 기사입니다.

큰 상을 받을 정도로 섬세한 시각의 수려한 글솜씨도 글솜씨지만

이 기사의 주인공인 오세라 맥카티라는 분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번 하인스 워드와 그의 엄마 김영희씨를 보면서 이 글을  떠올렸습니다.

이번에 하인스 워드가 엄마와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설립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다시 온 것을 보며

이 글을 다른 분들과도 나누고 싶어졌습니다.

두 분 다 자그마한 체구의 여성에 너무나 어려운 환경을 살았다는 것 그러나 결국에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네요.

 

 

오세오라 멕카티.

그녀는 세상사람들을 늘 깨끗하고 단정하게 보이게 하려는 그런 일을 하면서 평생을 보낸 사람이었다.

그녀 자신은 평생 구경해볼 수 없었던 화려한 파티,

초대 한 번 받아보지 못했던 결혼식

그리고 그녀가 참석해 지켜 볼 수 없었던 영광스런 졸업식들.

그러한 행사에 참석하는 이들의 옷을 깨끗하게 세탁해주는 일이 오직 그녀의 일이었다.

87년 생애 대부분의 나날을 그녀는 그런 일을 하면서 보냈다.

6학년때 자진 퇴학을 하고 일터에 나선 그녀는 결혼 한 번 해보지 못했고 따라서 출산 경험도 없었다.

그녀는 운전도 못했다. 특별히 가고 싶은 곳도 없어 운전을 배울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할 수도 있고, 가진 것은 그저 일자리. 일하는 것 뿐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것을 지극한 축복으로 여겼다.

그때만 해도 미시시피 지역의 흑인들 대부분은 일자리 갖는 것조차 도대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돈 쓰는 것을 몰랐다.

대대로 물려온 낡고 낡은 집에서 살면서 신발이 작으면 작은대로 발을 신발에 맞춰 신었고

그녀의 오래된 성경책에서 고린도전서가 떨어져 나갈까봐 스카치테이프로 붙이고 붙여

성경책이 너덜너덜거릴 정도였다.

그렇게 살면서 돈을 전혀 쓰지 않아 그가 세탁으로 번 돈은 쌓여 갈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 1달러짜리 지폐와 동전들이었지만 그녀가 저축한 돈은 이제 15만 달러나 되었다.

자기 연민의 표정이라도 있을 법한데 "내가 써도 써도 다 못쓸 돈"이라고 그녀는 무표정하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바로 그 돈을 ,그녀는 남미시시피대학의 흑인 대학생 장학금으로 내놓기로 한 것이다.

평생 다시 학교에 돌아가지 못한게 한이었던 할머니 미스 맥카티는

 

"내 재산 이제 그 아이들과 나눠 써야지. 나는 일하는 것을 싫어한 적도 기피한 적도 없어.

그저 기쁘게 살아왔지. 정말 바쁘다는 말이 실감나게 말야.

그렇지만 우리 애들이 내가 살아온 식으로 이제 살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해티스버그 주민들은 맥카티의 장학금 출연을 '신이 주신 선물'이라 했다.

그녀의 이 장학금 출연은 실제 그녀에게는 언제 닥칠지도 모르는 죽음에 대한 준비이기도 한 셈이였다.

어느 날 오후 천둥을 동반한 폭우가 갑작스레 휘몰아 치는 것처럼

죽음도 그런 식으로 오는 게 아니겠느냐고 맥카티 할머니는 담담하게 되뇌곤 했다.

거센 빗발이 침대 있는 데까지 휘몰아치는 것을 막기 위해 침실의 창문을 닫는 것처럼

그녀의 장학금 출연은 그러한 준비였다.

 

"내가 죽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어. 그래서 내가 저축한 돈은 나에게 거의 필요가 없고

거꾸로 우리 애들에게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거야."

 

그녀의 이같은 장학금 출연은 전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불과 며칠 사이에 어느 누구도 알아 주지 않는 무명의 세탁부 맥카티 할머니의 이름은 전국적 명성의 반열에 올랐다.

그녀는 대학에서 조금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초라하고 조그마한 움막 같은 집에서 그녀를 찾아온 기자들,

기업인들을 잇달아 만났다. 그러나 그들 말고도 맥카티 할머니를 찾아온 사람들은 줄을 이었다.

 

"나는 내가 살고 싶은 곳에서 살았어요. 또 살고 싶은대로 살았어요.

자동차를 갖고 있다해도 운전할 줄도 모르고, 너무 늙어 대학에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 저금한 돈 모두 대학에 내놓기로 한 거예요. 누가 코치한 것도 없어요.

그저 대학에 내놓는게 제일 좋겠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계획을 짠 겁니다."

 

 남미미시시피대학이냐고 묻자 맥카티할머니의 대답은 너무나 명쾌했다.

 "그 대학이 바로 이 근처에 있으니까"였다.

 

미스 맥카티는 대학에 돈을 냈다해서 건물 이름에 그녀의 이름을 붙이는 것도

또 그녀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동상을 건립하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녀가 진정 원하는 한 가지는 그녀의 돈 덕택으로 학업을 마치게 된 학생의 졸업식에

참석하는 것 뿐이었다.

 

"나는 정말 그게 보고 싶어요."

 

 뉴올린즈의 북동쪽으로 1백10마일이나 떨어진 하티스버그의 경제계 인사들은

그녀가 출연한 만큼의 돈 15만달러를 모금, 대학에 출연함으로써 그녀의 갸륵한 뜻에 보답키로 했다.

 남미시시피대학 재단 장학금 관리담당 빌 페이스사의 얘기다.

 

"넉넉한 사람도 아니고,

또 돈이 나올 재원이 있는 사람도 아닌 사람이 그렇게 거액을 낸 사례를 저는 알지 못합니다."

 

민간 기금사업에 24년간이나 종사해 왔다는 빌 페이스씨는

맥카티 할머니는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내놓은 것이나 다름 없다고 했다.

 

"우리 대학의 누구도 맥카티할머니에게 접근하지 않았어요. 거꾸로 그 할머니가 우리를 찾아 온 셈입니다.

그녀는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는, 그래서 더욱 교육이 필요한 젊은이들의 모습이 얼마나 처절한가를,

또 가난이 어떠한 것인가를 아는 분이었습니다.

나는 일찌기 맥카티 할머니처럼 자신을 죽여 성인(成仁)하는 사람을 본 일이 없습니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마련된 것을 아니지만, 맥카티가 출연한 돈과, 기업인들이 보답하는 뜻으로

모금한 돈 등 30만 달러의 장학기금은 이 대학의 장학제도를 재정적으로 더욱 튼튼하게 뒷받침할 게 틀림없다.

이 장학금의 유일한 제한 규정은 수혜자는 반드시 남부 미시시피주에 사는 흑인 학생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대학은 벌써 한 학기마다 1천 달러를 주는 맥카티 할머니 이름의 장학금 수혜대상자를 선정했다.

하티스버그 출신의 스테파니 블록(18)이라는 여학생이었다.

블록양의 조모 레스터 헤이즈 할머니는 맥카티 할머니의 조그만 움막집을 찾아 진정 고맙다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블록양의 할머니는 미스 맥카티의 집을 나오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나는 맥카티라는 여자가 좋은 저택에 살고 호화스런 승용차를 타는 돈 많은 늙은 부인인 줄 알았어요.

나도 조모 노릇도 하면서 두 가지 직업을 가져 본 일이 있는데 맥카티 할머니처럼 일 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나는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받은 돈을 통틀어 모두 다 내놓다니......"

 

 중략

 

맥카티 할머니는 5피트 키에 겨우 될까말까한 조그만 체구였다.

목소리도 너무 작이 미닫이 문을 여닫는 삐걱거리는 소리나 에어컨의 웅웅거리는 소리에도

쉽사리 잘 들리지 않을 정도 였다.

원래 맥카티 할머니는 미시시피의 농촌마을 출신이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 그녀의 유일한 혈육인 할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학교를 퇴학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는 훗날 학교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내 클라스메이트들은 모두 떠나가 버렸고

또 내가 국민학교에 계속 다니기에 나는 너무 나이가 먹어 버렸어요.

나는 정말 우리 반 애들과 함께 공부도 하고 놀고도 싶었는데......"

 

 그래서 그녀는 일만 했다. 그리고 그녀가 받은 푼돈은 한 푼도 빼지 않고 모두 은행에 저축했다.

이 때쯤 그의 직계가족은 모두 세상을 떴다.

 

"나는 정말 이 세상에 혼자였어요. 그렇지만 바쁘게 살았어요."

 

 맥카티 할머니는 처녀시절 나이아가라 폭포로 아주 짧게 여행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물이 떨어지는 천둥같은 소리에 정말 혼이 빠져 나가는 듯 싶었는데

'그때 그 모습은 세상이 종말에 다가온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그때의 짧은 여행을 빼놓고 맥카티 할머니는 늘상 집에 머물렀고,

지난 67년 부터는 혼자서 사는 그야말로 '외로운 삶'이 시작됐다.

금년초 맥카티 할머니가 거래하는 은행원이 "할머니께서 작고하시게 되면 저축하신 돈은

어떻게 처분하는게 좋겠습니까?"라고 물어 왔다.

 

"내 저금 모두를 대학에 줍시다"

 

라는 것이 할머니의 대답이었다. 맥카티 할머니는 그리고는 그녀의 저금 중 극히 일부를 따로 떼어 놓았다.

그녀가 죽을때까지 가까스로 쓸만한 소액이었다. 사실 그녀는 누구에게 얹혀 살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달리 방도가 없었다. 스테파니는 결국 그녀의 장학금 덕분에 대학을 졸업하게 됐고,

또 그 결과 인생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 미스 맥카티는 첫번째 장학생의 '양어머니'가 되기로 한 것이다.

그녀의 첫 장학생 스테파니 블럭의 어머니도 처녀시절엔 남미시시피대학에 들어가길 희망했었다.

그러나 당시 흑백공학은 가장 첨예한 사회문제였고, 그 분규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였다.

흑인인 그녀가 대학입학을 시도하고, 또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되면 시직원인 그의 아버지는 해고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이기도 했다.

맥카티의 첫 장학생인 스테파니의 대학 가는 꿈은 돈 때문에 무산될 뻔한 것 같아 보이지만

거기에는 여러 복잡한 사연이 얽혀 있다.

스테파니 블록은 여고 상급학년이었을 때 반장을 지냈고, 성적도 장학금을 받을 만큼 충분히 우수했다.

그러나 스테파니의 얘기로는 연방정부의 장학금을 받기에는 그녀 부모의 소득이 조금 많았고,

그렇다고 그녀의 부모가 번 돈은 대학가기에는 너무 빠듯했다.

그런데 그녀는 지난주 대학이 그녀에게 맥장학금으로 매학기 1천달러씩 지급하게 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정말 기적같은 일이었어요. 또 명예이기도 하고요."

 

스테파티 블록의 말이다. 스테파니 블록은 개인적으로 감사의 뜻을 전하기위해 미스 맥카티를 방문했고,

그 자리에서 미스 맥카티를 '양어머니'로 모시겠다고 제의했다.

요즘 스테파니 블록의 정례적으로 그녀의 양어머니댁을 방문하거나 드라이브 시켜 드리고 있는데,

수십년 동안 비어 있었던 맥카티할머니의 집 마당도 이제 스테파니의 차가 머무는 때가 많아

이제 그렇게 쓸쓸하지 않았다.

스테파니는 요즘 학자금으로 그녀를 진정 도와 주었던 한 사람을 정말 실망시키지나 않을까

정신적으로 큰 압박감을 받고 있다고 했다.

 

"세탁일을 하면서 번돈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을 해내고 있는가"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는 스테파니 블록의 놀라움이다.

스테파니는 맥카티 할머니가 지금부터 4년은 더 살아 계실 것으로 믿고 있다.

그녀가 대학 졸업하는 것을 꼭 지켜 볼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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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자신의 인생을 불평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태어난 환경, 지금의 형편 ,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

다른 사람과 비교하다보면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모습이나 직업이나 형편이든

남에게 보여지지는 않지만 자신만이 느끼는 기쁨과 감사가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더불어 크든 작든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아주 오래 전 기사라서 할머니께서 스테파니의 졸업식을 지켜보았는지...

지금도 살아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졸업식만은 볼 수 있으셨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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