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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끝에 천하를 춤추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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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욱 (muye)
안녕하세요. 강호를 잠시 떠났다가 돌아왔습니다. 더욱 알차고 흥미진진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도록 하겠습니다. 아, 무예사랑방 카페는 문 닫고 이리로 이사왔습니다. 새 집에서 새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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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발을 쏘아 49발을 맟힌 정조의 활솜씨    2010/02/07 20:17 추천 10    스크랩 2
http://blog.chosun.com/muye/4502411
 

무인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 또한 탁월한 무인이었습니다.


정조가 신하들과 함께 활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정조의 실력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5순(巡)을 쏘아 24발을 명중시켰다"


정조대왕의 어록인 일득록(日得錄)에 기록된 성적입니다. 여기서 1순은 다섯 발의 화살을 쏘는 것을 말합니다. 즉 25발을 쏘아 24발을 맞힌 것이지요. 음, 대단하지 않나요?

 

정조-득중정 활쏘기.jpg

 <화성 득중정에서 활을 쏘는 정조>

 

 

25발 중 24발을 쏘아 모두 과녁에 명중시킨 정조는 마지막 한 대의 화살을 쏘기 전에 잠깐 숨을 돌려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활쏘기는 진실로 군자의 다툼이니 군자는 남보다 더 위에 서려 하지 않으며, 또한 사물을 모조리 취하는 것에도 마음을 두지 않는다.”


그리고는 마지막 시위를 당겼는데 화살이 정곡을 살짝 빗나갑니다. 못 맞힌 걸까요? 아니면 안 맞힌 걸까요?


다음날에도 정조는 활을 쏩니다.

이때 그는 10순(50발)을 쏘아 49발을 맞추었고, 마지막 50번째 화살은 역시 정곡을 빗나갑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마지막 화살은 일부러 과녁을 빗나가게 쏜 것이지요. 한 발의 여유라고나 할까요. 기록으로는 그가 50대의 화살을 쏘아 49발을 맞힌 적이 12차례나 된다고 합니다. 군자이자 무인인 정조의 탁월한 활 실력과 더불어 그의 넉넉함을 알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정조-서장대 훈련.jpg

<서장대에서 군사 훈련을 지휘하는 정조>

 


박제가의 ‘어사기(御射記)’는 정조가 1792년 10월과 11월에 활쏘기를 한 기록입니다. 여기에는 정조의 구체적인 활쏘기 점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과녁을 맞히면 1점, 과녁 중앙의 정곡을 맞히면 2점입니다. 정조는 50발을 화살을 쏘아 보통 70점~80점을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과녁을 벗어난 화살은 한 대도 없었고요. 정곡의 크기를 조금씩 줄여가면서 실력을 더욱 키우던 정조는 한 번은 100발을 연이어 쏘아 153점을 기록하기도 합니다. 마지막 한 발은 늘 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와 비슷한 예를 공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공자는 젊은 시절 가난하여 물고기를 잡은 적이 있습니다. 이때 그는 “낚시질은 하였으나 그물질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필요한 만큼만 취하였지, 모조리 취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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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잡는 해병대의 혹한기 수련    2010/01/28 21:29 추천 7    스크랩 1
http://blog.chosun.com/muye/4478195

해병대 수색대대의 혹한기 훈련 모습입니다. 늠름하지 않나요? 귀신 잡는 해병대의 위용이 정말로 대단합니다.

 

해병

 

해병대

 

해병대-도깨비2.jpg

                                                                                                    <사진=도깨비뉴스(dkbnews)에서 퍼옴>  


“겨울에는 삼동(三冬)에 단련하고, 여름에는 삼복(三伏)에 단련한다.”


무예계에 전해지는 격언 중 하나입니다. 무예의 단련은 쉬지 않고 연마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삼동과 삼복이라도 쉬지 말고 계속 무예를 익혀야만 성과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혹한과 혹서를 이용하여 신체를 단련하면 많은 단련효과를 거둘 수가 있습니다. 우선 사람이 가장 움직이기 싫어하는 여름과 겨울에 쉬지 않고 연습하면, 사람의 의지력과 인내심을 배양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신체가 추위와 더위에 대한 저항력을 높여 자연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을 향상시켜 줍니다. 여름에는 기온이 높으므로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함과 기술 연습에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있고, 겨울에는 기온이 낮으므로 힘과 인내력 등을 연습하면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주의할 점은, 겨울에 심한 운동을 너무 갑작스레 시작한다든지, 운동량을 증가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신체가 위축되고 관절 활동력도 저하된 겨울에 갑자기 부담을 주는 것은 뼈와 인대, 근육 등 모든 부위에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겨울에 마라톤이나 달리기에 입문한 사람들의 관절 사고가 잦은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또한 아래와 같은 도전은 일반인은 절대 금물입니다.

 

특전사

 <특전사의 혹한기 훈련. 알몸으로 입수. 밖의 기온이 낮기 때문에 물속은 오히려 따뜻하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극기로 강인한 정신력을 기르는 것은 좋지만, 무리하다 보면 오히려 신체에 치명적인 장애를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친 것은 오히려 모자는 것보다 더 나쁜 결과를 가져다주니까요.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꾸준히 적당량의 운동을 하는 것이 최선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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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으로 뼈와 관절을 으스러뜨리는 사무라이 유술    2010/01/24 18:22 추천 5    스크랩 0
http://blog.chosun.com/muye/4465721
 

일본에서는 1700년대 이전에 무려 167개의 유술 유파가 존재하였다.


관절을 꺾거나 조르는 유술(柔術)은 한반도나 중국의 무술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특히 일본에서 세분화되고 전문화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전국 시대(戰國時代)가 그 답이다.


1467년 발생한 오닌(應仁)의 난을 시작으로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까지 100년 이상 지속된 내전을 겪으면서 사무라이의 살상 기술이 최고조에 달하여 검법과 더불어 유술이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 전국시대는 하극상의 시대로도 불리며, 오로지 강자만이 약자를 지배하던 난세였다. 신하가 주군을 죽이고, 아들이 아비를 해치고 성을 차지하는 패륜이 연일 일어났으며, 각 성의 영주들끼리의 영토전쟁이 그치지 않았다.

 

관구신심류

 <일본 유술 유파인 관구심신류(関口新心流)에서 전하는 유술 그림>


이 시기 일본을 방문한 중국의 사신이 “왜국의 강에는 물이 아니라 피가 흐른다.”라고 본국에 보고할 정도였으니 그 참상을 짐작할 만하다. 유술은 이러한 전국 시대의 사무라이들이 싸움터에서 최후에 사용하던 살상 기술이다.


에도 시대 병법서인 『병술요훈(兵術要訓)』은 이러한 유술의 특징을 명쾌하게 정의하고 있다.


“온몸에 갑주를 착용한 전장에서 베기와 찌르기만으로는 적을 죽이기 어렵다. 서로 싸우다 보면 무기가 뒤엉키는 경우도 많으므로, 결국 격투해서 적의 목을 자르는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검술과 더불어 유술을 기본적으로 익혔다. 유술을 모르면 검술이 뛰어나도 맨손으로 드잡이할 때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유술-대동류.jpg

 <유술의 고수는 상대방의 손가락 하나만이라도 걸리면 온몸을 옴짝달싹 못하게 제압할 수 있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검도 대련에서는 죽도 혹은 목검으로 서로 치고 받고 하다가 상대방을 집어던지거나 관절을 꺾기도 했다. 그리고 넘어진 상대방의 얼굴에 쓰는 면(面)을 벗기면 한판승을 땄다. 전장터에서 사무라이들이 유술로 넘어뜨린 적의 목을 단검으로 자르던 관습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전국  시대 발생한 유술은 에도 막부가 들어서고 평화가 정착되면서 더욱 활성화되고 기술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검을 들고 전장에 나갈 일이 없게 된 사무라이들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고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무술 연마에 더욱 정진하게 된 것이다. 검술도 그렇고 유술도 마찬가지다.

 

에도막부 시기에 수많은 검술 유파와 유술 유파들이 등장하며, 갑주를 걸치고 전쟁터에서 적의 목숨을 빼앗는 데 쓰던 거친 기술들이 세련되고 정밀해지는 과정을 밟는다. 사실 전쟁터에서는 고급 기술이나 정밀한 기술이 그다지 필요 없다. 무거운 갑옷과 투구를 걸친 상태에서는 힘과 체력이 더 우선된다.


갑옷을 벗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상대의 힘줄에 가볍게 칼날을 그어도 상대를 무력화시킬 수 있으며,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상대의 관절이나 급소를 공격하여 제압할 수 있다. 몸이 가벼우니 동작도 빨라진다. 급소들도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으니 공격 기술도 다양해지고 정밀해진다. 그에 따라서 이를 막는 방어 기술도 다양해지고 정밀해진다. 무술이 진화하는 것이다.

 

 

유술만화.jpg

 

 


이처럼 갑주를 입은 적을 상대하는 맨손 기술에서 출발한 유술은 근대 이전까지는 관절 기술뿐만 아니라 적의 급소를 주먹으로 가격하거나, 발로 차는 기술도 포함하고 있었다. 또한 유술 유파에서는 유술뿐만 아니라 검이나 장(杖) 등 무기술도 익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처럼 종합 무술이었던 유술은 메이지 유신 이후 새로운 선택을 강요받는다. 사무라이들은 더 이상 진검을 차고 다닐 수 없게 되었으며, 진검승부도 금지되었다. 전투의 살상 기술인 고류(古流) 유술로 그대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시대에 맞게 개량화의 길을 걸을 것인가.


다케다 소오가쿠의 대동류 합기 유술은 강력한 손아귀 힘을 바탕으로 하여 상대의 관절을 제압하고 꺾는 기술로 최고의 유술이라는 명성을 얻으며 고류 무술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또 다른 선택은 유술이 ‘안전한 무술’인 스포츠로의 변신을 꾀한 것이다. 바로 유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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