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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스크랩]    신경숙 연재소설 푸른눈물 171~185회 끝. / 어떤 눈 속엔 운명이 담겨 있다.    2007/09/02 14:39 추천 0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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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경숙 연재소설 -181] 푸른눈물
  • 4장 6. 매화는 피고
  • 입력 : 2007.01.24 23:58
    • 쓸쓸한 교태전을 바람이 싸고 돌았다.

      서씨와 이 상궁이 안으로 들어가 리진을 들여다보았다. 손에 새기기라도 하는 듯 지난 사흘 동안 고립무원의 교태전을 일일이 손으로 짚어보며 다니던 리진이 평소 왕비가 앉아 있던 자리를 향해 앉아 있다. 왕비와 얘기라도 나누는 듯 이따금 머리를 숙이고 무슨 말인지를 건네는 듯 입을 움직이기도 했다. 쇠약해진 목덜미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저 모습으로 어찌 견딘답니까?

      이 상궁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무얼 먹기는 했습니까?

      ―물뿐입니다.

      리진이 교태전 바닥에 상체를 대고 엎드리자 이 상궁이 서씨를 잡아 끌었다.

      ―제 처소로 가서 뭐 좀 들고 좀 쉬세요. 함께 이러면 어쩌자는 것입니까.

    • ▲/그림= 김동성
    • 리진은 교태전 바닥에 엎드린 채 두 사람이 교태전의 문을 닫고 걸어 나가는 소리를 그대로 느꼈다. 원했던 대로 몸의 기능이 쇠해졌음을, 왕비가 칼에 맞는 순간을 지켜보기만 했던 눈이 흐려지고 있음을 느끼는데, 야릇하게도 귀는 점점 더 예민해졌다. 애써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새가 텅 빈 궁궐의 노송에 내려앉는 소리, 무료한 표정으로 순찰을 도는 일본 군인이 강녕전의 어정에 돌을 던지는 소리까지 투명히 들렸다.

      ―살 수도 없습니다.

      리진은 그대로 엎드린 채 왕비 쪽을 향해 웅얼거렸다.

      ―죽을 수도 없습니다.

      리진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저는 어찌해야 옳습니까.

      기력이 쇠해져 눈앞의 것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흐릿한데 파리에서 돌아와 이 교태전에서 왕비와 함께 잠을 자던 밤, 왕비가 홀로 일어나 스스로 물부리에 담긴 궐련에 불을 붙이고 깊은 숨을 내쉬며 속엣말을 토로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고립무원이로구나.

      귓속을 파고드는 왕비의 목소리에 리진은 얼굴을 들었다. 바로 곁에서 들린 말 같은데 텅 빈 교태전에 냉기만 감돌 뿐이다. 리진은 방금 전에 들린 왕비의 목소리가 이 교태전에서 함께 잠을 자던 그날 밤에 왕비 혼자 토로하던 목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잇달아 궐련을 피우며 잠을 못 이루던 왕비가 “자느냐” 물었을 때 왜 자지 않는다, 하지 못했을까. 왜 그리 홀로 고독하게 두었을까.

      ―가여운 분.

      리진의 메마른 눈에 물기가 비쳤다.

      ―가여운 분.

      한번 물기가 번지자 눈에서 눈물이 솟구쳤다. 궁궐에서 길을 잃고 헤매 다니던 어린 리진을 이곳으로 데리고 왔던 날은 봄이었을까, 가을이었을까. 시간이 계절이 기억이 뒤섞여 가물가물했다. 과도를 들어 꼭지가 달린 배 윗부분을 둥글게 잘라 내던 손. 촉촉하게 드러난 배 속을 숟가락으로 살살 긁어 가득 채운 뒤 입에 넣어주며 “맛있느냐” 묻던 입. 녹당의 소매에 배 물이 묻어도 개의치 않고 오목한 숟가락에 흰 배 속이 가득 차면 아, 해보아라, 이르던 눈.

      ―가여운 분이십니다. 마마께서는….

      리진은 달콤한 배 속을 삼키듯 입안에 고인 마른침을 삼켰다. 왕비를 어머니라 여겼음을 왕비가 칼을 맞는 순간에 리진은 깨달았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것도 어려운 왕비가 아니라 사가의 다정한 어머니라 여겼음을. 그 사이에서 분열하곤 했으나 언제부턴가 왕비를 외롭고 고단하고 매정하고 힘이 세고 강건한 어머니로 여겼음을. 그래서 서운해하면서도 원망하면서도 미워하면서도 종내 사랑할 수밖에 없었음을. 뭔지 모를 서먹함으로 인해 서씨를 어머니라 부르는 못했던 것이 왕비 때문이었음을.

      리진은 몸을 일으켜 왕비가 앉아 있던 자리를 향해 절을 올렸다.
  • [신경숙 연재소설 -182] 푸른 눈물
  • 4장 6. 매화는 피고
  • 입력 : 2007.01.25 23:34
    • 왕비가 살아 있는 듯 절을 올린 리진이 느린 걸음을 뗐다.

      춘앵무의 완보(緩步)다. 두 팔을 펼쳐들 때 그녀의 눈앞에 지난날 연회 때의 풍경이 펼쳐졌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날개를 펴듯 나아갈 때나 꽃을 보듯 눈앞을 고요히 응시할 때 춤사위에 스며드는 대금 소리가 강연의 것이라는 것을 저절로 느끼던 그 시절. 우물 속의 찬기처럼 무슨 일이 터질지 몰라 하루도 온전히 마음 편한 날이 없었던 이 궁궐에서도 무희가 되어 춤을 추는 그 순간은 자유로웠다. 사랑을 느끼고 바람을 느끼고 축원을 느끼고 지는 꽃을 흐르는 물을 느끼던 유일한 때였다. 파리로 떠나기 전 날 밤 이 자리에서 왕비의 강녕을 바라며 추었던 춘앵무가 마지막 춤이 될 줄이야. 어디에 숨어 있던 기력일까. 일어설 힘도 없어 보이던 리진은 정성 들여 춘앵무를 완성하고 숨을 고르며 손을 모으고 물러섰다.

      아직 냉기가 서려 있는 봄 햇살이 교태전을 나서는 리진의 눈을 찔렀다. 사흘 전, 반촌을 나설 때부터 챙겼던 무명 보자기를 품은 채 용마루가 없는 교태전의 지붕을 지나 북쪽의 자경전을 보았다. 철인대비가 꽃담에 새겨진 천(千) 귀(貴) 수(壽) 낙(樂)을 어린 리진에게 일러주던 곳이다. 북쪽 담 꽃담에 새겨진 성(聖) 인(人) 도(道) 리(理)를 가르쳐 주던 젊은 대비의 슬픔이 밴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 리진은 상궁과 나인들을 거느리고 왕비가 자주 거닐었던 교태전 후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경회루의 연못을 파며 생긴 흙을 쌓아 올려 만든 아름다웠던 아미산에 잡초들이 우거져 있다. 갖가지 꽃과 나무들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던 모습은 사라지고 없다. 멀리 백악산만이 우울하게 인기척이 끊긴 아미산을 내려다보고 있다. 노을이 떨어지는 낙하담(落霞潭)과 달을 품고 있다는 함월지(含月池)에 쓸어내지 못한 작년의 낙엽들이 나뒹굴고 있다. 궁녀가 기르던 것인가. 흰빛과 노란빛이 섞인 고양이 한 마리가 아미산의 낮은 둔덕에서 햇볕을 쬐고 있다가 인기척에 저리로 달아났다. 리진은 무성한 잡초 속의 흰 바위에 앉아 차가운 석등에 몸을 기댔다. 달아난 고양이가 노송 밑에서 리진을 보았다. 궁궐을 힘없이 둘러보던 리진의 손이 무명 보자기를 풀고 블랑 신부가 필사한 불한사전을 들어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용서하세요.

      리진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용서하세요.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연이어 새어 나왔다. 오래되어 속지가 누렇게 변한 낡은 불한사전을 한 장씩 뜯어 입에 넣었다. 신 새벽에 장안당 뜰에서 자객들의 칼을 맞고 홑이불로 둘둘 말린 채 녹산에서 불태워진 왕비의 죽음은 소문으로만 존재했다. 자객들이 속적삼을 파헤치고 왕비의 흰 가슴에 칼을 세 번이나 내리꽂는 모습을 두 눈을 부릅뜬 채 보았건만 그들은 왕비가 살아 있다, 며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게 했다. 왕으로 하여 왕비를 폐하게 하기까지 이르렀다. 왕비의 죽음이 풍문으로 떠도는 동안 그녀는 고통에 질려 궁의 약방에서 구한 비상을 반촌 방 안의 드레스를 죄다 껴입은 채 누런 종이 사이사이에 발라 놓았다. 오한이 그치지 않았다. 어린 시절 뺨이 발그레한 채 익히던 프랑스어 단어들 사이에 이제 그녀의 숨을 멎게 할 독이 숨어 있다.

      ―이 길밖에는 없습니다.

      사전의 누런 종이를 한 장 한 장 찢어 씹어 먹고 있는 리진의 입술이 잠깐 비틀리는 듯 했으나 곧 담담해졌다. 미소를 짓고 있는 듯도 보였다. 가물가물해지는 의식 저편으로 파리의 대로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아기를 유산하던 날의 슬픔이 코 고르당의 저택에서 벌어진 무도회와 함께 스치기도 했다. 그 사이로 콜랭의 웃는 얼굴도 지나갔다.

      얼마 후, 양의문을 들어선 서씨가 교태전에 들었다가 황망히 리진을 찾아다녔다. 백악산이 내려다보는 아미산의 석등에 기댄 채 리진이 비스듬히 쓰러져 있다. 노송 밑으로 달아났던 고양이가 리진의 발치 아래 몸을 웅크리고 있다. 리진의 입가에 실낱 같은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두 손엔 한 웅큼 종이조각들이 들려 있다. 이른 봄 햇살이 그녀의 목덜미 위로 쏟아져 내리고 두 손에서 풀려 나온 종이조각들이 봄바람에 밀려 주위에 이리저리 떠다녔다.

      그것은 흡사 봄을 맞이해 나래를 편 금빛 나비처럼 보이기도 했다.

     

     

  • [신경숙 연재소설 -183] 푸른눈물
  • 에필로그
  • 입력 : 2007.01.28 23:27
    • 1914년, 파리의 어느 겨울날 저녁,

      콜랭 빅토르 오귀스트 드 플랑시는 파리의 아파트 벽난로에 불을 지폈다. 이 아파트에서 사는 동안 겨울 아침은 벽난로 앞에서 홍차에 우유를 탄 밀크티를 마시며 신문을 보는 것으로 시작되곤 했다. 그런 날이 언제 다시 올까. 불 태우려고 벽난로 앞에 쌓아 놓은 것들만 처리하면 어디로든 떠날 준비는 끝이 났다. 너도밤나무가 있는 광장을 에워싸고 있는 이 아파트는 상류층을 위한 아파트다. 외부에서 보면 그렇게 크다는 느낌을 주지 않아도 내부 계단으로 연결된 4층 규모의 아파트를 관리하기란 쉽지 않았다. 콜랭은 그동안 가끔 자신이 귀족이기를 열망했던 아버지가 남긴 이 아파트의 관리인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동양으로만 거의 이십 년을 떠돌았던 삶. 콜랭이 파리를 비울 때면 어머니가 이곳을 관리했다. 집사를 따로 둘 상황이 못 되어 늘 허덕이면서도 어머니는 이 아파트를 다른 사람에게 넘길 생각 따위는 아예 하질 않았다. 벽난로에 쓸모없게 된 책과 서류들을 던져 넣으며 콜랭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낭비 없이 근면하고 성실히 살았지만 아버지가 남긴 이 유산을 지키는 데 힘에 부치고 벅찼다. 젊은 날부터 아버지의 존재가 짐처럼 여겨져 벅차 이 나라를 벗어나 사는 인생을 택했으면서도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금까지도 콜랭은 아버지의 유산인 이 아파트를 버리지 못하고 관리를 해왔다.

    • ▲/그림= 김동성
    •  

      콜랭은 벽난로의 불길 속에 허드레 것들을 집어넣으며 우울한 마음에 사로잡혔다. 인간이란 미워하면서 싫어하면서 닮아 가는가. 이민자이면서 기필코 이 나라의 귀족이 되어보겠다고 애쓴 부친의 욕망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돌아보면 자신의 삶 또한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는 생각.

      저 먼 극동의 나라에까지 제국의 손길을 뻗던 유럽이 이제 서로 편을 갈라 전쟁을 하고 있는 중이다.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슬라브 청년이 암살한 것이 전쟁을 발발시킨 원인이었다. 황태자 부부를 암살한 슬라브 청년이 세르비아의 정보부원으로 밝혀지자 오스트리아는 곧바로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같은 슬라브 족으로 세르비아와 형제국임을 자랑하던 러시아가 오스트리아를 향해 군사 총동원령을 내린 것이 유럽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세계는 서로의 이권에 따라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있던 독일과, 러시아와 협상국으로 지내던 프랑스와 영국이 편이 갈리며 전쟁에 줄줄이 엮였다. 회색 군복을 입은 무뚝뚝한 독일군과 “라 마르세예즈”를 목청껏 외치는 프랑스군과 어딘지 모르게 우울해 보이는 영국군이 총을 쏘아대며 인류가 일궈놓은 근대 문명들을 파괴하고 있는 중이었다. 여름에 시작된 전쟁은 수십만 명의 사상자를 내며 겨울이 될 때까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파리까지 독일군이 밀고 들어올 거라는 소문이 자자해지며 장기전으로 돌입했다.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 채 서로를 죽이고 죽어갔다. 앵발리드 광장이나 센 강변엔 ‘무기를 잡으라, 시민 동지들이여!’를 외치는 젊은이들이 행진을 하곤 했다. 언제 피란길에 오르게 될지 모를 상황이었다.

      벽난로의 불길에 가지고 떠날 수 없는 것들을 하나씩 집어 던지던 콜랭의 손길이 멎었다. 이제는 쓸모 없어져 태워버리려고 쌓아놓은 서류뭉치 사이에 기메 박물관의 동양 총서가 나왔다. 조선인 홍종우의 이름으로 번역된 책이다. 콜랭은 책장을 한 장 넘겨 보았다. “배가 많이 드나드는 두 대양 사이에 위치하고 있고 해마다 수많은 항해자들의 눈에 띄긴 하지만 코리아는 가장 탐험이 덜된 나라들 중의 하나이다.” 콜랭은 홍종우가 쓴 서문을 잠깐 읽다가 책을 접었다. 벌어진 책 사이를 펴보니 피가로지 한 장이 접힌 채 꽂혀 있다. 콜랭은 물끄러미 신문에 찍혀 있는 날짜를 살펴 보았다. 1910년이면? 4년 전의 것이다. 무슨 중요한 것이어서 여기에 끼워 뒀을까. 구레나룻이 거의 회색빛이 된 나이 든 콜랭의 손가락이 신문을 펼쳤다. 대한제국이 일본과 합방을 하였다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콜랭은 묵묵히 대한제국이란 글자를 응시했다.

      콜랭은 비로소 이 신문을 읽던 날의 아침을 떠올렸다.

  •  

     

  • [신경숙 연재소설 -184] 푸른 눈물
  • 에필로그
  • 입력 : 2007.01.30 00:21 / 수정 : 2007.01.30 00:21
    • 사 년 전, 무심코 신문을 넘기다가 대한제국이 일본과 합방을 했다는 이 기사를 보고 홍차 잔을 바닥에 떨어뜨렸던 그 아침.

      대한제국이란 나라 이름은 예나 지금이나 콜랭에겐 낯설었다. 대한제국은 늦은 저녁 내렸다가 이른 아침 녹아서 자취를 감춘 눈처럼 지구상에 잠시 존재했다가 이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콜랭에게 대한제국은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었다.

      그날 합방소식을 서너 번을 반복해 읽은 뒤 여기에 꽂아 두었던 모양이다. 콜랭은 이마를 찌푸린 채 신문을 다시 접어 벽난로에 던졌다. 신문은 벽난로 안에서 확, 불타오르다가 이내 사그라졌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합병되던 당시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못마땅해하던 영국은 타임스를 통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이 전쟁이 발발하던 지난 여름에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파나마 운하의 수로에 다이너마이트를 폭파시켜 수로의 마지막 문을 열고 증기선이 오가게 하는 공을 세운 미국도 대한제국과 일본의 합병이 대한제국 국민을 위해서라며 지지를 표명했다.

      조선의 왕이 자국공사관으로 몸을 피해 가기까지 했던 러시아는 이미 포츠머스 조약에서 열강들이 일본과 대한제국의 병합을 사실상 승인한 것으로 본다는 입장을 밝혔다. 대한제국에 동정을 표시한 나라는 청나라가 거의 유일했다.

      대한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니 일본에 의한 합병은 그들에게도 위협이었다. 유럽이 전쟁에 빠져 있는 지금 일본은 예상대로 독일이 가지고 있던 산동지역 이권을 승계 받으려고 하고 있었다. 프랑스가 개입하고 있는 청나라의 철도부설과 광산개발권을 탐내고 있는 중이다.
    • 콜랭은 손에 들고 있던 홍종우가 번역한 책도 불길에 던졌다. 뭔가 가슴을 뚫고 올라오려는 상념들을 밀어 넣으려는 듯 콜랭은 연이어 쓸모 없어진 서류들과 남겨놓고 떠나기 싫은 물건들을 서둘러 벽난로에 집어 던졌다.

      ―눈이 내려요.

      콜랭의 부인이 홍차에 우유를 탄 밀크티가 담긴 둥근 볼을 쟁반에 받쳐 들고 벽난로 앞으로 왔다.

      ―아직도 많이 남았군요. 밤새 태워도 다 못 태우겠네.

      밀크티를 벽난로 앞의 테이블에 내려놓고 부인이 미리 찢어 놓은 편지 조각들이 담긴 상자를 벽난로에 털어 넣었다. 어느 책장에 끼여 있다가 벽난로 앞으로 팔랑거리며 떨어진 사진 한 장을 부인이 집어 들고 들여다보았다.

      ―이 동양 여자는 누구예요? 콜랭?

      부인이 내미는 사진을 받아 든 콜랭의 주름진 눈이 흔들렸다. 리진이다. 이게 왜 남아 있을까. 조선에서 첫 휴가를 얻어 파리에 왔을 때 콜랭은 파리생활의 마지막 무렵에 몽유에 빠진 리진을 위해 꾸며 준 동양의 방에 있던 화각농이며 모란도들을 기메 박물관에 기증했다. 그래도 남아 있는 리진이 쓰던 물건들은 조선의 서씨에게 보내 주었다. 서씨의 부탁이었다. 어느 날인가는 사진첩에 끼여 있던 그녀의 사진들을 낱낱이 뽑아서 불태웠다. 한 장도 남기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누구예요?

      콜랭의 눈이 사진에 붙박이자 부인이 다시 물었다. 부인의 목소리가 아득히 먼데서 울리는 듯했다. 조선으로 첫 부임해 갔던 해. 왕을 알현하러 궁궐에 가던 날 콜랭은 주머니 속의 컨실드 베스트 카메라를 조끼 안에 숨겨 갔다. 피사체 모르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카메라였다.
      그녀를 처음 만났던 다리는 금천교였지. 청옥당혜를 신은 상궁을 따라가던 그녀의 검은 두 눈이 콜랭을 뒤돌아보고 있었다.
  •  

     

     

  • [신경숙 연재소설 185·마지막회] 푸른 눈물
  • 에필로그
  • 입력 : 2007.01.31 00:00 / 수정 : 2007.01.31 03:01
    • 그래, 어떤 눈 속엔 운명이 담겨 있다.

      리진의 검은 눈과 처음 마주친 순간 자신도 모르게 주머니 속의 카메라 렌즈를 잡아당겼던 옛일들이 솟구쳐 콜랭은 벽난로 앞 의자에 주저앉았다. 무심코 봉주르! 인사를 건네자 자연스럽게 봉주르! 하며 인사를 받던 그녀.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을 알고 있는 듯이 다정하게 바라보던 조선 여인의 검은 눈동자. 관리의 재촉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뒤가 당기는 것 같아 뒤돌아보았던 그때 동시에 뒤돌아보던 그녀를 향해 또다시 조끼 안의 카메라 렌즈 끈을 잡아당기면서 그는 생각했었다. 저 검은 눈을 평생 잊지 못하리라, 고.

      ―당신 울어요?

      부인이 놀라서 콜랭의 얼굴을 보았다.

      모로코에서 다시 조선으로 가라는 부임 발령을 받고 콜랭은 리진에게 마지막을 알리는 편지를 썼다. 조선으로 돌아가지만 옛날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라 했다. 모로코에 있는 동안 당신과의 관계를 깊이 생각해 보았노라고 썼다. 파리에서 그녀와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건 어머니의 반대 때문만은 아니었노라고. 귀족의 신분을 지키고자 했던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라 여겨 그런 것만도 아니었노라고. 바로 나 자신 때문이었다고 그는 솔직히 썼다. 외교관으로서 그녀와의 사랑을 더 이상 지켜 나갈 용기가 없노라고. 조선으로 돌아가지만 다시 예전의 생활을 계속할 수는 없다고 썼다. 당신, 리진을 사랑하는 마음은 가슴에 묻고 외교관으로서만 돌아가겠다고 했다. 편지를 먼저 보내고 두 달의 뱃길을 견디며 조선에 도착하자마자 제물포까지 마중 나온 통역관 최 베드로에게 그녀의 마지막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셈해 보니 그가 조선에 도착하기 칠일 전의 일이었다. 최 베드로가 전해준 리진이 남긴 서찰엔 왕비가 시해당하던 날 밤의 정황이 상세히 쓰여 있었다. 그것뿐이었다.
    • 콜랭의 주름진 눈이 회한에 젖었다. 외교관으로만 돌아가겠다고 했던 자신에게 왕비가 시해당하던 밤의 정황을 낱낱이 써서 남긴 것은 이권과는 상관없이 왕비의 죽음을 제대로 알려달라는 뜻이었다. 그랬다. 그걸 왜 이제야 깨닫는단 말인가. 최 베드로가 그녀가 왕비의 처소를 죽음의 장소로 택한 것은 왕비를 시해한 쪽이 일본임을 알리기 위함이 아니었겠느냐 했을 때도 왜 그의 말을 새겨듣지 않았을까.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마지막 편지를 보낸 이는 본인이었으면서도 콜랭은 그녀가 자신을 향해 단 한마디도 남겨놓지 않았다는 것에 좌절을 느꼈다. 그 좌절감이 리진이 남긴 왕비가 시해당하던 정황을 적은 서찰을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채 찢어버리게 했다.

      ―사랑했던 여인인가 보군요.

      부인이 벽난로 앞을 떠났다.

      결국 그녀가 선택한 죽음을 아무것도 아니게 만든 사람은 나였는가. 리진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그의 눈이 흔들렸다. 지극히 가까운 몇몇 사람 외에는 리진의 죽음을 아는 이 없이 그녀는 쓸쓸히 잊혔다. 조선은 왕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궁으로 돌아오며 대한제국이 되었다. 뒤늦게 이제 왕비가 아닌 황후의 국장이 치러지고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을 때 리진의 무덤 앞에 두 손이 없는 사내가 얼어 죽은 채 발견되었다는 얘기를 들으면서도 콜랭은 리진의 무덤을 찾지 않았다. 청나라에서 돌아온 홍종우가 그녀의 무덤 위에 얼어 죽은 채 붙어 있는 남자의 시신을 리진 옆에 묻어 주었다고도 했다. 콜랭은 죽음을 택하면서도 자신을 향해 단 한마디도 남기지 않은 리진의 존재를 아예 생각하지 않으려고만 했다. 대한제국이 된 조선 땅에 프랑스 학교를 짓고 성당을 세우며 십 년 가까이 지내는 동안 단 한 번도. 벽난로의 불길에 얼굴이 붉어진 콜랭이 그녀의 사진을 뺨에 대었다.

      이 사진을 품고 그녀를 다시 볼 수 있기를 고대하던 조선에서의 날들이 거친 물살을 이루며 밀려들었다.
      공사관 마당의 벽오동 나무 밑에서 그녀의 처소에 불이 꺼지는 걸 확인하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던 날들. 능소화 위에 날개를 접고 앉아 있던 나비가 저기로 날아가는 것만 같이 아름답게만 여겼던 사진이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을 돌아다보는 그녀의 검은 눈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단 한마디도 남기지 않은 게 아니라 무수히 많은 말을 남겼으나 알아들으려 하지 않았던 건 자신의 나약과 비겁을 은폐하기 위함이었음을 콜랭은 고통스럽게 깨달았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사진을 붉게 타고 있는 벽난로의 불길에 던졌다. 붉은 불길이 사진에 옮아 붙는 순간 길린! 하고 다정히 부르는 소리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뒤돌아보았다. 금천교 위에서 그를 향해 뒤돌아서던 그녀의 깊고 검은 눈과 그의 회한에 젖은 눈이 한순간 마주쳤다.

      콜랭이 일어서서 창가로 다가갔다. 광장의 너도밤나무를 향해 나 있는 덧문을 열자 눈 섞인 차가운 바람이 실내로 훅, 들이쳤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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