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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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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 (se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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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마리 새    2009/12/10 12:19 추천 3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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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birds.jpg

 

막 날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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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천상의 소리를 만든다 - 오르겔 마이스터 홍성훈    2009/11/17 11:47 추천 6    스크랩 3
http://blog.chosun.com/seno/4322475


파이프오르간 만드는 홍성훈

 

첫 직업은 요트 강사였다. 다음에는 레크리에이션 강사. 아줌마들한테 사교댄스도 가르쳐줬다. 그리고 흥사단에서 일하다가 서울시립무용단에서 한국무용을 했다. 다음에는 뮤지컬 배우였다. 참 다양한 직업을 홍성훈은 거쳤다. 딱 쉰 살 된 이 사내가 가지고 있는 2009년 현재 직업은 오르겔 바우어(Orgel Bau). 파이프오르간 제작자다. 오르겔 바우어 가운데 파이프오르간의 천국 독일에서 마이스터(Meister), 그러니까 명장(名匠) 자격을 딴 사람이다. 자, 속절없이 인생 떠돌다가 지금은 대한민국에 단 한 명 뿐인 천상의 소리를 만드는 사내 이야기.

 

#천상의 소리
파이프오르간은 중세 유럽에서 창안된 악기다. 바람통에 풀무질로 바람을 집어넣은 뒤 파이프에 연결된 건반을 누르면 그 파이프로 바람이 들어가 음을 내게 된다. 파이프의 굵기와 길이, 재질에 따라 다양한 음색과 고저가 탄생한다. 독일에서는 오르겔 슐레(오르간 학교)까지 만들어 파이프오르간의 전통을 잇고 있다. 전직 요트 강사 홍성훈은 이 학교에서 마이스터가 됐다.
“하는 일마다 재미가 있었고, 잘했다. 그런데 사람이 높이뛰기, 야구, 넓이뛰기를 한꺼번에 다 잘할 필요가 있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박상원, 남경원 그런 사람들이랑 같이 춤을 췄는데 또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내가 나이 마흔 되면 뭘 하고 있을까. 저런 사람들처럼 춤을 잘 출 수는 없겠다.’”


 

 

#무작정 독일로, 그리고 오르간을 만나다
그래서 1986년, 뮤지컬극단을 때려치웠다. 무조건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집에 있으면 지난 인생과 똑같은 거니까. 그런데 그냥 갈 수는 없으니까, 기타 배우겠다고 하면서 독일로 간 거다.” 아는 사람 하나도 없었고, 말이 능통한 것도 아닌 그곳에서 기타 배우겠다고 1년 허망하게 살다가 문득 파이프오르간 연주를 듣게 됐다. “이웃집에 오르간 마이스터가 살았다. 어느날 파이프오르간 소리를 들었다. 이건,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이다.” 연주자가 아니라 제작자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그걸로 끝이었다. “운명이었다”라고 했다.
홍성훈은 그 장인 손목을 잡고 늘어졌고, 장인은 요하네스 클라이스라는 사람을 소개시켜줬다. 120년 전통을 가진 오르겔 바우어 집안이다. 홍성훈은 클라이스 지도 아래 파이프오르간 제작의 기초부터 배워나갔다.

제자가 되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이다. 하지만 독일 정부에서 공인하는 마이스터가 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 왜? “파이프오르간 제작자는 독일의 인간문화재와 같은 개념이다. 그런 걸 외국사람한테 인정한다고? 애시당초 응시 자체가 불가능했다.” 도제 수업을 마치고 홍성훈이 오르겔 슐레의 마이스터 과정에 응시하려 했을 때, 그가 살던 시 문화위원회가 열릴 정도였다. “자꾸 이러면 추방할 수도 있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그런데 스승인 클라이스가 적극 밀어줘서 겨우 입학할 수 있었다”고 했다. 입학은 했지만 험난한 10년 인생이 시작됐다.

#플룻 연주자 아내의 힘
비슷하게 어렵게 입학한 프랑스, 캐나다 동료들과 함께 공부했다. 잠깐 한국으로 돌아와 아내와 결혼식을 치르고 다시 독일로 돌아갔다. 아내는 그제서야 자기 남편이 파이프오르간이라는 황당한 악기 제작자를 꿈꾼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플루트 연주자인 아내는 황당한 남편을 위해 연주와 레슨을 하며 삶을 꾸렸다. “이게 참 자존심 상하는 부분”이라고 그가 말했다. “나라고 풍족하게 살고 싶지 않나. 그런데 나는 오르겔을 배워야 했고, 여느 유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가난했다.” 아내는 가난한 몽상가 뒷바라지를 하고 두 딸까지 한국무용과 바이올린 연주자로 키워냈다. 그래, 고집쟁이의 뒤에는 언제나 굳건한 가족이 있는 법이다.

 

#11년만에 마이스터, 장인이 되다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갔다. 작업실 청소부터 나무 켜는 일까지, 예술과는 몇백광년 떨어진 일들이었다. “그저 멋있어 보여서 시작했는데, 이렇게 ‘노가다’인 줄 꿈에도 몰랐다”고  푸념하며 세월이 흘렀다. 입문 11년 만인 1997년 마이스터 최종 시험이 있었다. 주제로 나온 파이프오르간의 설계부터 완성까지 총체적인 실기시험이다.
“자주 있는 시험이 아니었다. 한 번에 붙어야 시간도 절약할 수 있는. 그런데 첫 시험 보는 과정에서 너무 긴장을 한 것이다. 반투명한 트레이싱페이퍼에 파이프를 꽂을 구멍을 표시한 다음에 작업을 하는데, 시험 보다가 설계도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이걸 주워서 다시 작업을 했다.”

다 만들어놓고 보니 음계가 뒤집혀 있는 것이다. 뒤집혀진 설계도를 그대로 올려놓고 작업을 한 탓에 낮은 건반 누르니 높은 음이, 높은 건반에서는 낮은 음이 터져나왔다. “식은땀만 뻘뻘 흘리고 있는데, 같이 시험을 치르는 동료 7명이 자기 것처럼 도와주는 것이다. 꽂았던 파이프 다 들어내고, 톱질이며 대패질이며….” 그 시험에는 떨어졌지만 그 해 최종 시험에서는 이 ‘한 배에 탄 제정신 아닌 자들’이 전원 합격했다.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첫번째는 독일교포인 프랑크푸르트의 구영갑이다), 한국 국적으로는 유일무이한 오르겔 마이스터가 탄생한 것이다.

합격을 한 젊은 마이스터에게 스승 클라이스가 말했다.
“나사는 십자나사가 아니라 일자 나사를 쓰시게. 몇백년 된 나무를 잘라 악기를 만드니, 그 나뭇결에 대한 예의다.”
그리고 굳은 어조의 한 마디. “당신의 나라로 가서 당신의 문화를 만드시게.”
독일에 남을까 생각도 했었지만, 스승의 강권에 6개월만에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IMF가 터져 있었다.

 

# 나이 마흔, 그리고 IMF
1998년 1월 1일 홍성훈은 창경궁에 서 있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니 우리 나이로 딱 마흔이었다. “금의환향은 했는데, 시쳇말로 ‘시장’은 나 혼자 독점하고 있는데 세상이 망한 것이다. 참담했다. 손가락 빨고 지냈다. 이 땅에 정말 파이프오르간 제작자가 필요한가? 그런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왜? 돈이 안 되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스승의 말이 떠올랐다. “지금 당장에 파이프오르간이 필요하지 않더라도, 내가 씨앗이 되어 결국에는 대한민국 파이프오르간의 토대가 될 거 아닌가. 그게 ‘당신의 문화를 만들라’는 말 뜻이 아니었을까.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인데, 그게 하필이면 나였다.”

치부(致富)하려는 꿈이 비전으로 바뀌었다. “아, 이게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작업이구나. 새로운 문화가 확장이 되어 한국 토종 문화로 팽창될 폭탄이구나.” 그렇게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홍성훈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 파이프오르간, 그리고 문화의 확장
“문화로 전승되려면 악기 자체가 생산이 돼야 한다. 수입만 하면 그저 즐기고 소비할 뿐, 순식간에 통째로 없어질 수 있다. 수입 악기는 비싸고 비싸니까 안 사고, 그러면 듣지도 않고, 안 들으면 작곡도 않으니 결국 가서는 그 음악 자체가 없어지게 된다. 어차피 우리 것이 아니니까 없어도 상관없지만, 있으면 더 좋은 문화를 향유할 수 있다. 양복, 구두? 없어도 되지만 있음으로써 우리 삶에 굉장히 많은 변화가 있지 않은가. 오르간도 한국에 와서 우리화가 되지 않으면 소비문화, 귀족문화로 끝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이프오르간은 전형적인 서양 악기요 한국과 상관없는 서양 문화다. 하지만 문화라는 것이, 문 닫는다고 안 들어오나. 막다가 막다가 둑이 터져버리면 감당 못한다. 종속이다. 내가 없어지는 거다. 그러면 비참해진다. 그래서 미리 하드웨어적으로 받을 수 있는 그릇을 만들어놓자. 그러면 결국 그건 우리 것이 된다.”
그리고 한마디 더 했다. “IT도 좋고, 컴퓨터도 좋지만 문화가 없이는 국가가 존재할 수 없다”고. “그 문화의 그릇을 넓히자”고.


 

# 대금과 피리와 아쟁이 있는 파이프오르간을
경기도 양평 6번국도변에 작업실을 차렸다. 이름은 ‘홍성훈 오르겔바우’. 아는 사람이 내준 땅에 가건물을 지었다. 이곳에서 홍성훈은 귀국 10년 동안 파이프오르간을 10대 제작했다. 작품 번호가 붙은 ‘작품’들이다. 한 대 완성에 최소 1년이 걸리는 대작들이다. 서울 광화문에 있는 성공회성당에도 그의 작품이 들어가 있다.
작품을 만들 때, 설계에서 파이프 올리기 직전까지가 1년 걸린다. 집채만한 나무틀을 짜놓고 바람통을 설치하고 길이 5cm에서 최장 10m짜리 파이프 수천개를 붙이면 이제 소리가 난다. 음을 조율한 다음에는 그 지난(至難)한 작업을 역으로 돌려 몽땅 분해해 악기를 설치할 곳으로 옮겨 재조립한다.

낙엽 쌓이는 그의 작업실 내부에는 베토벤이 흘렀다. 목공용 도구, 기계, 잘 켜놓은 나무들이 산적해 있다. 막 나무틀이 완성된 아홉 번째 작품을 그가 보여준다. 건반 위에 음색을 선택하는 단추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홍 플룻’이고 하나는 ‘Piri(피리)’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우리 소리를 집어넣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소리 들어가면 좋지. 이 악기, 우리 악기화가 될 수 있는 소지가 있다. 대금, 퉁소, 아쟁 등등을 넣으면 얼마나 멋있을까. 바깥세상 악기를 통해 우리 음악이 더 발전할 수 있다. 외국이 지난 900년 동안 열심히 발전시킨 거, 우리 것으로 창조할 거다. 자진모리, 중중모리 타령을 연주할 수 있는. 통째로 어느 순간 우리 것이 될 수 있다.”
내년이면 입문 25주년에 귀국 10년을 맞는다. 해마다 작품 하나씩 만들었다. 그때마다 그의 작품에는 한국의 소리가 첨가된다. 홍성훈은 정확하게 스승 클라이스의 지침을 따르고 있었다. 당신의, 아니 나의 문화를 창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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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털처럼 가냘픈 시인 김민식    2009/10/05 17:01 추천 5    스크랩 2
http://blog.chosun.com/seno/4235252

청년 시인 김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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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청양군 칠갑산 아래 장평면 도림마을에 사는 청년 김민식은 시인이다. 시집 두 권을 내고 세 권째를 준비하고 있는 시인은 아프다. 잠자는 시간은 물론 깨어 있는 시간까지 하루 24시간을 누워 있다.
민식은 아프다. 근이영양증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다. 온몸 근육이 조금씩 사라지는 병이다. 팔다리, 얼굴, 어깨에서 시작해 조금씩 내장 근육으로 증세가 파고들어 소화 기능이 약화되고, 순환 기능도 약화된다. 병원에서는 스무 살을 넘기기 어렵다고 했다. 시인 김민식은 1982년 4월 24일 생. 올해로 만 스물일곱 살이다. 기적의 청년 시인 김민식 이야기.

 

근이영양증을 앓고 있는 청년 시인 김민식.

 

2009년 추석 사흘 전
양철지붕을 올린 전형적인 시골 농가 방구석에 민식이 누워 있다. 밤송이가 굴러다니는 뒷산 아래, 청마루 문을 열면 정면에 그가 사는 방이 있다. 창문 아래 앉은뱅이책상 위로 컴퓨터 모니터가 솟아 있다. 길다란 기둥 위로 모니터가, 마치 스스로 그러한 듯이 아래를 내려다본다. 그 아래에 에어쿠션을 푹신푹신하게 깐 요가 깔려 있다. 요 위에 민식이 누워 있다.

눈은 언제나 모니터를 향해 있다. 3년 전에 27킬로그램이었는데, 이후로 몸무게를 재지 않았으나 훨씬 더 몸이 빠졌다고 했다. 성장한 청년이, 자기 나이보다 작은 몸을 가누지 못해 모니터와 동무하며 이렇게 누워 있다.

김민식은 평생을 이렇게 모니터와 벗 삼아 살고 있다.

 

왼쪽 구석 책꽂이에 책들이 제법 많이 꽂혀 있지만, 민식은 책을 읽지 못한다. 문맹이 아니라 책을 집어들 힘이 없다. 대신 민식은 누군가가 설치해준 높다란 모니터와 단추가 여럿 달린 장애인용 마우스를 놀리며 인터넷을 통해 세상과 소통을 한다.

1992년 봄
1992년 초등학교 4학년 신학기가 시작됐다. 민식은 7킬로미터 아래 미당초등학교에서 새 교과서를 받아들고 오다가 트럭에 다리를 치었다. 의사가 말했다. “다친 건 큰 문제가 아닌데, 더 큰 문제가 있어 보이니 더 큰 병원으로 데려가시라.”큰 병원에 가니, 환자 민식이를 밖으로 나가라고 하고는 부모에게 병명을 알려줬다. 근이영양증(muscle dystrophy). 온몸의 근육이 조금씩 사라지는, 그래서 스무 살 되기 전에 심장 근육이 사라지는 순간 숨을 멈추는, 악마 같은 병이라고 했다.

민식이 말했다. “어릴 때니까, 그게 뭔지 몰랐다. 그런데 자꾸 이상해지니까 결국에는 내가 무슨 병인지 알게 됐다. 그때 느낌은, 뭐랄까, 표현할 방법이 없다.”결국 열네 살 무렵 그나마 신세지던 휠체어도 무용지물이 되고 민식은 방에 누웠다. 누워 있는 동안 근육은 차츰 사라져갔다. 발은 오그라들고, 손은 펴지지 않고, 몸무게는 두려울 정도로 줄어갔다.
“너무 화가 나서 벽에다 낙서만 하고, 강아지 못 살게 굴면서 화를 풀었다”고 했다. 그러다 글을 알게 된 것이다.

희귀병 환자, 시인이 되다
사람이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행위를 ‘반성(反省)’이라고 한다. 일어서는 것이 불가능해진 1996년 무렵, 낙서만 하던 민식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천정을 보며 상상한 일들과 정상일 적 겪은 일들을 종이에 써내려갔다. 분통만 터지던 하루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집안 벽은 낙서로 채워지지 않았고, 강아지는 행패를 당하지 않게 되었다.
글을 쓰기 위해 민식은 책을 읽었다. 아직 힘이 남아 있는 손과 팔로 책장을 넘기며 공부를 했다. 모자라는 어휘와 이해력을 뛰어넘기 위해 같은 책을 백번씩 읽었다고 했다. 그렇게 소유하게 된 어휘와 상상력으로 시를 썼다.

1996년, 그 많은 시와 수필 가운데 하나를 한 잡지사에 보냈다. 언제 죽을 지 모를 어린 시인의 삶에 천사들이 찾아왔다. 어떤 천사는 컴퓨터를 들고 찾아왔고, 어떤 천사는 도너츠와 피자를 들고 날아왔다. 천사들은 때로는 어린 시인을 데리고 개울가로 가서 몸을 씻겨주고 함께 놀다 푸드득 날아갔다. 그 가운데 장준(36)이라는 사진가가 있다. 서울 남대문에서 옷을 파는 사내인데, 민식이 친형처럼 따른다. 장준이 말했다.“민식이와 함께 있다 보면 민식이가 내 삶을 돕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 즈음 장평우체국을 통해 배달된 편지들 가운데 1등이 민식에게 온 편지들이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깔아준 인터넷회선과 함께 민식은 세상과 드디어 연결됐다. 키보드와 마우스만 있으면 세상과 함께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천사가 안겨준 컴퓨터로 시를 써서 민식은 장애인대회에서 상을 탔고, 그게 계기가 되어 민식은 시집을 냈다. 그것도 두 권이나. ‘삶은 사는 것만큼 아름답다’ 그리고 ‘사는 날까지 행복하고 아름답게’. 죽는 날까지가 아니라 사는 날까지라고 했다.

       때로는 꽃이 되고 싶다
                                    김민식
 
아주 가끔씩 난
온몸을 촛불처럼 녹아내리고
남아 있는 허물의 찌꺼기를
흐르는 물에 뿌려
한 송이 꽃으로 태어나는 꿈을 꾼다.

(중략)

꽃은 시들면 아름다움을 그리워하게 되고
옆에 있을 땐 소중한 것을 모르다가
떠나고 나면 그리움으로 가슴에 남게 되는 것이기에

내 마음 꽃이 되어 그리움 담아
나로 보이게 하는 꽃이 되고 싶다. 


 

 

김민식의 할머니 복진옥

 

할머니 복진옥 이야기
여든이 넘은 복진옥 할머니. 민식은 “다들 고맙지만, 할머니가 제일 고맙다”고 했다. 아빠 엄마가 일하러 나가고 나면 뒤치다꺼리는 100% 할머니가 한다. 밥풀을 떼서 먹여주고, 티스푼으로 물을 흘려주고, 욕창 생길까봐 자리를 갈아주고, 행여 무슨 일 생길까봐 혼자 놔두고 바깥나들이 꿈도 꾸지 않는 할머니다. 민식의 가족들도 “할머니가 저 아이 목숨 부지해준 것”이라고 말했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지금 대학생인 두 살 터울 동생 형식은 공부하러 대전으로 갈 때까지 “우리 형 내꺼다”라 우기며 형을 따랐다. 가족이 고맙다.
그리고 아무 대가 없이 그저 와서 놀아주고, 씻겨주고, 마당에서 한뎃잠 자며 함께 있다가 돌아가는 천사들이 고맙다. 그런데 할머니는 작년 말에 외출하다가 다리가 부러져 서울 큰아버지 집에 가 있다. “나 때문에 그렇게 고생하셨는데, 얼마나 힘이 드실까.” 민식이 괜히 허공을 바라본다.

천사들과 함께 지내며 세월이 흘러갔고, 어느덧 민식은 스물일곱 살이 되었다. 세월에 반비례하여 근육은 사라져 지금은 나이보다 더 작은 몸의 소유자가 되었다. 그 사이에 민식은 어린아이에서 소년이 됐고, 소년은 청년이 되었다. 청년은 속 깊은 시인이 되었다.

시인, 작곡을 하다
그리고 작곡을 한다. 인터넷을 뒤지다 우연히 발견한 작곡프로그램. "너무 힘들어" 하면서 그가 만든 곡들은 그의 눈망울만큼이나 맑고 명징하다. 음원을 샘플링해 편곡한 곡도 있고, 온전하게 만든 곡도 있다. 모두 에어침대 위에 모로 누워서 오른손과 왼손 손가락 몇 개 겨우 움직여서 만든 곡들이다. “누워 있다 보니 밝은 노래를 듣고 싶어서”손가락만 겨우 움직이는 청년이 만든 곡이 50곡이 넘는다.

 

시인, 스스로를 말하다
그 몇 안 되는 신체 부위로 민식이는 그렇게 할 일이 많다. “운명이라는 것은 믿지 않는다. 운명대로 세상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게 되지 않으니까 스스로 개척해야 하지. 그런데 나는 보통사람보다는 두세 배 더 노력해야 개척할 수 있으니까 조금 힘들긴 하다.” 민식의 말이 이어졌다. 대화 행위 자체가 힘겨운 듯했다.

“남보다 자유롭지 못한 건 있지만 그걸 글로 표현하고 인터넷으로 활동하고 있으니까 딱히 남보다 안됐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냥 포기하고 마는 다른 사람들이 더 불쌍한 거 같다.”

“걸을 수 있다는 게 복인 줄 모르는 사람도 많더라. 걷는다는 느낌을 다시 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 그걸 아예 잊어버린 것 같다. 요즘은 걷는다는 느낌이 뭔가 자주 생각하고 있다.” 몸 작은 시인의 말에서 배어나오는 영혼이 하도 맑아서, 그를 향해 내미는 카메라와 캠코더가 미안하고 민망했다.“하늘이 부르는 날까지 그저 제 할 일 하면서 살 것”이라고 내 눈앞에 누워 있는 맑은 영혼이 나지막히 덧붙인다. “스무 살에 죽는다고 했는데 아직 멀쩡하니, 의사 말은 반의 반만 믿기로 했다”고, 슬쩍 웃으면서.

어느 화가가 그려준 김민식의 초상.

 

몸 작은 시인을 만나기 위해
글이 안 풀리고, 음악이 풀리지 않으면 시인은 인터넷으로 들어간다. 싸이월드 미니홈피(
www.cyworld.com/Eternity61)가 그가 세상을 향해 열어놓은 창문이다. 네이트 메신저 id는 skyminsik62이고, 이메일은 skyminsik62@naver.com이다. 62는 그가 좋아하는 메이저리그 박찬호의 등번호다.
자, 시인 김민식은 수필집을 내고 싶다. 그러기 위해 책을 읽고 싶은데 읽을 수가 없다. 텍스트파일로 만든 전자책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미니홈피에 사람들이 많이 오고, 집으로도 천사들이 많이 왔으면 좋겠다. 취재를 위해 그와 하루를 보내고, 그가 먹고 싶다던 통닭을 함께 찢어먹었다.
그와 있는 동안에는 가슴 속에 햇살이 가득하더니, 작별하는 순간에는 가슴 속 어딘가가 먹구름이 끼는 것이었다. 평생 누워 사는 몸 작은 시인의 눈망울이 맑은 만큼이나 슬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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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이영양증을 앓는 청년시인 김민식의 시들    2009/10/01 16:53 추천 8    스크랩 2
http://blog.chosun.com/seno/4229901

* 최근 재회한 청년 시인 김민식의 시들이다. 근이영양증이라는 악마 같은 병을 앓고서 몸은 어린아이처럼 쪼그라들었다. 하지만 영혼은 훨훨 날아다니는 청년이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chosun.com에 며칠 후.

 

심장의 고동소리

 

그대를 알고

사랑을 배웠습니다.

그리움으로 타는 목마름

제겐 그대가

그저 고마운 분이신데,

땅과 하늘의 시샘이

두터워

나와의 사이를 가로막는군요.

아무리 힘겨워도

그대를 향해 뛰는

내 심장의 고동소리

숨이 멎는 그날까지

그치지 않습니다.

 

 

올빼미

   

검은 구름 지나간 자리

둥그런 보름달 뜨고

다들 잠든 사이

밤새 뜬 눈으로 지새운 올빼미

세상의 파수꾼처럼

새벽을 맞는다.

 

 

연필

 

그대를 위해 부을수록 나의 영혼은 줄어든다. 그대를 위해 줄수록 나의 생명은 한 뼘씩 깎여간다.

나를 깎아다오 나를 남기지 말고 긴촉과 검디검은 흑심

꾹꾹 눌러 연서를 적어 보내려니 몹쓸 지우개로 지우지나 말고 이 마음을 받아 주오

그대를 위해 내 사랑이 뭉뚝해 질 때까지 짜리몽땅해 질 때까지

 

 

강태공

 

 

잔잔한 머릿속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기다린다.

움직임이 멎은 고요한 찌를 노려보다

몽롱하게 꾸벅꾸벅

한 번의 고갯짓에 한 마리의 시어가 건져 오른다.

그렇게 한참을 끄덕거린 후에라야

싱싱한 시어들을 텅 빈 백지위에 회쳐낼 수 있다.

 

 

겨울 아침

 

참새 한 마리 발가벗은 감나무에 앉았다.

 

햇살 콕콕 물어 나르던 부리로 젖은 것을 다독어도 온 밤을 하얗게 새우도록 시려든 가슴은 마르질 않아 두어 번 총총 거리다 날아갔다.

 

빈가지 끝에 추억으로 매달린 기억 시간의 여운을 채우며 나풀나풀 흰 눈 되어 살아나려나.

 

참새 한 마리가 흔들고 간 겨울 스산한 잿빛 아침

 

 

빗속에서는 빗소리를 듣지 못한다

 

사랑 속에서는 사랑을 말하지 말라 빗속에서는 빗소리를 듣지 못하듯이 사랑 속에서는 사랑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아 그리움이 간절할수록 그리움을 잃고 헤맬수록 그 길은 더 멀어질 뿐이니…….

   

사랑 속에서는 사랑을 찾지 마라 느긋한 거리에서 빗소리가 가장 정겹듯이 평안한 마음에서 사랑이 가장 그립다.

   

오늘 나는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 세상과 만나는 저 빗소리들을 들으며 이 시간도 그리운 나의 사랑과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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