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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스크랩]    [Why] '털보'가 카자흐스탄에서 칙사 대접받는 까닭은…    2009/11/07 16:58 추천 0    스크랩 0
http://blog.chosun.com/naltazzi/4301963
 원문출처 : [Why] '털보'가 카자흐스탄에서 칙사 대접받는 까닭은…
 원문링크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1/06/2009110601092.html
  • 정병선 기자 bschung@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 입력 : 2009.11.07 03:08 / 수정 : 2009.11.07 14:33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 올해 초 털이 북실북실한 사내가 10년 만에 다시 나타났다. 1990년대 중반까지 '털보네 국수' '털보네 만두'로 고속도로 이용객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던 바로 그 민봉식(71·사진)씨다.

    민씨는 1973년 한국연도산업을 설립했다. 그 회사는 고속도로 휴게소의 음식 판도를 좌우했다. 1985년에는 털보네식품을 만들어 우동, 만두, 포장 두부를 생산했다. 그 고속도로 휴게소의 대명사가 1994년 연쇄 부도로 사라졌다.

    부도 전 한국연도산업과 털보네식품의 자산은 각각 120억원, 290억원이었다. 부도는 지나친 시설 투자와 자금난 때문이었다. 털보네식품은 결국 풀무원식품에 인수되면서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털보네식품의 좌초는 카자흐스탄에서 시작됐다. 당시 승승장구하던 민씨는 카자흐스탄에 호텔을 임대해 '털보네 한국식당'을 세웠고 카지노도 운영했다. 당시 대우전자의 부품을 수입해 현지에 TV 조립공장을 세우기도 했다. 그의 식당은 최고급으로 평가되며 외국인과 현지 부자들로 가득했다. 카지노, 빵집, 노래방도 현금을 끌어모으며 금세 돈방석에 앉았다. 조립 생산한 TV를 팔아 면화를 확보한 뒤 이를 대우에 되팔아 톡톡히 재미를 보기도 했다.

    민봉식과 막역한 사이인 그룹 '송골매'의 리드싱어였던 가수 구창모씨도 그와의 인연으로 카자흐스탄에서 자동차딜러를 하면서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국내에서의 부도와 때를 맞춰 민씨의 카자흐스탄 사업도 타격을 입었다.

    설상가상으로 집안 내분으로 사업은 사분오열됐다. 현지 진출 초창기 함께 사업했던 사위와도 결별하면서 재기는 물건너 간 것으로 보였다. 사위는 최근 한국 건설업체의 현지 진출을 돕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털보는 뭘 하고 있을까. 한국대사관과 교민들에 따르면 그는 카자흐스탄 정부 인사들과 접촉하며 에너지 자원 분야와 신규 인프라 구축사업을 모색하고 있다. 특이한 건 카자흐 정부가 그를 물심양면으로 돕는다는 점이다.

    민씨가 접촉한 카자흐스탄 정부 인사들은 90년대 초 그가 이곳에서 사업을 시작할 때 도움받았던 사람들이다. 민씨는 당시 어느 외국인도 투자하지 않은 이곳에 과감히 발을 디뎠다.

    그랬던 그들이 20년이 지난 지금 민씨의 재기를 돕고 있다. 그중에는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도 있다. 나자르바예프는 90년대 초 첫 방한 때 정부가 의전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을 때 '털보'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이 은혜를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나자르바예프 대통령 측근들과 고위 인사들은 민씨에게 유전·광산개발권과 채굴허가권을 제시하고 있다. 도로 개발과 상·하수도 개발건 등도 추가로 제시하고 있다.

    민씨의 몫은 국내외에서 투자가를 끌어모으는 일이다. 하지만 민씨의 국내 인맥은 카자흐스탄과 달리 취약해 투자자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그는 국내 투자컨설팅사와 접촉하고 있다고 한다.

    민씨는 한국인 사업가로 가장 먼저 카자흐스탄에 진출해 한때 교민과 고려인 사이에서는 물론 카자흐인들 사이에서도 가장 유명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별다른 활동 없이 교민들의 눈을 피해 다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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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스크랩]    [Why] 국내 '거미박사 1호' 김주필    2009/11/07 16:58 추천 0    스크랩 0
    http://blog.chosun.com/naltazzi/4301962
     원문출처 : [Why] 국내 '거미박사 1호' 김주필
     원문링크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1/06/2009110601095.html
  • 김성민 기자 dori2381@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 입력 : 2009.11.07 03:08 / 수정 : 2009.11.07 16:49

    40년 연구성과 25만마리… 거미박물관 동국대에 기증

    1971년 서울대 실험실에서 고함이 들렸다. "내가 해야 할 것은 거미야!" 목소리의 주인공은 대학원생 김주필(金胄弼·66)이었다. 며칠 전 지렁이를 연구하러 청계천에 들어갔다 죽을 뻔한 그였다. 자욱한 메탄가스 때문이었다. 그는 지렁이를 위해 목숨을 내놓기는 싫었다. 대신 눈에 들어온 게 거미였다. 거미는 지렁이만큼 환경오염을 잘 드러내는 지표종이다. "지렁이보다 연구분야도 넓고 무엇보다 국내에서 아무도 연구하지 않는 게 매력적이었죠."

    그에게 거미는 '엘도라도'였다. 미친 듯 보낸 40여년 세월, 그가 바로 국내 거미박사 1호 김주필 동국대 명예교수다. 지난달 29일 그는 평생을 일궈온 '주필 거미박물관'을 동국대에 기증했다.

    박물관에는 채집한 거미 5000여종, 25만여마리가 전시돼 있다. 일일이 이 거미들을 채집하고 모아온 그는 스스로를 "거미에 미친 놈"이라고 했다. 그는 왜 하필 거미와 사랑에 빠졌을까.

    김 교수가 만든 거미박물관에는 곳곳에 거미줄이 쳐 있다.“ 우라나라에 독거미는 하나도 없어요. 만화나 영화 가 거미를 혐오스러운 존재로 만든거죠.”그는 자식을 소개하듯 거미 예찬을 쏟아냈다. /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황해도가 고향인 김 교수는 6·25 때 월남했다. 가난이 싫어 돈 많이 버는 사업가가 되려 할 때 누군가가 그의 앞길을 막았다. 당시 서울대 동물학과 교수였던 강영선 박사였다. 강 박사는 동물학계의 대부(代父)로 통했다. "12년간 강 박사 집안일을 도우며 지냈어요. 벌레와 식물 이름을 많이 아는 저를 눈여겨본 거지요. 상대에 진학한다고 했더니 눈앞에서 원서를 찢어버리고 동물학과를 지원하라고 하더군요."

    반강제로 동물학과에 진학했는데 공부하다 보니 바로 자기 적성이었다. 그는 "동물연구를 통해 인간의 삶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에 매력을 느꼈다"고 했다. 부족한 학비는 종로 학원가를 뛰며 벌었다.

    수강생들이 인산인해였다. 대학원을 마친 1976년에는 아예 학원을 인수했다. "일단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때 돈을 엄청 벌었죠. 거의 한달에 집 한 채씩 벌었다니까요. 거미박물관도 다 그 돈으로 지은 겁니다."

    학원 경영이 지겨워질 때쯤 학업에 대한 열망이 다시 피어올랐다. 그는 1981년 미련없이 연구실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김 교수의 거미연구가 시작됐다. 그가 최초로 발견한 것은 한국땅거미다. 1983년 당시 한국에는 땅거미가 발견되지 않았다. 중국과 일본학자들은 "한국에는 청정지역에만 사는 땅거미가 없을 것"이라고 비아냥거렸다. 오기가 생긴 김 교수는 땅거미의 모습과 사는 곳을 그린 전단물을 곳곳에 뿌렸다.

    "그와 비슷한 것을 발견하기만 하면 무조건 5만원을 주겠다고 현상금도 내걸었습니다. 당시 5만원은 지금의 50만원쯤 되는 돈이었습니다." '공개수배'된 땅거미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서 발견됐다.

    김 교수는 "그때의 희열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1985년 한국땅거미를 발표하고 발견 장소에 세계 최초로 거미연구소를 세웠다. 그곳이 현재 거미박물관이 자리잡은 곳이다. 그는 주말이면 거미를 찾아 전국을 누볐다. 밤에 산에서 랜턴을 켜고 거미를 잡다 간첩으로 몰린 것도 부지기수다. 해외에서도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내가 가기만 하면 그 나라 거미를 초토화시킨다고 공항에서부터 감시가 심해요. 한번 해외에 나가면 두 달 정도 여러 나라를 돌며 500여 마리 정도를 잡아오죠. 보호종도 몰래 잡아와요. 절대 뺏길 수 없죠. 허허."

    김주필 교수는 "박사모가 박근혜 의원에게 사준 방탄복도 미국에서 거미줄로 만든 것"이라고 했다. 사진에서 빨간색 원형으로 표시된 것이 방탄복
    가장 기억에 남는 해외 출장은 1993년 갈라파고스 제도를 방문한 때다. 김 교수가 갈라파고스를 방문하자마자 환경보호 단체 관계자 2명이 그를 따라붙었다. 그는 관광하러 왔다고 거짓말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김 교수는 대신 꼬마들을 이용했다. 지역 주민이 잡는 거미는 적발되지 않는 것을 이용한 것이다. "숙소에서 아이들에게 '거미 잡아오면 줄게'하며 달러를 흔들었어요. 그렇게 잡은 거미가 200마리는 넘을 겁니다." 그렇게 확보한 거미를 국내로 가져오기 위해 일부러 물리기도 했다. 1991년 미국 미시시피강에 갔을 때다.

    "보호종인 검은과부거미를 못 가져가게 해 일부러 물렸어요. 사람들이 치료하다가 '거미는 어떻게 했냐'고 묻길래 버렸다고 하니 믿더라고요. 그래서 몰래 가져왔어요. 위험한 거미로 알려졌지만 의외로 죽을 확률은 낮거든요." 그는 '밀수의 달인' '거미계의 문익점'으로 통한다. 그는 "공항에서 걸리지 않는 비법이 있다"고 했다. 예를 들어 갈라파고스에서 잡은 거미를 넣은 병에 미시시피강에서 잡았다고 거짓으로 표기하는 식이다.

    그는 "다른 나라에서 연구목적으로 잡았다고 하면 통과가 된다"며 "이중 장부를 작성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그가 모은 거미가 25만여 마리, 최초로 발견한 거미만도 140여 종이다. 그는 왜 거미에 미쳤을까. 김 교수는 "거미는 해충을 잡아먹는 익충(益蟲)"이라고 했다. 늑대거미, 게거미 등을 이용해 농약 없이도 벼멸구나 매미충 같은 해충을 없앨 수 있다는 것이다. 거미 독과 소화효소로는 마취제나 소화제를 만들 수도 있다. 그는 "거미줄을 이용해 신소재 옷감을 만들 수 있고 미사일 방어막도 만든다"며 "박사모가 박근혜 의원에게 사준 방탄복도 미국에서 거미줄로 만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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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스크랩]    "30년전(前) 사우디 사막서 배추농사… 모두 말렸죠"    2009/11/07 16:57 추천 0    스크랩 0
    http://blog.chosun.com/naltazzi/4301961
     원문출처 : "30년전(前) 사우디 사막서 배추농사… 모두 말렸죠"
     원문링크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1/05/2009110501897.html#bbs
  • 곽아람 기자 aramu@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 입력 : 2009.11.06 03:19

    9일 '도산경영상' 받는 김용복 서울영동농장 명예회장
    1983년까지 1100만달러 송금 외화 획득한 공 인정받아

    1975년 4월, 아내와 두 자식을 고국에 남겨둔 41세 가장(家長)은 사우디아라비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호주머니엔 단돈 7달러뿐이었다. 사업에 실패하고 사우디의 미국 회사에 취직했던 중년의 남성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마지막 기회다. 돈을 벌지 못하면 사막에 묻히겠다."

    5일 서울 면목동 사무실에서 김용복(75) 서울영동농장 명예회장은 옛일을 떠올리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오는 9일 사우디 사막에 농장을 창업, 엄청난 외화를 벌어들인 공을 인정받아 도산아카데미가 수여하는 '도산경영상'을 받는다.

    전남 강진에서 태어난 그는 등록금이 없어 중학교를 마치지 못했다. 17세에 고향을 떠나 부산 미군부대에서 '하우스보이'로 일하며 영어와 운전을 배웠다. 야간대학을 나와 5년간 베트남에서 기술자로 일한 돈으로 서울 말죽거리에 논·밭을 사 큰돈을 만졌지만 사업에 손을 댔다. 직원 2명이 기숙사에서 연탄가스로 죽는 바람에 다시 빈털터리가 됐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늘 배고팠는데도 세상에 대해 원망이나 울분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그런 천성을 타고났으니 전 축복받은 사람이에요.”9일 도산경영상을 받는 김용복 서울영동농장 명예회장./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신문을 보다 사우디에서 일할 한국인 기술자 모집 공고를 찾았다. 그가 7달러를 들고 사우디행 비행기를 탄 이유였다.

    사우디에서도 그는 돈 벌 궁리를 거듭했다. 오일 달러가 넘쳐 한국 건설업체들이 몰려들 때였다. 문득 그의 머리를 스친 것은 '김치'였다.

    "사막에 무·배추 농사를 지어 김치를 담가 건설회사에 납품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주변 사람들은 "미쳤다"며 뜯어말렸다. 그는 굴하지 않았다. 땅 2만평을 임대받고 한국에서 농부를 데려다 지하 1000m에서 물을 퍼올려 농사를 지었다. 현지 사람들이 쓰지 않는 닭똥을 가져다 퇴비로 썼다. 1979년 4월 20일, 마침내 배추 500㎏ 생산에 성공했다. 그날이 '서울 영동농장'의 창립기념일이 됐다. "라면 한 개로 두 끼를 때우며 시작한 사업이 승승장구했죠. 15만 건설역군들에게 야채를 공급했으니까요. 1980년부터 3년간 저는 한국에서 개인으로는 가장 많은 외화를 외환은행에 유치한 사람이었어요. 79년부터 83년까지 1100만달러를 한국으로 송금했으니까요."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황무지와 뻘을 사 개간한 그는 현재 강진군 신전면 일대에 100만평의 농경지를 소유하고 있다. 환경농법과 그린 음악농법을 도입한 이 땅에서 연간 1만여 석의 쌀이 생산된다. 89년엔 10억원을 들여 '용복장학회'를 설립,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학비를 대주고 있다. 2005년엔 '한사랑농촌문화재단'을 만들어 매년 우리 사회의 숨은 애국자 5~6명에게 '한사랑농촌문화상'을 수여한다. 앞으론 굶는 어린이를 위한 복지재단을 만드는 것이 그의 꿈이다.

    "어린 시절 전 항상 굶주렸죠. 어머니를 일찍 여의어 어머니 사랑에 굶주렸고,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렸고, 배움에 굶주렸죠. 이 세가지 굶주림이 저를 성장시킨 에너지가 됐어요. 그래서 제 인생 철학이 궁즉통(窮則通·궁하면 통한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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