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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 어린이들, 최초 한국 방문    2012/04/09 18:32 추천 7    스크랩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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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 ‘아이티’.
2년 전, 30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는 끔찍한 지진 참사를 겪은 이 나라에서
아이들이 찾아왔다.

  

11명 아이티 아이들은 ‘엄마의 나라’가 보고 싶어 20시간을 날아 한국에 왔다고 했다.
11년째 아이티에서 헐벗고 굶주린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 백삼숙 목사가 아이들의 ‘엄마’다.

 

8~9년 가까이 한국 엄마 품에 자란 아이들은 한국말을 곧잘 했다.
한국 음식, 한국 노래, 한국 아이돌 그룹을 좋아한다고 했다.
절반은 한국인이었다.

 

이들은 ‘미라클 콰이어’라는 합창단으로도 활동 중이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합창 공연도 가질 예정이다.
백삼숙 목사 말로는 아이들이 인순이의 ‘아버지’를 그렇게 잘 부른다던데
그걸 못 들어 좀 아쉬웠다.

  

<기사링크> http://kid.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4/08/2012040801126.html

 

 

"베풂·사랑 가르쳐준 '엄마의 나라' 잊지 않을게요"

 

김시원 기자 blindletter@chosun.com

 

아이티 어린이 합창단 '미라클 콰이어' 한국을 찾다

 

 

“한국, 예뻐요! 좋아요!”
지난 6일 저녁 8시 N서울타워 전망대. 유리창 너머 서울 야경을 바라보던 검은 피부의 소녀 제프린(11세)의 입에서 무심코 한국말이 흘러나왔다. 싱글벙글 신이 난 건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 막내 자스민(8세)은 한국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전망대 곳곳을 뛰어다녔다.

2년 전 대지진이 할퀴고 간 작은 섬나라 아이티에서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왔다. 아이티 소년·소녀 11명으로 구성된 합창단 ‘미라클 콰이어’가 그 주인공. 아이티의 어린이들이 한국을 찾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비행기로 20시간이 걸리는 머나먼 길을 날아온 아이들은 “엄마의 나라에 왔다”며 기뻐했다.

남정탁 기자 jungtak2@chosun.com

 

 

◇헐벗고 굶주린 아이들 데려다 지극정성 보살펴

미라클 콰이어의 단원들은 모두 ‘한국인 엄마’ 백삼숙(68세) 목사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이다. 11년째 아이티에서 살고있는 백 목사는 “처음 큰 애를 만났을 때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아이티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예요. 못 입고 못 먹는 건 기본이고 위생 상태도 엉망이죠. 2002년 아이티로 가서 빈민촌인 ‘시티솔레이’에 집을 얻고 사람들을 돕기 시작했어요. 다친 사람을 보면 알코올로 소독해주고 아픈 사람들에겐 약을 나눠줬지요. 그러다 여섯살 ‘앤나’를 만나게 됐어요. 거지꼴이 따로 없었죠. 그런데 눈이 어찌나 초롱초롱 예쁜지. 물어보니 엄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공사장에서 일한다고 하더군요. 그 앨 두고 그냥 갈 수가 없었어요. 아버지의 동의를 얻어 앤나를 데려다 보살피게 됐죠.”

이제 15살이 된 앤나도 그때를 또렷이 기억했다. “엄마가 제 손을 잡고 집으로 가서 깨끗한 방을 주셨어요. 그날 3일을 굶어서 배가 무척 고팠는데 빵을 급하게 먹다가 그만 체하고 말았어요. 제가 바닥을 구르며 엉엉 우니까 엄마도 절 끌어안고 함께 우셨죠.”

앤나를 시작으로 백 목사를 ‘엄마’라고 부르는 아이들이 하나, 둘 늘었다. 내친김에 백 목사는 ‘사랑의 집’이란 보육원을 차렸다. 갓난아기나 3~4살짜리 어린애들은 한 침대에서 끌어안고 잤다. 난생 처음 ‘보살핌’이란 걸 받은 아이들은 몰라보게 건강해졌다.

한국인 엄마와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말도 배웠다. “아이들을 모아놓고 우리 동요를 가르쳤어요. 노래를 정말 잘 따라 했어요. 함께 노래를 부르고 연습을 하다가 그게 합창단으로 발전하게 됐어요. 이젠 가요를 포함해 한국 노래 30~40곡은 거뜬히 외워 부른답니다.”

‘사랑의 집’ 아이들이 한국에 대해 궁금해하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엄마, 한국은 어떤 나라예요? 우리도 가보고 싶어요.” 백 목사는 아이들에게 “한국에 꼭 데려가겠다”는 약속을 한 뒤 필요한 절차를 밟아나갔다. 그러나 아이들의 여권과 비자를 받는 일은 생각보다 복잡했다. 신원이 불분명한 아이들이 많아 해결해야 할 서류가 한둘이 아녔다.


◇기적을 꿈꾸고 희망을 노래하는 ‘미라클 콰이어’

그러던 중 지진이 났다. 2010년 1월 12일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 발생한 규모 7.0 대지진은 30만명이 넘는 아이티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안젤로(10세)는 “너무 무섭고 슬펐다”고 했다. “집에 있는데 갑자기 땅이 흔들렸어요. 우리집은 괜찮았는데 앞집은 폭삭 무너져버렸죠.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다는 얘길 듣고 마음이 아팠어요.”

아이티 지진 소식에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구조의 손길을 보냈다. ‘사랑의 집’은 한국인 구조대의 베이스캠프가 됐다. 이를 계기로 백 목사는 국제구호개발NGO ‘휴먼인러브’ 아이티 지부장을 맡았다. 고통받는 아이티 사람들을 더 체계적으로 돕기 위해서였다.

백 목사는 “미라클 콰이어라는 합창단 이름도 지진 이후 붙인 것”이라고 말했다. “미라클 콰이어는 ‘기적의 합창단’이란 뜻입니다. 우리 아이들의 노래가 작은 희망이 되어 아이티가 기적처럼 다시 일어서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렇게 지었지요.”

지난 5일 입국한 백 목사와 아이들은 다음 달 22일 아이티로 돌아간다. 서울에서 머무는 동안엔 휴먼인러브의 도움으로 한국 나들이를 즐길 예정이다. 5~6일에는 코엑스아쿠아리움과 N서울타워 등을 돌아봤고 7일에는 연세대학교 세브란스어린이병원의 특별후원으로 1인당 75만원 상당의 종합건강검진을 받았다. 9일에는 롯데월드 후원으로 테마파크를 구경하고, 11일에는 넥센히어로즈의 초청으로 야구 경기를 관람할 계획이다.

뜻깊은 공연도 갖는다. 10일 오후 세브란스병원 환우들과 직원들 앞에서 그동안 갈고닦은 합창단의 노래 실력을 선보일 예정. 백 목사는 “후원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 한국인들에게 아이티의 어려움을 알리기 위해 마련한 행사”라고 설명했다. “아이티의 재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지진으로 장애를 갖게 된 사람도 너무 많고 이재민도 셀 수 없지요. 가난했던 나라가 더 지독하게 가난해졌어요. 가장 피해입은 건 연약한 아이들이에요. 고아가 수백만 명이에요. 우리 아이들의 노래가 아이티에 힘이 됐으면 합니다.”

다빗(10세)은 “한국과 한국 사람들이 베푼 은혜를 잊지 않겠다”며 해맑게 웃었다. “저는 커서 목사가 되고 싶어요. 가난한 아이티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를 도와준 한국인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할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도 아이티를 잊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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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소녀' 아베 유리카    2012/03/31 00:39 추천 6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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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살 후쿠시마 소녀 아베 유리카 양을 인터뷰했다.

얼굴이 어찌나 예쁜지. 얼마나 의젓한지.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결례일 수도 있을 것 같아 참았다.

 

유리카는 1년 전 일어난 원전 사고로 방사능에 피폭됐다.

방사능 공포를 피해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다.

일본 각지를 떠돌다 지금은 교토에 정착해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다.

아빠는 위험을 감수하고 후쿠시마에 남았다.

가족의 피난 생활에 필요한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유리카가 묻는다.

나는 언제 아빠와 함께 살 수 있을까요.

나는 언제쯤 고향으로 돌아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까요.

나는 몇살까지 살 수 있을까요.

 

며칠 전, 유리카를 만나러 일본으로 가는 사람이 있다기에 기사가 난 신문을 보내줬다.

동화작가가 꿈이라는 유리카를 위해 그림책 두권을 함께 보냈다.

유리카가 행복하길. 예쁜 미소를 잃지 않길 빌었다.

 

<기사링크> http://kid.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3/11/2012031100944.html

 

"깨끗해진 후쿠시마서 아빠·친구들과 살고 싶어요"

김시원 기자 blindletter@chosun.com 

日 대지진·원전 사고 1년··· 11살 아베 양을 만나다

1년 전인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북부 지역에서 규모 9.0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후쿠시마에서는 지진 여파로 최악의 원자력발전소 사고가 발생했고 주민 상당수가 방사능에 피폭됐다. 방사능 공포를 피해 고향을 떠나는 ‘원전 피해 이재민’도 생겨났다.


11살 아베 유리카(교토시립 미시노소학교 4학년)양도 원전 사고 직후 고향인 후쿠시마를 떠났다. 어머니 함께 6개월간 일본 곳곳을 떠돌며 피난 생활을 하다 지난해 8월 교토에 임시 정착해 살고 있다.


동일본 대지진 1주년을 이틀 앞둔 지난 9일, 어머니와 함께 한국을 찾은 아베 양을 만났다. 10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후쿠시마 대재앙 1주기 시민문화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 한국에 왔다고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아베 유리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수줍은 한국말로 인사를 건넨 아베 양이 지난 1년간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건강 잃지 않고 씩씩하게 잘 자라줘서 고마워." 아베 사오리 씨(오른쪽)가 딸 유리카 양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경민 영상미디어 기자 kmin@chosun.com
 
 
◇평화롭던 후쿠시마가 ‘죽음의 땅’이 되다

“제가 태어난 후쿠시마 시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이었어요. 우리 집은 이층집이었죠. 낡고 오래됐지만 제 마음에 쏙 드는 집이었어요. 저는 후쿠시마시립 니와사카소학교에 다녔어요. 친구도 많았어요. 그중에서도 ‘칸노 유이’라는 친구와 가장 친했죠. 1학년 때부터 단짝이었는데 다정하고 친절하고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다 들어주는 착한 친구였어요.”

아베 양 가족에게 재앙이 닥친 건 지난해 3월 11일. 아베 양은 어머니와 함께 쇼핑센터에서 장을 보던 중 강력한 지진을 느꼈다. “서 있을 수도 없을 정도의 강한 지진이 3분이나 계속됐어요. 너무 무서웠죠. 이러다 후쿠시마가 부서져 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날 대지진으로 도시 전체에 전기와 물이 끊겼다. 슈퍼는 물과 식량을 사재기하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아베 양의 가족도 식량을 구하기 위해 몇 시간이고 줄을 서야 했다. 모든 물건이 순식간에 동났고 기름도 구할 수 없었다.


후쿠시마 원전 1호기가 폭발했다는 사실도 하루 지나서 전해들었다. 아베 양의 집은 사고가 난 원자력발전소로부터 60㎞ 떨어진 곳에 있었다. “라디오에서 원전이 폭발했다고 하는데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랐어요. 하지만 아빠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큰일이 났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죠. 아빠는 제게 ‘집안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있어야 한다’고 당부하셨어요.”


아베 양의 어머니는 “우리가 방사능에 피폭됐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됐다”고 했다. “방사성 물질에 대기가 오염된 줄도 모르고 식량을 사러 밖을 돌아다녔던 거예요. 소름이 끼쳤죠. 그 이후로는 바깥에 안 나갔어요.”


◇“깨끗해진 후쿠시마에서 아빠, 친구들과 함께 살고 싶어”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반경 20㎞ 이내에 있는 주민들을 강제로 피난시켰다. 아베 양의 집은 강제 피난 구역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14일 원전 3호기가 폭발한 뒤 가족은 피난을 결심했다. 방사능 피폭 위험을 무릅쓰고 주유소에서 몇 시간씩 줄을 서서 차에 기름을 채운 뒤 16일 야마가타 시로 피난을 떠났다. 이틀 뒤 원전 사고 지역에서 더 멀리 떨어진 홋카이도로 이동했고 5월 10일에는 기타카타 시로 거처를 옮겼다. 7월 26일부터 한 달간은 오키나와에서 지냈고 8월 25일 교토 시로 이주해 지금까지 머무르고 있다.


원전 사고 이후 아베 양은 줄곧 아버지와 떨어져 지내야 했다. 딸과 아내의 피난 생활에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아버지는 홀로 후쿠시마에 남아 일을 하고 있다. 인터뷰 내내 씩씩하던 아베 양이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자 눈시울을 붉혔다. “요즘은 한 달에 한 번씩 아빠를 만나고 있어요. 교토로 오시거든요. 전화통화는 자주 하지만 늘 보고 싶어요. 무엇보다 아빠의 건강이 가장 걱정돼요. 후쿠시마에 지내는 아빠가 방사능 때문에 병에 걸리진 않을까 두려워요. 하지만 아빠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은 없어요. 너무 마음이 아파서요.”


학교도 세 번이나 옮겨다녔다. “처음에는 후쿠시마의 친구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게 너무 슬프고 힘들었어요. 새 학교로 전학을 갈 때마다 ‘친구를 사귈 수 있을까?’ ‘이지매(따돌림)를 당하진 않을까?’ 걱정도 했고요. 그래도 다행히 친구들이 친절하게 대해줘서 금방 적응할 수 있었어요.”


대지진 1년. 이들의 몸은 후쿠시마를 떠났어도 마음만은 고향을 향해있었다. 아베 양의 어머니는 후쿠시마에 남은 이웃들 생각에 눈물을 쏟았다. “후쿠시마에서 나오고 싶어도 못 나오는 사람이 많아요. 명백한 위험 지역이지만 정부가 경제적 지원을 해주지 않기 때문이죠. 최근 후쿠시마 지역 아이들에게 코피와 재채기가 멈추지 않는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던데 걱정이에요. 우리만 안전한 곳에 나와있다는 미안함 때문에 연락도 못 합니다.”


아베 양은 “후쿠시마에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다시 아빠와 한집에서 살고 싶어요. 친구들을 만나 예전처럼 신사에 둘러앉아 도시락을 나눠 먹고 싶어요. 깨끗해진 후쿠시마에서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아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언제쯤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다시는 이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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