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종을 기다리는 사람들 4편 - 3金과의 인연
김병총
1969년, 박정희 정권의 ‘3선개헌’ 음모는 엉뚱하게도 ‘3김시대’를 열게 된다. 차기 대권을 기대하다가 실망한 김종필, 당돌하게 ‘40대 기수론’ 을 내세운 김영삼, ‘김영삼보다는 내가 해야지’ 하면서 기회를 엿보는 김대중, 이렇게 ‘비공식 40대 金씨 트로이카 - 3金’이 박정희의 장기집권 음모에 저항하면서 급부상을 하는 것이다. 이때 박찬종은 그의 20대를 마감하고 있었다. 서른 살이 되던 해에 박찬종은 서울지검과 춘천지검에서 활약한 7년간의 검사생활을 마감하고 변호사와 공인회계사를 동시에 개업한다.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박찬종의 공통점 중 하나는 그 네 사람이 모두 집권여당 공천으로 출마한 선거에서 첫 번째 금배지를 달았다는 점이다. 자유당 거물정치인 장택사의 비서 출신인 김영삼은 1954년 고향 거제에서 자유당 공천으로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정계에 등장한다. 김대중은 1959년 5월 14일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서 당시 집권여당인 민주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당선한다. 그러나 김대중이 네 번째 도전하여 당선한 그 선거는 이틀 후에 일어난 5.16 군사 쿠데타에 의해 국회가 해산됨으로써 금배지의 꿈을 앗아간다. 5.16 군사쿠데타를 주도한 김종필은 1963년 그가 창당한 민주공화당 공천으로 선거에 나가서 국회의원이 된다. 이들에게 첫 번째 금배지를 달아준 정당은 모두 집권여당이었다.
복과 덕을 겸비한 사람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박찬종은 민주공화당 공천으로 부산 서 동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한다. 막강한 인물과 인재들이 모여 있는 민주공화당에서 박찬종씨를 발탁한 것은 그의 상품성 때문이었고, 부산 서 동 지역의 민주시민이 박찬종을 국회에 보낸 것은 그의 참신성과 장래성 때문이었다.
박찬종의 이력을 보면 분명 그에게는 천복(天福)이 들어 있다. 복없는 자가 가장이 되면 가정이 곤경에 빠지고, 덕 없는 자가 나라를 맡으면 국가가 곤경에 빠진다는데, 박찬종은 오는 복을 차지만 그래도 따라붙는 복이 있는 사람이다. 가장의 복이 있으면 가정이 화목하고 국가지도자의 덕이 높으면 국운이 융성한다는 것이 진리라면, 천복을 타고난 박찬종의 구역에서는 횡액이 있을 수 없다. 소년출세(21세의 고시 2관왕, 22세의 고시 3관왕), 청년입지(막강 집권정당의 발탁에 의한 정계입문과 승승장구), 청년각성(민주공화당 정풍운동과 민추협의 주도적 활동), 중년유한(대권의 문턱을 넘나들다가 날쌘돌이 세력에 밀려나 와신상담한 시기), 장년유정(대권의 문턱에서 대권을 잃고 와신상담의 세월을 보낸 자만이 깨달을 수 있는 경지에서 정치를 보게 된 현재)의 과정을 거치고, 이제 다시 고향의 이웃 앞에 돌아와 겸손하게서 있는 그에게는 ‘맑은 복(淸福)’ 이 있다. 따라서 그의 주변에는 복이 서리지 않을 수 없다. 맑은 복(淸福)과 맑은 덕(淸德), 그것이 박찬종의 분위기다. 복 없고 덕 없는 것만큼 서러운 것이 있는가. 이제 우리 서민대중이 복덕(福德)을 누려야 할 때다. 복 있는 가장 덕 있는 지도자의 기운을 받아서.
박찬종은 자기 가진 것 다 빼주고 빈껍데기가 되어서 허허 웃는 사람이다. 박찬종은 결코 남의 복덕을 빼먹고 기운 차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복덕 다 빼주고 만족해하는 사람이다. 박찬조의 주변에 복덕이 서리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그것이다. 맑은 사람은 자기 복덕을 주변에 뿌리고 탁한 사람은 주변의 복덕을 사취해서 자기 복덕으로 챙긴다. 맑은 사람과 탁한 사람을 가려낼 줄 아는 지혜가 유권자의 지혜다.
변호사에 공인회계사에 국회의원 20년을 한 사람이 빈털터리라면 믿겠는가. 박찬종은 빈털터리다. 이런 경우와 비교해 보라. 온갖 선거에서 낙선을 밥 먹듯이 하고 원래 가진 것 없던 고위층의 재산이 신문에 오르내리고 있다. 박찬종의 이력에 비추어 보면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박찬종의 가난은 이 시애의 경이(驚異), 바로 그것이다. 박찬종의 가난이 부정부패로 얼룩진 정치판의 죄를 씻어주는 별빛이 아닌지. 박찬종의 구역에 복덕이 가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것이다.
박찬종을 기다리는 사람들 3편 - 박정희, 그리고 박찬종
1961년, 그해에 육군소장 박정희는 5.16군사 쿠데타로서 그 이름을 세상에 알렸고, 서울 상대 경제학고 재학생 박찬종은 사법 행정, 고시 양과에 합격함으로써 그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그 때 그의 나이 21세였는데, 그 이듬해에는 공인회계사 시험에도 합격하여 고시3관왕의 타이틀을 확보했다. 경제개발의 첫 걸음이 시작되는 때에 한글세대의 첫 인재가 탄생한 것이다. 박찬종은 박정희의 카리스마가 발동하던 해에 등장한 ‘젊은 피’였다. 박정희와 박찬종, 이 두 사람은 1961년이 한민족에게 제시한 두 개의 상징적 존재였고, 한민족의 연도 표기가 단기에서 서기로 바뀌는 시점에서 제시된 두 개의 상징적 존재였다.
박찬종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군복은 어떤 것일까. 스마트한 청년 박찬종이 선택한 군대는 그 외모와 가장 잘 어울리는 제복이 있는 해군 이었다. 박정희가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지휘할 때 대한민국 해군 법무관 박찬종은 자유와 낭만의 상징인 해군 제복을 입고 푸른 바다와 같은 포부를 키웠다.
푸르른 대한민국 해군 법무관 박찬종, 그 젊음에는 가난한 박정희의 ‘잘 살아보자’는 포부도 없었고, 어린 나이에 대통령을 꿈꾼 김영삼의 당돌한 야망도 없었고, 가난과 역경을 헤쳐 나온 김대중의 처절한 투지도 없었다. 박찬종은 다만 회사원인 아버지와 초등학교 교사인 어머니를 가진 모범적인 중산층 가정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로 자라났고, 부모와 이웃의 기대를 모으면서 경남중 경기고 서울 상대 경제학과의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어린 나이에 고시 3관왕이 되었다. 그는 아주 정상적으로 빈틈없는 모범코스를 밟으면서 성장한 것이다.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과 달리 박찬종의 희망과 포부는 그래서 순수할 수 있었다.
1964년, 그 해에 박찬종은 스물다섯 살짜리 대한민국 검사였다. 이때 김영삼은 3선 의원이었고, 김대중은 재선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초선이나 다름없는 겨우 몇 개월 경력의 국회의원이었다. 그리고 이때 박정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독재자’로서 이른바 ‘개발독재’의 시대를 열고 있었다. 달리는 말에 탄 사람은 그 차의 속도를 실감하지 못한다. 달리는 차의 속도는 길가에서 지켜보는 사람이나 알 수 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목표를 초과달성하면서 1960년대를 사납게 질주할 때 박찬종은 개발시대의 부작용을 경제 전공의 20대 검사로서 관찰하고 있었다. 난개발경제의 시대를 검사의 눈으로서 지켜본 경제 전문가 박찬종이었다.
박찬종을 기다리는 사람들 2편
龍馬를 만나면
역대 정치지도자는 한결같이 독불장군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박찬종도 소문대로 독불장군이다. 독불장군들이 판을 쳤고, 지금도 치고 있는 시대다. 그런데 유독 박찬종만을 독불장군이라고 한다. 독불장군들 하는 짓이 한심하고 답답해서 자기 가슴도 치고 세상에 경고도 했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어 홀로 독불장군이 되고만 것이다. 혼자 남은 독불장군인 까닭은 혼자 변함없이 자신을 지켰기 때문이다. 다른 독불장군들은 모두 누구의 말(馬)이든 다른 말의 힘을 빌렸다.
그러나 박찬종은 이 전쟁이든 저 전쟁이든 간에 오로지 자기 말만 타고 달렸다. 남을 위한 전쟁이라도 적진 깊숙이 들어가서 용맹하게 싸웠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자기 말을 타고 원래 자기가 있던 자리를 향해 표표히 떠났다. 그의 정치생애에는 공로만 있고 포상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박찬종은 서부극영화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아주 흡사하게 닮았다. 지난 세월 박찬종 독불장군의 한은 용마(龍馬)를 만나지 못한 한이었다.
장수(將帥)나aus 용마(龍馬)난다고 했다. 분명 어딘가에 용마가 있다. 지난 세월, 세상은 온통 안개 속이었다. 민심이 용마인데, 지난 시대의 용마는 금권정치 보스정치 패거리정치의 안개 속에서 길을 잃고 주인을 찾지 못했다. 지난 시대의 용마는 독불장군의 몫이 아니었다. 세상의 안개에 가려서 박찬종 독불장군을 찾지 못한 용마를 위해 안개를 걷어줄 일이다.
박찬종은 돈이 없이도 보스의 도움이 없이도 패거리가 없이도 홀로 대중의 마음을 휘어잡은 첫남자였다. 박찬종은 여러 방면에서 첫남자였다. 남의 등에 업히지 않은 첫남자였고, 남의 등을 치지 않은 첫남자였고, 남을 헐뜯지 않은 첫남자였고, 남과 상관없이 홀로 고고하게 자기 목소리를 낸 첫 남자였고, 흙탕물 속에서도 몸을 더럽히지 않은 첫남자였고, 오로지 서민대중에게 사랑을 바친 첫남자였다.
박찬종이,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10여년 줄기차게 국민 지지유리 1위일 때, 그 지지도의 세부항목 중에는 ‘서민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줄 것 같은 정치인 1위’도 어김없이 끼어 있었다. 박찬종이 처음 나타났을 때 모두들 ‘새롭다’고 했다. 그때까지 전혀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스타일의 정치인이었다. 그는 분명 한국정치사의 산상품이었다. 박찬종은 지금도 여전히 새롭다.
박찬종 이후로 그보다 더 새로운 정치인은 없었다. 박찬종의 새로움은, 오만상을 찌푸리고 고래고래 ‘나, 새롭다’고 소리 지르는, 그런 새로움이 아니다. 보초병과 매복군과 저격수의 무등을 타고 앉아서 ‘나, 새롭다’고 외치는, 그런 ‘탁하게 새로운’ 정치인도 아니다. 박찬종은 언제나 홀로 맑고 새로운 정치인이었다. 박찬종의 물은 맑다. 한국 정치사에서 박찬종만큼 ‘물 맑은 남자’, 물 좋은 남자‘는 없었다.
서문
내 친구 박찬종... 이렇게 적는 순간, 갑자기 가슴이 아릿하게 저려옵니다. 소복 입은 첫사랑을 먼발치에서 보고 돌아서는 듯 한 그런 아릿함입니다. 그를 생각하는 일은 즐거움이면서 아픔입니다.
박찬종은 나의 40년 친구입니다. 40년. 그 세월 내내 그는 가는 곳마다 하는 일마다 언제나 ‘최고’ 이었습니다. 지금도 내게는 그가 최고입니다. ‘아침이슬’, ‘기다리는 마음’, 그리고 ‘오월의 노래’들이 비장하게 열창되던 민주광자에서 그는 최고로 ‘맑은’ 정치인이었고, 위세절정의 ‘3김’ 앞에서 그는 최고로 ‘분명한’ 정치인이었고, 선거운동을 문화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최고로 ‘멋진’ 정치인이었고, 국민지지율 1위를 최고로 ‘오래 누린’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러나 ‘3김’ 을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던 그가 지금 최고로‘억울한’ 정치인이 되어 있습니다.
나는 지금 변호사인 내 친구 박찬종을 변호하려 합니다. 내 어떻게 그를 변호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스스로 ‘피고인’ 을 자처하고 있지만 그는 피고인이 아닙니다.
내 친구 박찬종……. 그를 변호합니다. 안타깝고 아쉬웠던 우리 정치사의 여러 길목을 돌아보듯이, 세균 항아리에 빠져서도 변함없는 무균질로 살아 돌아온 박찬종을 위로하듯이, 우리 모두 위로받기 위해, 우리 모두 새로운 희망을 가지기 위해 내 친구 박찬종을 변호합니다.
시작하며,
첫 사람 박찬종
① 민주적 독불장군
김영삼과 박찬종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김영삼과 박찬종은 부산경남 출신의 민주 지상주의 독불장군이라는 점이 같고, 그 독불장군의 성질이 다르다. ‘김영삼 독불장군’은 정치권에서 유일하게 IMF사태를 예고한 경제 예언가 박찬종을 '독불장군‘으로 몰아붙였다. 박찬종의 날개를 꺾어놓지 않았다면 김영삼의 퇴임 후 입지와 한국정치의 흐름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때 박찬종의 날개가 꺾이지 않았다면 김대중의 시대가 열릴 수 있었을까. 김대중 이후의 시대도 마찬가지다.
김대중과 박찬종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김대중과 박찬종은 경제를 잘 아는 민주적 독불장군이라는 점이 같고, 경제에 다가서는 자세가 다르다. 정치 차원에서 경제를 본 김대중은 IMF사태를 불러오는 데 일조를 했고, 경제전문가의 입장에서 경제를 본 박찬종은 IMF사태를 예언하다가 오히려 김영삼의 미움을 받고 속병이 들었다. 박찬종의 예고가 묵살되면서 IMF사태가 왔고, IMF사태를 진정시킨 김대중의 경제를 국민 10명 중 1명을 신용불량자로 만들었다.
노무현과 박찬종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노무현과 박찬종은 부산경남 출신 대중정치 지향의 독불장군이라는 점이 같고, 구사하는 대중정치의 품격이 다르다. 선진시민인 대한민국 국민은 이제 인간이나 정치에서도 품격을 따질 때가 되었다. 국제사회는 그 나라 사람과 경제와 정치의 품격으로서 국위를 매긴다.
이회창과 박찬종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이회창과 박찬종은 원칙주의적 독불장군이라는 점이 같고, 원칙에 융통성이 있고 없다는 점이 다르다. ‘이회창 독불장군’은 자기기준의 원칙에 집착하다가 정권을 빼앗겼고, ‘박찬종 독불장군’은 이회창 독불장군이 ‘김대중 독불장군’, ‘노무현 독불장군’에게 연달아 패배함으로써 융통성 있는 원칙을 펼쳐볼 기회마저 놓쳤다.
다음회에 계속됩니다.JPS.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