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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봄의 진원지가 어디냐는 문제를 놓고 많은 여행작가들의 암묵적인 결론은 섬진강이었다. 그래서 해마다 봄이 되면 신문, 방송을 뒤덮는 봄나들이 목적지로 섬진강이 0순위로 나온다. 청매, 홍매, 백매, 찔레, 산수유, 벚꽃, 개불알풀 기타 등등, 전남 광양과 구례, 경남 하동을 흐르는 섬진강 하구는 지금 꽃들의 난장판이다. 마침 내린 봄비에 강변에는 꽃비가 가득하다. 그 만큼 사람들도 난장판이다. 난장판을 피해 조금 북상하기로 한다. 임실 옥정호와 섬진강 뒷길이다. 시인 김용택이 나고 자라서 교사로 은퇴한 마을이라면 알까? 천지사방 봄인 예쁜 마을로 틈입하는 봄나들이 여행.

# 전주 한옥마을 점심(點心)
고속도로를 타고 서울에서 내려가다 보면 허기가 질 무렵 전주에 닿는다. 유서 깊은 이 도시를 지나칠 수 없고 짧은 시간에 몽땅 훑을 수도 없으니 경기전과 한옥마을로 간다.
경기전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을 봉안한 곳이다. 크지 않은 아담한 경내에 잘생긴 한옥들이 들어서 있다. 식전에 잠깐 들러 산책할 수 있는 공간이다. 문화해설사에 부탁해 경기전 전반에 대한 설명을 들어본다. 그리고 식사는 맞붙어 있는 한옥마을 아무 식당에 들러서 해결한다. 관광지라 정통 전주한정식보다는 퓨전요리를 내놓는다. ‘석갈비’라 이름붙은 돌판 쇠고기 구이집이 많은데, 1인분에 1만4000원 선인데 2인분 이상만 판다.

# 옥정호 붕어섬
자, 전주 찍고 다시 남하한다. 27번 국도로 순창-도립미술관 방면으로 가면 된다. 새터교차로에서 운암-임실 방면으로 나간 뒤 좌회전해 곧장 직진하면 호수가 나타난다. 대한민국에서 7대 아름다운 길 중 하나로 선정된 옥정호 드라이브코스다. 고갯길을 굽이굽이 돌아 오르면 전망대가 나온다. 작은 찻집도 있다. 전망대보다는 ‘설리’라는 찻집 주차장이 전망이 더 좋다. 눈 앞에 펼쳐지는 호수와 붕어섬. 주말만 되면 사진가들이 몰리는 멋진 풍경이다.
# 시인이 사는 강변, 섬진강
풍경에 빼앗긴 넋을 되찾고, 오던 길을 되돌아간다. 운암삼거리에서 전주-구이 방면으로 우회전한 후 새터교차로로 올라와 전주-순창쪽으로 가면 길은 호수를 가르는 다리를 지나고 섬진강을 건넌다. 덕치교차로에서 덕치쪽 비포장길로 우회전하면 섬진강 뒷길이 나온다. 초입은 실망스럽다. 공사가 한창이다. 길이 워낙에 아름답고 유명하다 보니, 비포장에 아스팔트를 깔고 옆으로 또 자전거길을 내놓았다. 그런데 원판이 워낙 아름다우니, 길끝 장구목까지 10km안팎의 이 길은 웬만한 개발에도 끄떡없이 아름다운 것이다. 사라지지 않는 아름다움의 요소는 이러하다.

# 매화길과 시비(詩碑)
아마 가로수로 매화를 심은 길은 전국에 이 길밖에 없지 않을까. 화려한 벚꽃 대신에 키 작은 매화들이 산 그림자 속에 심어져 있다. 그래서 길 이름도 매화길이다. 그 길섶에 김용택 시인이 아이들을 가르치던 덕치초등학교도 있고, 드라마 ‘소나기’를 찍은 징검다리도 있고 시인이 살고 있는 진메마을 집도 있다. 심심해질 무렵이면 길가에 시비(詩碑)가 출현해 걸음을 막는다. 예컨대.
봄날
김용택
나 찾다가
텃밭에
흙 묻은 호미만 있거든
예쁜 여자랑 손잡고
섬진강 봄물을 따라
매화꽃 보러 간 줄 알그라
손 잡을 예쁜 여자가 보인다 싶기에 부리나케 달려갔으나 여자는 총총히 징검다리를 건너 봄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대신 매화꽃은 보았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농부가 만들어놓은 매실밭은 꽃잎 분분히 날던 광양의 거대한 매화밭과 달리 작은 강과 새파란 풀들과 시퍼런 소나무와 봄냄새를 가진 작은 꽃밭이었다. 이번 주말? 그 새파란 풀들 위로 꽃비가 내려 있을지도 모른다.

# 구담마을과 장구목
천담마을을 지나 아스팔트로 바뀐 길은 구담마을로 이끈다. 역시 김용택 시인이 가르쳤던 구담분교는 문 닫은 지 오래다. 강변과 골목길은 모두 풍경을 찍으려는 바깥 사진가들 천지다. 강변으로 내려가 길을 걸어본다. 징검다리도 있고 세월교도 있고 출렁다리도 있다. 세월교는 차량도 건널 수 있다. 발 아래로 흐르는 섬진강 물결 소리가 맑다. 그리고 장구목에 닿는다. 강은 물 반 바위 반이다. 내 그런 요상한 바위터는 처음 보았다. 구멍 숭숭 뚫린 암반이 강을 뒤덮었다. 여기에 있는 요강바위는 연전에 간 큰 도둑놈이 이곳에 들어와 한달 동안 탐색 끝에 야밤에 포클레인으로 싣고 가버린 바위다. 주민들은 경기도 용인에서 기어코 바위를 찾아내 제 자리로 가져왔다.

쌀쌀할 무렵이면 요강바위 위쪽 식당 장구목가든에 간다. 산에서 뜯은 들풀과 들꽃으로 반찬을 만드는 식당이다. 예약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다. 예약을 하면 그때 산에서 꽃과 풀을 딴다. 찔레꽃, 냉이, 머위, 쑥, 돌미나리, 표고버섯, 쑥갓, 개불알풀꽃…. 무침도 있고 튀김도 있다. 그리고 접시 하나에는 초고추장과 생 들풀, 들꽃을 내놓으니, 잠깐 잊어버렸던 봄이 거기에 숨어 있지 않은가. 주인 이름은 유영길. 막내딸은 “오로지 흘러가라”고 이름이 유유(唯遊), 그래서 이름이 유유유다. 젊은 날 벌을 치던 주인은 “주말만 되면 노는 사람들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니, 이 집도 몇 년 하고 접기로 한다”고 선언해버렸다. 그리 신뢰가 가지 않는 선언을 들으며 다시 강변에 선다. 먼길 찾아 내려온 섬진강에 봄이 무르익고, 봄나들이가 끝나간다.
인자 부끄럴 것이 없니라/쓴내 단내 다 맛보았다/그러나 때로 사내의 따뜻한 살내가 그리워/산나리꽃처럼 이렇게 새빨간 입술도 칠하고/손톱도 청소해서 붉은 매니큐어도 칠했니라/말 마라/그 세월/덧없다(김용택, ‘산나리’)
봄나들이를 끝낸 시인은 또 서럽다.
꽃도 잎도 다 졌니라 실가지 끝마다 하얗게 서리꽃은 피었다마는,/내 몸은 시방 시리고 춥다 겁나게 춥다 내 생에 봄날은 다 갔니라(김용택, ‘서리’)
그럴까. 오늘은 언제나 우리 남은 인생의 첫날인데. 그 첫날, 섬진강으로 가보자. 정말 내 생에 봄날이 다 가버렸는지 반드시 확인을 해서 시인에게 꽃으로 항의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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